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페르난도가 구해 준 호텔 방에서 머물려고 했더니 두 사람이 극구 붙잡아서 결국 오늘 하루는 카밀라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여성들이 이렇게 무방비해도 괜찮은건가 했지만, 역으로 나를 그런 방면으로 전혀 보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거겠지.
“음? 노아는요?”
얼마나 컸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와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묻자 카밀라는 웃으며 답했다.
“지금 세인트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엘리나랑도 친구고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노아가 세인트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거기에 전혀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 친구?
“엘리나가 노아의 몸에 있는 마교의 잔재를 알아보고 바로 싸움을 걸었다고 노아가 말하던데.”
“……역시 내 제자.”
어디서 그런 것만 배웠는지 라고 답하려다 아마 나한테 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애써 말을 틀었다.
‘그것보다 노아한테 있는 흔적을 알아챌 정도로 성장했단 말이지?’
그 정도라면 제자의 성장을 기대해 볼 만할 것 같다. 아무래도 혼자 놔두고 온 게 걱정되었었는데 나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밤이 늦었는데…….”
힘들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힘 조절하느라 피곤했기에 그냥 바로 방에 들어가서 자려 했는데, 두 여인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아니, 냉장고에 맥주가 왜 저렇게 많아.
“가게 하세요?”
황당해서 묻자 카밀라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제니아 탓이라고 변명을 한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집 안방인 양 거실 탁자에 판을 벌이는 제니아를 보면서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오늘 조금 피곤한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안 돼요! 오늘 이야기 못 들으면 나 잠 못 자!”
“카밀라, 얘 좀 말려 보세요.”
흥하고 팔짱을 끼는 제니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뒤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져 온다.
슬쩍 뒤를 보니 슬라이스 처진 얇은 고기를 굽고 있는 카밀라.
“뭐 하세요?”
“……안주 만들려고요.”
금방 만들어졌는지 슬쩍 탁자에 안주를 두고는 제니아의 옆에 앉는 카밀라.
“에휴.”
결국 나는 항복을 선언하고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 * *
띠리리리 하는 독특한 알람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다. 오랜만의 두통과 어지러움에 잠시 당황했는데, 순간적으로 예전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건가 착각했다.
주변에 뒹굴고 있는 수많은 맥주병과 패잔병처럼 쓰러진 두 여인을 보고야 이게 숙취라는 걸 알아챘지만.
“아오, 몇 병을 마신 거야.”
슬쩍 몸을 일으켜서 냉장고를 한 번 확인하니 어제 그렇게 많던 맥주들이 텅 비어 있었다.
“그걸 다 마셨다니.”
카밀라는 옛 물의 신도로서 꽤나 경건한 생활을 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여튼 친구 잘못 만나서.
“…….”
아직 자고 있는 카밀라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깨어 있을 때의 그녀에게는 아직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기에 말하진 못했지만, 퓰리의 봉인을 확인해야 했다.
‘시간이 꽤 지났어.’
마교단장 퓰리.
내가 처음 제압한 마교단장으로 당시엔 녀석이 방심하고 있었기에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카밀라에게서 빼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카밀라의 몸에도 무리가 갈 수 있기에 아예 그녀의 안에 봉인을 해 두었는데, 확인이 필요했다.
“으음.”
눈을 감고 확인을 하고 있자니 확실히 미숙하던 내가 짜 뒀기에 불안한 부분이 몇 개 보였다.
아직 퓰리가 자아를 되찾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몇 년만 지나면 다시 녀석이 카밀라의 몸을 빼앗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더욱 견고하게 퓰리를 봉인하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는 카밀라가 다치지 않고 퓰리를 완전히 때어 놓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뜨자.
깜빡이는 눈동자들이 내게로 쏠려 있었다.
언제 눈을 떴는지 제니아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카밀라 역시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흠.”
천천히 손을 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늦은 새벽까지 마셨지만 일어난 시간은 8시.
피곤한 감이 없잖아 있었기에 대충 몸을 풀며 물었다.
“해장이라도 하러 갈까요?”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는 카밀라는 좋다고 답했지만, 제니아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툭.
“쓰레기.”
“야.”
“자고 있던 여자 머리에 손을 얹는 건 도대체 무슨 취향이에요?”
“오해다.”
나한테 그따위 특수 성벽은 없단 말이다.
대충 변명을 한 이후, 씻고 나온다. 성장한 노아의 옷 사이즈가 조금 작긴 했지만 얼추 맞아서 옷을 빌렸다.
‘기분이 좀 그런데.’
몸은 좀 마른 편이지만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소년티가 나던 아이랑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게 뭔가 묘한 기분.
머리를 말리며 나오자 카밀라가 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무언가를 내게 들이밀었다.
“이건, 뭡니까?”
“여기에 귀를 대고 이쪽에 대고 말해보세요.”
마도구인가 싶었지만 마나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카밀라가 시키는 대로 했고.
