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처음에는 하늘을 나는 마법이라도 사용한 줄 알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육체 강화를 통해서 내가 있는 곳까지 날아온 광경은 일종의 집념마저 느껴졌다.
“접근전으로 가면 내가 이겨!”
철컥 하고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오며 목을 노리고 휘둘러진다.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라는 건 인정했지만 공중에서 자세가 무너진 상태의 검격까지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거리를 벌릴 생각으로 바람 마법을 통해서 에레오나를 밀었는데, 그녀는 공중에서 몸을 틀며 교회로 보이는 건물 위에 착지했다.
일단은 에레오나를 제압해야겠다 생각해서 포박용 마법을 쏘아 보지만 녀석은 건물 옥상을 뛰어다니며 유려하게도 마법을 피해 댔다.
“와.”
옆에 빠져 있던 엘리나의 순수한 감탄사.
지금의 에레오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다시 간다!”
빈틈이 생기자 바로 자세를 잡고 이쪽을 향해 다시 한번 도약하는 에레오나.
방벽을 쳐서 막아 보려 했으나 심검에 둘러싸인 에레오나의 검은 종잇장처럼 나의 방패들을 베어 나갔다.
‘톨레스 님이 보시면 좋아하셨겠군.’
톨레스 트레이먼이 가르쳤던 심검의 경지가 이제는 그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음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지난 3년간을 검에 매진해 왔는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나도 진지하게 상대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전신을 강화하고 그대로 위를 향해 치고 올라오는 에레오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당연히 에레오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막아 냈지만.
“마법사의 근접전은 이런 거야.”
주먹 끝에 담긴 폭발 마법이 그대로 터지며 에레오나는 추락했다.
나 역시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그녀는 혹시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고양이처럼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거리를 벌리며 일종의 투기장이 형성되었다.
거추장스럽다는 듯 은발을 쓸어넘긴 에레오나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데.”
“그래, 네가 겪어 온 3년을 한 번 보여 줘.”
“후우, 꽤나 내려다봐 주고 있는데.”
자세를 잡은 에레오나는 다시금 앞으로 치고 나올 준비를 시작했고.
“…….”
나는 있는 그대로의 마나를 발산했다. 황실에서 친위대와 단장 렉스턴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자 금방이라도 달려들려던 에레오나의 눈이 크게 뜨이며 나를 바라본다.
네가 원했던 것처럼 나는 진심으로 싸워 줄 생각이었기에. 황실의 기사들도 버티지 못한 압박감 속에서 검을 한 번이라도 휘두를 수 있다면 인정해주겠다.
“끄으윽!”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도 꽤나 고역인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가 봤을 때는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수준 차이는 알았으니 이제 그만해도 괜찮은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었지만, 누구보다 그걸 거절할 사람이 바로 에레오나라는 걸 알고 있기에.
지금 마나를 거둔다면 오히려 더 화를 낼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로 그녀를 압박했고 결국.
기합과 함께 심검을 두른 검이 허공에 휘둘러진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하게, 자신의 전신을 죄여오는 마나를 베어 냈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저게 어떤 원리로 이루어진 것인지 다시 한번 보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마나를 베어 냈고, 발목의 쇠사슬을 부순 것처럼 그대로 앞으로 치고 나왔다.
“심검의 일정 경지에 이른 건가?”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내가 체체로를 쓰러트리고 벤트 몰란을 죽였을 당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녀 역시 이 자리에서 자신의 한계에 한 걸음 벗어났다.
치고 나오는 날카롭게 벼린 검이 다시 한번 나를 노리고 날아든다. 많은 것이 담긴 검의 끝이 나의 지팡이와 맞닿았고.
거친 폭발이라도 터질 듯한 기세였으나 잠잠하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왜…….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거야.”
우수수 아래로 쏟아지는 은빛 머리칼에 표정을 감추며 에레오나는 조심스레 물어왔다.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솔직하게 답해 주자 에레오나는 피식하고 헛웃음을 친다.
“나는 또, 내가 부른 건 줄 알았네.”
“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얘기인가 싶어 되묻자 에레오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푸념하듯 털어놓는다.
“네가 정령계 갈 때 줬던 신호 있잖아. 최근까지 그거를 가지고 있다가 요번에 터트렸거든.”
“……?”
분명 마수왕 관련해서 정령왕한테 물어보기 위해서 정령계에 갔을 때 이쪽과 그쪽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에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나를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있었다.
왜 레온한테만 주냐면서 에레오나가 투덜거려서 같이 만들어 줬었지.
“아!”
그러자 착하고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세계수의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나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 속에 빠져 있었지만, 외부의 마나가 갑자기 찾아와 깨웠었다.
“그거구나.”
내가 혼자서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에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뭐야? 또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별로인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려나.
나는 천천히 지팡이를 내리며 웃었고, 에레오나도 그에 맞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네 덕분에 내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건 맞아.”
