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후우, 이제야 가게 됐네.”
내 방에서 간단히 짐을 싸면서 애들한테 줄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문 옆에 기대고 있던 페르난도가 주의를 주었다.
“……엘리나한테 가서 잘해 줘. 애가 많이 보고 싶어 했어.”
“나도 알아. 얼마나 고생했을지 내가 모르겠냐.”
누가 보면 내 제자가 아니라 지 제자인 줄 알겠네.
“마도사로 들일 거야. 준비하고 있어.”
“그래, 그렇겠지.”
알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는 페르난도. 마도사라는 이름을 내려놓아서 뭔가 후련하면서도 섭섭해하는 게 느껴졌다.
“가능하면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벌이지 말고. 이상한 일 있으면 바로 불러. 마력구로 통신 가능하잖아.”
대마도사가 되고 편한 점 중 하나는 이런 식으로 마도구나 비싼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길어봐야 닷새?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거 알잖아.”
그러자 페르난도는 헛웃음을 치며 황당해했다.
“참나, 동쪽 변경 다녀오는 데 닷새면 엄청 빠른 거 알아? 닷새면 도착도 못 하는데 너는 왕복으로 다녀온다네.”
“어허, 제국의 최고 마법사가 못할 게 뭐 있나.”
“대마도사님, 속옷은 챙기셨어요?”
“……실비아, 내가 알아서 챙길게.”
아직 챙기진 않았지만, 실비아는 거침없이 내 속옷을 들고는 가방에 넣어 주려다 내부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가방을 이렇게 쓰시는 것도 능력이신 것 같아요.”
“잠깐만, 실비아!”
우르르 쏟아지는 가방 속 내용물.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하나하나 개어서 차곡차곡 담아 주기 시작했다.
“이거 보세요. 그냥 구겨 넣은 아까보다 반은 공간이 남죠. 오랜만에 보는 친구분들 선물도 사 간다면서요.”
“그렇지…….”
“큭큭.”
실비아의 잔소리에 꼼짝 못 하는 나를 보며 웃어 대고 있는 페르난도. 손짓으로 놈을 공중에 띄운 후 그대로 밖으로 내던져 문을 닫아 버린다.
페르난도가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게 들려 왔고 실비아는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대마도사님은 마법을 제외하곤 조금 허술한 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 한 사람 실비아가 처음이야.”
“그래요? 하긴, 마법으로 대부분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이렇게까지 허술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녀석들을 본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한 탓에 급하게 한 감이 있었다.
“선물은 정하셨어요?”
가방을 다 챙기고 내 로브를 정리해 주는 실비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몇 개 정한 건 있는데 일단 단 과자 같은 걸 사 가려고. 실비아가 어디 좋은 곳 알고 있어?”
“맛집은 저보다 대마도사님이 더 잘 아시지 않아요? 미식가시잖아요.”
“요즘 거리에 나가면 돌부터 던지는데 내가 어딜 돌아다녀.”
아직도 바깥에서는 대주교들을 풀어 주라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레토리 일가도 위험해질 수 있어서 배틀 메이지를 보내서 지키고 있었다.
배틀 메이지 리더인 라메다이스.
눈치가 없어서 착각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분명 뛰어난 마법사이기에 그가 레반 레토리의 호위로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기사를 쓴 기자에게로 타깃이 돌아갈 우려가 다분했으니까.
실제로 집에 몇 번인가 협박 편지가 왔다고 레반이 코웃음을 친 적이 있었다.
나머지 배틀 메이지들은 현재 주야장천 훈련 중이었다.
라메다이스를 제외하고는 다들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보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훈련을 시켜 뒀다.
“아! 세인트 구 우체국 있잖아요. 거기 맞은편에 베이커리가 하나 있는데 선물용으로 포장된 걸 팔고 있을걸요.”
아무래도 하루를 날아가야 하다 보니 따끈한 빵을 줄 수는 없겠지.
“쿠키 같은 것도 예쁘게 포장해서 팔고 있을 거예요. 가게가 커서 양도 꽤 있을 거고요.”
“그럼 거기 한 번 가 봐야겠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 *
“…….”
동쪽 혁명군들의 도시 세이라스.
태양왕국 라스의 수도 이름을 따온 도시 내부에는 지금 복잡한 감정이 맴돌고 있었다.
혁명군 리더인 레온 엘 라디어트와 그를 옆에서 지키는 루이나를 필두로 한때 각자의 혁명군을 이끌었던 톤파 영감과 소니아 에델라이.
중요한 건 석양의 방패라 불리는 기사, 마이노 변경백까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원래라면 적대관계여야 할 그들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설마 현 대마도사가 여러분과 인연이 닿아 있을 줄이야.”
“……인연이죠.”
쓰디쓴 입안을 괜히 적시려 포도주를 입에 머금은 소니아. 변경백을 제외하고는 다들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째서 그가 대마도사가 된 걸까.”
툭 하고 내뱉은 톤파였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위해서, 혹은 퍼지들을 위함이겠지.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에는 그때의 자유를 울부짖던 혁명군은 없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홀로 눈을 감고 있던 레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대마도사는 분명 우리에게 찾아올 게 뻔해.”
라엘이 아닌 대마도사.
