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와, 여기가 맞는 건가?”
멀리서 보이는 걸 봐서는 3년 전의 그곳이 맞는 건가 싶었다.
자유 혁명군과 마르코스가 무너지고 그 장소를 이어받아 청색횃불과 철거북도 같이 합류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것들 엄청 열심히 살았구나.”
번창한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해졌다.
3년간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마도사가 되어서 이 자리에 왔다.
퍼지들의 자유 역시 이제는 먼 꿈이 아닌 실제로 곧 다가올 현실이었다. 왜냐면 제라니 황제와 이미 얘기가 끝난 사안이었으니까.
제라니 역시 퍼지들이 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해 주었으니까.
물론, 바로 해방을 시키면 반발이 워낙 심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어쨌든.
최고의 지원군을 얻어 온 셈이지 않은가.
대마도사가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되어 주리라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나를 조금 더 끌어올려 날아갔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면 적인 줄 알 수도 있겠구나.”
겉에서 봤을 때는 무슨 성처럼 벽도 쌓아 두고 꽤나 철저하게 수성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변경백한테는 안 들킨 건가.”
아니, 저 정도의 요새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 동쪽을 사수하는 마이노 변경백이 모를 리가 없었다.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한 건가 고민하던 순간, 바로 밑에서 누군가가 손을 휘젓는 게 보였다.
아직 요새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는지라 뭔가 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마이노 변경백과 그의 기사들이었다.
지상으로 내려오니 그들은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아, 나인 줄 모르는구나.’
대마도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보니 변방까지 내 얼굴을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기사들이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웃으며 말하려 했지만,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대마도사님이십니까?”
“음?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아해하며 묻자 마이노 변경백은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답했다.
“로브의 재질과 더불어 그렇게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실 수 있는 분은 현 대마도사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 추측이었는데 맞았군요.”
“아아, 그러시구나.”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것 참 허술한 변명이시네요.”
“……!”
마이노 변경백은 변명은 허술했지만 상황 판단 자체는 뛰어났다. 거짓말이 들키자마자 바로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고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끄응.”
등에 메고 있는 선물이 담겨 있는 가방에 괜히 상처가 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바로 지팡이로 땅을 통 하고 두드렸고.
내 중심으로 폭발이 일어나듯 바람이 퍼져 나가 그대로 기사들을 밀어냈다.
몇몇은 나무에 그대로 꼬라박고 기절을 했지만, 대부분은 주춤하면서도 자세를 잡았다.
“내가 대마도사인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여기를 지나갈 것도 이미 알았으니까 기다렸고. 뭐, 어떻게 알았는지 잘 모르겠긴 한데.”
“크윽, 기사들은 진형을 갖춰라!”
“왜 나를 습격하는지가 가장 궁금하네. 혹시 마이노 변경백도 마교를 믿으십니까? 그래서 감정적으로 이렇게 달려든 거예요?”
그러자 마이노 변경백은 석양이 떠오르는 것처럼도 보이는 아름다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부정했다.
“그깟 더러운 것들과 우리를 동일시하지 마라!”
“……그렇죠, 그렇겠죠.”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의도지?
내가 혁명군이랑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혁명군이 저런 요새를 지을 때까지 가만히 두면 안 됐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지만 도저히 맞물리질 않았다.
마이노 변경백 같은 유능한 남자가 도대체 어째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습격했는지 정말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달려들고 있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내게 검을 뽑아 들었으니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일단은 손속을 두어 기절만 시켰다.
피유웅!
마지막으로 남은 변경백은 나무에 기대어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더니 그대로 하늘로 쏘아 댔다.
“실패했다는 신호인가 봐요.”
“신민들을 위해 이곳에서 저문다는 것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
이 양반이 참.
말하는 건 마음에 드는데 앞뒤가 안 맞는단 말이지.
“내가 바로 제국을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대마도사에요. 라디오나 신문 좀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그러자 코웃음을 친다.
“라디오 타워에서 나오는 세뇌를 위한 선전을 믿으라고? 웃기는군. 제국은 이미 끝이다. 이곳은 신민들을 단순히 노예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 시민들을 위해선 새로운 태양이 필요하다.”
“…….”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지금까지 마이노 변경백은 다른 나라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소리.
지금까지의 제국이 마음에 들지 않고 믿지 못한다는 건 이해한다. 나 역시 그렇기에 많은 걸 바꾸기 위해서 대마도사가 된 것이니까.
그렇다고 변경백이 첩자 역할이었다는 건 문제가 심각하다. 자칫 잘못하면 전쟁으로 곧바로 직결될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지팡이를 휘둘러 그대로 기절시킨 이후, 마이노 변경백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가 신호탄을 보냈다는 건 근방에 있다는 얘기였고 그들이 어디 소속인지, 무슨 계획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어?”
기억을 읽은 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게, 진짜라고?”
마이노 변경백은 타국과 손을 잡고 제국을 어떻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름 아닌 혁명군과.
혁명군과 힘을 합쳐서 새로운 왕국을 새우고 신민들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퍼지들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이상보다도 훨씬 난이도가 높았지만, 주변 국가에서 비밀리에 그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했고 리더의 통솔력과 결단력이 썩 대단했다.
