161화
소년의 삶은 음지에서는 참으로 평범한 것이었다.
배불리 먹어 본 적이 드물고, 거리는 기사보다는 건달이나 강도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당시에는 왜 기사들이 저 사람들을 체포하지 않는 걸까 의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팔독 기사단과 건달패거리는 다 한통속이라고 깨닫는다.
치안은 최악에 먹거리도 별로 없으며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눈치를 살피며 서로를 견제한다.
하지만 도로 위에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듯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소년에게도 미소가 지어지는 시간은 있었다.
일단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늘 친절했고, 배려심이 깊었으며 음지의 사람들과는 다른 신념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다녀올게.”
늘 웃으면서 출근을 하시는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면 소년 역시 서둘러 옷을 챙겨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음지에 사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그곳이 소년에겐 어머니와 있는 시간만큼이나 소중했다.
“아, 레온 왔네.”
“오늘은 뭐 할까?”
“저기서 버려진 공 찾았는데 바람 넣을 방법이 있나?”
아이들은 늘 웃으면서 서로를 챙겨 주었다.
건달들도, 어른들도 찾아오지 않는 쓰레기장이야말로 그들에겐 유일한 쉼터였다.
“전쟁놀이 하자!”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은발의 소녀.
골목대장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긴 나뭇가지를 쥐고는 이리 저리 휘두르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당시의 레온은 에레오나에게 일종의 동경을 품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은 어머니라도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로 이곳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고, 거기에 더불어 자신과 같은 고아들을 모아서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음지에서의 생활은 생존이나 다름없었기에 하루하루가 고역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늘 함께 놀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삶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평소처럼 웃으며 출근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신 것.
레온은 울며 의사를 찾았으나 소년은 지불할 돈이 없었고, 음지에서 제대로 된 허가도 받지 못한 의사들에겐 사람 목숨보다 당연히 돈이 우선시되었기에 매몰차게 소년을 걷어찼다.
쓰레기장으로 가 보기도 했으나 왜인지 오늘은 아무도 없었고.
소년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최후조차 함께하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질책.
“끄아아아아!”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었지만 바로 다음 날, 집주인이 돈이 없으면 방을 빼라고 했기에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쓰레기장의 아이들의 리더인 에레오나가 황실의 기사단에게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레온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결국 현실임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방을 빼기 위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와중 소년은 어머니의 편지와 반지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딱 봐도 귀중해 보이는 반지.
팔면 방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어 보이는 반지였지만 편지의 내용을 읽은 후, 그런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내가, 라스 왕국의 왕족이라고?”
그 안에는 어떻게 왕족에서 퍼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여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지만, 레온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편지 속의 어머니는 늘 후회하셨고 미안해하고 계셨다.
만약, 라스 왕국이 아르니티 제국에게 멸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어머니와 자신이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가진 않았을 텐데 하고.
처음엔 믿을 수 없었지만, 반지를 끼는 순간 빛의 신의 목소리가 울려 왔고 권능을 부여받았다.
레온의 삶이 180도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뒤는 참으로 호쾌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혁명군을 찾아가 당시 리더인 로마르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빌었다.
태양왕국 라스의 왕족이라는 것 역시 숨기지 않았다.
“그런 거 상관없어. 자유를 위한다면 우리는 동지다.”
호쾌한 웃음과 함께 로마르코는 레온을 받아 주었고, 당시 간부이던 텐이 레온을 교육하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났지.”
“……중간에 끼어들지 마.”
얘기 도중에 끼어든 에레오나는 콰직 하고 쿠키를 베어 문다. 표정에서부터 꽤나 불쾌하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 레온과의 갈등 탓이겠지.
솔직히 레온의 과거 이야기는 이 정도 들었으면 대충 이해는 됐기에 나는 슬며시 주제를 돌린다.
“근데 얘는 왜 갇혀 있던 거야?”
엘리나에게 듣기로는 바로 옆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했는데 말이지.
“기껏 라스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설득해 놨는데 에레오나는 계속 반대 의견만 제시하면서 흔드니까.”
“그래서 우리 애들은 다 파견 보내고 나는 가뒀다?”
“……한 달 정도만 있다가 다시 빼 주려고 했어.”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냐?”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동의를 구하는 에레오나.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3번 치고 판결을 내린 판사처럼 선언했다.
“유죄. 레온 엘 라디어트 유죄.”
“……이건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
솔직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레온을 보고 에레오나가 조금 당황했기에 여기서 내가 한마디 덧붙인다.
“아무래도 빛의 신이랑 연결이 너무 강하게 되어서 그런 식으로 과격한 방향으로 가게 된 걸 거야. 레온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조건 얘 탓만 할 수는 없어.”
태양왕국 라헬이 있었으면 자신과 어머니는 불행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과 어머니의 바람은 레온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빛의 신 라헬에게 정신이 잠식당한 탓에 그 감정이 더욱 커지면서 결국엔 동료들의 의견까지 묵살하며 태양왕국을 재건하려 한 것이겠지.