루이나는 아픈 가슴을 애써 감추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는 이제 혁명군이 아니야. 이곳, 세이라스를 필두로 다시 한번 태양왕국 라스를 재건한다.”
라스 왕족의 후손이자 빛의 신의 간택을 받은 레온이었기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제국은 우리의 분명한 적이야. 그리고 대마도사는 그중 가장 골칫덩어리라고 볼 수 있지. 우리는 놈을 죽인다.”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레온의 선언이었다.
* * *
“예?”
루이나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하고 되물을 정도였으니까.
이해하기에 루이나는 굳이 풀어서 다시 설명해 줬다.
“요번에 제라니가 황제가 되고 마도 대회에서 새로 뽑힌 대마도사의 이름이 라엘 텔리즈먼이야. 아마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지?”
“예! 무조건이에요! 그런 악의적인 이름을 쓰면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건 스승님 정도밖에 없죠!”
방방 뛰는 엘리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라엘에게 달려갈 기세였지만 바깥에서 창을 든 병사들이 들어왔다.
“어?”
당황한 엘리나와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루이나는 결국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우리에게 대마도사는 적이야.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구속한다.”
불쑥 들어온 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요?”
“마법사로서 어느 정도 성장한 건 알고 있다. 우리가 너를 쥐고 있는 쪽이 아무래도 그놈을 제어하기 쉽겠지.”
그렇구나 하고 이제야 엘리나는 알 것 같았다.
에레오나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레온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던 이유도, 도시 이름이 세이라스인 이유도.
“태양왕국을 진짜로 재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내가 있다. 이미 공화국이나 다른 왕국에서도 지원을 시작했어.”
“그게 정말 태양왕국을 위한 일인 것 같아요? 그것들은 혁명군을 제국을 대항하는 방파제이자 총알받이로 쓰려고 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엘리나가 눈치챌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레온은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제국의 공세를 견디기만 하면 다른 부족한 부분이 저절로 채워진다는 거지. 그리고 그걸 위해 너와 대마도사를 잡으려는 거고.”
“할 수 있어요?”
마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나를 보며 레온 역시 지지 않고 자신의 권능을 뿜어 댔다.
솔직히 엘리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3년간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것처럼 레온 역시 3년간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권능을 단련해 왔다.
“학교에서 꽤나 칭찬을 해 준 모양인데, 실전은 많이 다르다.”
확실히.
지금 위치에서 전투를 시작하면 검사인 레온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엘리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자신의 패배밖에 그려지지 않았기에 깔끔하게 마나를 거두었다.
“알았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을 말할 입장이 아닐 텐데.”
들어볼 것도 없다는 레온이었지만 엘리나는 바로 말했다.
“나도 스승님이랑 싸울래요.”
“……뭐?”
지극히 냉철하던 레온조차 이번에는 표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만족스러웠는지 엘리나는 미소를 곁들였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스승님한테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한 방 세게 먹여 드리고 싶고요.”
“……장난치는 게 아니다.”
“장난 아닌데.”
“당연히 안 된다. 우리가 놈을 죽이는 순간이 오면 결국 너는 그놈을 지킬 테니까.”
그리 말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레온을 향해 엘리나는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죽일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엘리나를 구속하라고 명령한 뒤, 레온은 어딘가로 향했다.
함께하던 루이나가 괜찮은지 물었지만 그는 답 없이 묵묵하게 걸었고,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듯한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은발이 흘러내리고 있는 여인이 창문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몇 대 쥐어 터지려고 온 건가?”
보지도 않고 레온이 찾아왔다는 걸 맞춘 에레오나는 자신을 이곳에 가둬 둔 범인을 향해 쏘아붙였다.
“라엘 텔리즈먼이 돌아왔어.”
“……뭐?”
레온을 보지 않으려던 에레오나의 다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레온을 바라보았고 그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 갔다.
“제라니 황제가 즉위하고 열린 마도 대회의 우승자 이름이 라엘 텔리즈먼이더군.”
“잠깐만, 그렇다면…….”
“그래, 놈은 지금 대마도사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에레오나의 모습을 루이나도 이해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아마 녀석은 이쪽으로 오겠지, 우리는 놈을 죽일 계획이다.”
“미쳤구나.”
뿌득 하고 이를 갈고 주먹을 쥐는 에레오나.
레온을 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눈을 돌리고 있다가 이제야 알아챘는데, 레온도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회의감과 함께 몸에 들어갔던 힘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
“예전에도 너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이진 않았잖아.”
레온의 아버지나 다름없던 텐의 죽음 이후, 레온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퍼지들의 구원과 자유가 아닌 태양왕국의 재건을 목표로 점점 움직이기 시작한 것.
다른 이들은 처음에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각자의 이유로 결국엔 레온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냥, 그걸 말해 주려 왔던 것뿐이야.”
몸을 틀어 방을 나간 레온과 루이나.
에레오나는 레온이 서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한 놈은 잠깐 제자를 키운다고 사라지더니 3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덜컥 대마도사가 되어서 돌아온다고 한다.
한 놈은 3년 동안 퍼지들의 자유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비틀어 자신의 핏줄을 이용하여 주변국의 지원을 받아 멸망했던 왕조를 다시금 세우려 한다.
“두 놈 다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정말 오랜만에, 에레오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