그래, 레온 엘 라디어트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요새로 시선을 두었다.
저 내부는 내가 알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혁명군이 아닌, 멸망한 태양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군대였다.
‘어쩐지 혁명군에 대한 소식이 전혀 없었다.’
뜸해진 혁명군의 활동 소식.
3년 전에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퍼지들도 이제는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는 제도에 있던 제니아에게도 필요가 있으면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2년째 연락이 없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음지에 있던 해바라기 주점은 이미 사라졌었다.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충격을 넘어서 뒤통수가 강하게 당길 정도로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신호탄을 목격했을 녀석들에게로 향했다.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기에 놈들의 성벽에 도달했고, 그곳에는 3년이 지나 조금 더 늙고 머리가 빠진 톤파 영감이 성벽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톤파 영감.”
“진짜 라엘 텔리즈먼이 돌아왔군.”
이곳저곳에서 작은 소란이 들렸지만 톤파는 팔짱을 꼈다. 성벽을 따라 쭈욱 병사들을 확인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한 번씩 기억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린아이였는데 이제는 늠름해진 사람들도 보였다.
“마이노 변경백의 기억은 읽었습니다. 태양왕국 라스를 재건하겠다고.”
“음.”
톤파 영감의 표정을 보아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퍼지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숭고한 신념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권력욕에 찌들어 버리신 겁니까.”
“말을 조심하게. 우리 또한 회의를 통해 결정한 것이네.”
“…….”
“제국은 어차피 썩었네. 퍼지들이 자유를 되찾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차별은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거야.”
“…….”
“그냥 단순히 닭을 잡는다고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닭은 키우는 닭장도, 먹이도 필요하지. 우린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거네.”
퍼지들을 자유롭게 만들기 전,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내게는 이상하게도 변명처럼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마도사가 되어 이곳에 찾아온 저와 협력할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레온에게 들었네. 자네는 퍼지들의 자유가 아닌 신교의 멸망이 목표였다고.”
“…….”
“그 목적을 이루고 있는 지금 자네에게 우리는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들이 아닌가. 아니, 적이나 다름없지. 제국을 위협하는 또 다른 왕국이니.”
“허.”
나와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말이지.
솔직히 화가 났다. 나름대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싸워 온 전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3년의 시간이 지났다고 이렇게 사람이 변하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는 하지만.
문득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무게를 줄이는 마법을 쓰고 있기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애들이 좋아하겠거니 선물을 사 온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옛정을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겠네.”
툭 하고 배낭을 바닥에 조심히 놓으며 나는 지팡이를 강하게 쥐었다.
숭고한 분노는 내 감정에 공감이라도 한다는 듯 웅 하고 울어왔고,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톤파를 향해 말했다.
“제가 할 말입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죽이진 않아 드릴게요.”
아무래도 몇 대 정도 맞으면 정신을 차릴 것 같으니까. 최대한 아프게 때리되 죽이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성벽 내부에서 엄청난 마나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며 이전 대마도사이던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보다 몇 배는 거대한 힘.
다만, 이게 일개 개인의 마나가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몇 날 며칠이고 고생하면서 모았다는 걸 알아챘고, 어느새 성벽 위에 선 하늘색 머리칼의 마법사.
혁명군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던 소니아 에델라이.
“반가워요, 라엘.”
“아주 반갑네.”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법에 집중하느라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당신이 어떤 생각으로 대마도사가 되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겠지.
지금 소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딱 보인다.
“3년이 지난 지금, 제가 당신을 얼마나 따라갔는지가 중요하죠.”
“마법사란 것들이 어디 하나 부족한 건 늘 그렇지.”
“이제는 마법을 쓸 수 있게 됐나요? 그때는 몸이 영 꽝이었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마법은 언제 쏠 거야?”
“저희는 유능한 의사가 있으니까! 죽기 전이면 분명 살려 낼 수 있을 거예요!”
아주 고맙다.
톤파는 소니아가 나랑 친근하게 대화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어쨌든 소니아는 웃으면서 자신의 마법을 완성했다.
“제가 직접 만든! 얼음의 세계랍니다!”
성벽을 선으로 마치 파도처럼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모든 걸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이런 마법을 써 놓고 죽기 전에는 살린다고 말하는 건 이기적인 거 아닌가.
풀과 나무가 급속 냉동되는 광경을 보면서 솔직히 조금 놀라긴 했다.
단순히 얼리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범위.
끝이 보이지 않는 범위로 얼어 가는 풍경을 보며 전쟁에서라면 분명 홀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마법이라 생각했으나.
“너무 급했어. 나를 의식해서 대군마법을 사용한 건 이해하지만 그래서 구멍이 있잖아.”
차라리 힘을 한 점에 모으는 방법을 썼으면 꽤나 고전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힘을 이렇게 넓게 펼쳐 버리면 그 위력이 당연히 반감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게 훨씬 어렵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해내야 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
숭고한 분노를 앞으로 휘두른다.
굳이 전체 마법을 지울 필요는 없었다.
바다가 갈라지듯 딱 내 앞에만 마법이 사라지며 훤히 길이 뚫렸으니까.
“너희는 오늘 진짜 많이 혼 날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