“몇 대 바로 날려 주고 싶지만 우선은.”
털썩하고 다시 의자에 앉으며 에레오나는 나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어디 있던 거야? 그렇게 아끼던 제자도 버려두고.”
“맞아, 엘리나가 혼자서 왔을 때는 솔직히 놀랐어.”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도 다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시간이 지나서 엘리나와 루이나 같은 방금 봤던 사람들과 함께, 오랜만에 보는 테리스 선생이나 포르쉔 국장 그리고 로버트 부자까지 모였다.
세 사람은 나름의 인사로 나와의 재회를 기뻐했고, 엘리나는 의자를 끌고 와서는 억지로 내 옆자리에 비집고 앉았다.
“그럼 엘리나랑 떠난 이후부터의 얘기를 해 줄게.”
엘리나가 세인트 학교에 입학한 것부터 시작해서 교수로 일했던 것. 그런데 거기서 세크메트와 마교단장 로그니다츠 세이야스와 싸우고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이미 알고 있던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 주었지만,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을 못 쓰게 돼서 애를 가르치려고 학교를 보냈다고?”
“그랬다가 누구 하나한테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에레오나와 레온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깨만 으쓱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당시에는 약을 먹으면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도망칠 수단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뒤부터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령계에 갔으나 신들이 침공 중이라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고, 세계수가 받아 줘서 몸이 치료되었다는 것.
원래였다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깨어날 수 없을 뻔했지만, 에레오나가 내가 줬던 신호탄을 터트려 줬기에 외부의 마나가 들어왔고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까지.
여기서 에레오나는 뭔가 코끝이 찡해졌다며 슬쩍 시선을 틀었다.
“정령계에서 돌아온 다음은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교단장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쪽으로 갔지. 아니나 다를까, 아이란이 젤롬을 조종해서 제라니를 죽이려고 하더라고.”
이제야 갑작스러운 젤롬의 고백과 3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내막을 알게 되어 다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선물을 웃으며 말해 준다.
“제라니 황제랑은 이미 얘기가 끝났는데 그는 퍼지들에게 자유를 선언할 생각이야. 이제 성지와 음지의 구분도 없이 모두가 제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평등해지는 거야.”
그러자 다들 입이 떡하고 막힌다.
혹시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솔직히 조금 걱정은 되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건 아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노력해 왔기에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제라니 황제 역시 그들과의 전투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느꼈기에 자유를 허락했다.
“너희의 노력은…….”
침묵 속에서 내가 한마디를 하려 했지만.
“드디어.”
툭 하고 내뱉은 루이나의 한마디와 동시에 일순 울음바다가 되어 버린 상황.
특히나 오랜 시간을 싸워온 루이나, 에딘, 미오 등은 거의 통곡하다시피 울어대기 시작했다.
레온과 에레오나조차 자신들의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슬쩍 나와 눈만 마주치며 고맙다고 말한다.
‘하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명예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닌 오롯이 자유만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실은, 싸움을 원하지 않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평화로운 삶을 바라 왔던 그들이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턱을 괴고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파티.
당연히 결국엔 파티였다.
어찌 보면 모두의 숙원이 이루어졌으니 여기서 가만히 내일을 보낼 수는 없었고, 날이 어두워지자 세이라스의 곳곳에선 캠프파이어가 시작되었다.
톤파 영감은 아껴왔던 술을 꺼내 들었고 소니아는 얼음으로 조각상을 만들며 분위기를 띄웠다.
성벽을 지키던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며 음식을 날랐고, 누군가가 흥얼거리던 가락이 노래로 변하고 노래는 춤으로 이어졌다.
“흐아.”
변경 쪽에서 대기 중이던 자벨린 부대원들도 방금 데려온지라(꽤나 소란이 일었다.) 어깨를 풀면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200년 전의 과오를 드디어 바로 잡고 그들에게 원래의 삶을 쥐어 준 기분.
평생 오늘의 기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멀리서 마이노 변경백과 레온이 이야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태양왕국을 재건한다는 말에 찬동하여 함께해 주던 그를 어떻게 설득할지 솔직히 걱정되었지만.
“괜찮아요, 저 사람은 부패한 제국으로부터 시민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니까. 대마도사가 직접 왔는데 생각이 바뀌겠죠.”
오랜만에 보는 하트가 옆에서 슬쩍 걱정하지 말라며 한마디 해 준다.
“역시 권력이 짱이라니까, 짜릿해.”
장난스럽게 말하자 하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에레오나와 톰이 맥주잔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때 하트가 슬며시 귓속말을 건넨다.
“그거 아세요?”
“음?”
배시시 웃으며 에레오나와 톰을 가리키며 하트가 말한다.
“두 사람 사귀고 있어요.”
“뭐?!”
정령계에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고 가장 충격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