“……?”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그 정도만 설명해 줘도 충분하겠지. 웃으며 감사를 표하고 슬쩍 뒤에 있는 거대한 탑을 바라본다.
저기에 에레오나가 갇혀 있었는데, 꼭대기 층에서 그 녀석의 권능이 물씬 풍겨 왔다.
‘그래, 너도 성장했다 이거지.’
조금 기대를 하며 어깨를 풀고 있는데, 에레오나가 옆에서 툭 하고 끼어든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
“음?”
“3년 치 확실하게 패라는 소리야.”
아, 그 얘기였어?
담담하게 팔짱을 끼며 말하는 그녀에게 알았다고 답해 준 후, 바로 쏘아지듯 하늘로 날아들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기에 원하는 대로 바로 벽을 부숴 버리며 내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턱을 괴고 의자에 앉아 있는 금발의 미남, 레온.
“이야, 오랜만이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으나 녀석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래, 결국 올 줄 알았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은 처음 보는 꽤나 멋들어진 검을 들어 올리며 황금빛 권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화려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다들 3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지만, 이놈은 몸만 크고 정신은 역으로 퇴화한 듯했다.
“태양왕국을 재건하겠다고?”
“기억을 읽었나 보군.”
무덤덤하게 중얼거린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순히 퍼지들의 자유만을 쟁취해 봤자 그들은 갈 곳 없는 짐승처럼 헤맬 뿐이다. 그들에게 자유뿐만 아닌 장소도 필요하다.”
“음.”
“무작정 자유만 쥐여 준다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아이를 벌판에 버리는 꼴이나 다름없다.”
나름 이해는 간다만.
“그게 변명이야?”
“뭐?”
“잘 끼워 맞췄다. 텐 님이 알고 있던 너의 진심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이거였구나.”
“…….”
“혁명군은 단순히 수단이었을 뿐이야. 너의 진짜 목적은 결국 태양왕국의 재건이었던 거야.”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지만.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 혁명군 활동 도중 네가 보였던 독특한 행동들이 말이야. 소극적으로 퍼지들을 모으기만 하던 것부터 시작해서.”
녀석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가면을 쓴 것처럼 차갑고 냉정해 보였지만 권능은 일렁이며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말이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간에 흔들렸지?”
녀석은 분명히 혁명군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해 왔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감정에 공감했고 자신의 욕심만으로 그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겠지.
텐이 그의 마음을 잘 잡아 주었겠지만, 그가 없어진 지금 레온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 거겠지.
줏대 없는 자식.
“참, 네 행동을 보면 이중적인 부분이 많아. 어떤 때는 과할 정도로 냉정한데 어떤 때는 정에 휩쓸린단 말이지.”
“그래서 분명하게 자신을 다잡았다.”
스릉 하고 묵직하게 올라오는 검의 끝을 내게 겨눈다.
“나는 태양왕국을 재건한다. 왕족의 피를 이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내 책임을 다하겠다.”
괜히 헛웃음이 나오며 물었다.
“혹시 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 기억하냐?”
자세를 잡은 레온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대신 내가 정답을 말해 주었다.
“개판이면 혼난다고 했지? 넌 오늘 좀 많이 혼나야겠다.”
황금빛 권능이 바닥과 천장을 타고 내게로 뻗어 온다. 빛의 신의 권능이 강력한 건 알고 있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의 내 적수는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신들을 죽이고 왔는지 알면 네가 깜짝 놀랄 텐데!”
권능을 압도하는 마나를 쏟아낸다. 레온은 그대로 앞에 놓인 책상을 발판 삼아 내게 날아들었으나 나 역시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고 방망이를 휘두르듯 힘을 주었고.
통쾌한 타격음과 함께 레온이 천장을 뚫고 날아갔다.
꼭대기 층이었던지라 바로 추락할 줄 알았으나 녀석은 권능을 다리에 감아 하늘에 떠 있었다.
솔직히 기예에 가까운 숙련도에 놀랐으나, 녀석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자신의 검에 권능을 감싸더니 그대로 참격을 내질렀다.
기사가 오러를 쏘아 대는 것과는 또 다른 위력.
레온의 권능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높아진 것도 있었지만, 빛의 신이 그 힘을 일부 되찾은 것 역시 컸다.
빛의 신의 이름을 덧쓴 채로 자신이 빛의 신 행세를 하던 흑두사에게서 어느 정도 그 힘을 다시 빼앗은 듯했다.
‘아마 세크메트를 죽였기 때문이겠지.’
나와 함께 체포됐던 세크메트는 탈출한 나와는 달리 처형이 진행되었다고 듣긴 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신자를 잃은 탓에 흑두사가 인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불안정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참격을 막아 내고 마법을 쏘아 대려던 순간.
“어?”
레온의 전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푸르던 하늘에 떠오르는 긴 수염을 가진 분노한 노인의 형상.
우레아처럼 본 적은 없지만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빛의 신이 레온의 몸을 빌려 지금 이 자리에서 강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