‘라엘 형?’
벽돌에서는 성숙했기에 굵어졌지만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형! 진짜 돌아왔군요!’
거의 우는 건 아닌가 싶은 녀석의 반응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느 정도 이야기는 할 수 있었지만 목소리가 중간에 끊긴다거나 하는 이슈로 결국 나중에 만나서 마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제도로 오고 싶은 듯했지만, 세인트 학교에서 9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기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전화기예요.”
노아의 목소리가 끊기고 도구를 건네자 카밀라가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군요. 마나가 사용되지도 않는데 제도에서 라마닉스까지 연락이 가능하다니.”
“날이 흐리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불가능하지만요.”
“다른 사람이랑도 가능합니까?”
혹시 가능하면 정말 혁신적이라 생각했지만. 카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쌍으로 된 것끼리만 통화가 가능해요. 2년 전부터 상용되기 시작했는데 엄청 비싸서 저희도 겨우 마련했죠.”
“내가 사 줬어요. 노아 목소리 종종 듣고 싶을 것 같아서.”
옆에서 끼어든 제니아.
확실히 이제는 제국의 누구나 알 법한 인기 가수가 된 그녀에게는 아무리 비싸다 해도 큰 문제는 없었겠지.
‘마나가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긴 하군.’
제국의 황자와 마교단장들이 일부러 마나를 제한하며 황족들만의 전유물로 만들려 했던 계획을 알고 있기에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마도제국의 마나에 대한 금제가 풀리면 이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할 것이 분명했다.
분명 이러한 도구들의 발전에 연료를 주입한 듯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겠지.
누군가가 마나에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크게 부러워하지 않는 세계가 올지도 모르겠다.
포르쉔 국장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능력을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던 삶을 누릴 시대가 찾아오고 있다는 게 피부로 실감이 되었다.
* * *
“내일이 본선이죠?”
국수를 먹고 싶다는 제니아의 의견을 받아 국수집에서 아침 식사 중이었다.
“그렇죠.”
꿀꺽하고 면을 넘긴 후, 맞다고 답해 주자 카밀라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대마도사랑 마도사들은 라엘 님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서요.”
“아무리 마도 대회가 아무나 참가할 수 있다고 해도 범죄자는 안 될 텐데.”
옆에서 거든 제니아.
“그렇긴 한데. 막상 내가 죄인이라고 밝혀진 건 없어서.”
라디오 타워를 테러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사형식 전에 사라져 버렸다.
정말로 대마도사들만 알고 있다 보니 제라니 황제가 자신만 믿으라면서 확언을 주었다.
‘오히려 지면 가만 안 둔다는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지.’
혹시라도 대마도사가 되지 못하면 우리가 세워 둔 계획 자체가 틀어지게 되니까.
“그럼 문제없이 출전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조금 과할 정도로 확인하는 제니아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는데, 그녀는 꽤나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엘 오빠한테 전 재산을 걸면 바로 제국 하나는 세울 수 있게 되는 거 아니야?”
예선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배당금이 높기 때문에 제대로 한 몫 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 듯했고.
“제니아!”
“아, 알았어. 농담 한번 해 본 거야.”
카밀라가 주의를 주었지만 제니아는 진짜로 아쉬운 듯 울상인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데?”
“라엘 님!”
“그지? 괜찮지?”
“어, 전 재산은 몰라도. 돈 많이 넣어 놔. 당연히 나한테도 떼어 줄 거지?”
“물론이지!”
혹한 나는 제니아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끄음.”
레온이 내준 자신의 방에서 엘리나는 끙끙거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다름 아닌 ‘학살자 라엘 텔리즈먼의 마법연구 기록’.
페르난도가 졸업 선물로 줬던 200년 전 스승님의 연구 일지였다.
그런데 이걸 읽으면 읽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이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이게 정말로 스승님의 마법?’
오롯이 전투에만 특화된.
전투만을 바라고 적을 분쇄하겠다는 짙은 일념이 엿보이는 그의 마법은 굉장히 거칠었으나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워낙 파괴적이다 보니 함부로 연습할 수조차 없는 마법들이 대부분.
물론, 용의 마법까지 익힌 엘리나였기에 시간만 주어지면 분명히 전부 익힐 수 있기는 했지만.
"내가 알던 스승님이랑은 많이 다르셨구나.”
200년 전의 스승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엘리나가 떠올리는 라엘 텔리즈먼은 늘 장난스레 웃으면서도 자신이 무언가 하나만 잘해도 호들갑스럽게 칭찬해 주던 남자였다.
그런 친절한 스승님의 200년 전의 마법들은 오롯이 파괴와 학살 그리고 죽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괜히 학살자 혹은 재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은 마나를 운용해 보자는 생각으로 지팡이를 쥔 순간.
‘과거의 그가 궁금하니?’
“어?”
목소리.
그것도 자신과 아주 유사한.
“……크리스티나?”
마교의 힘에 의해서 지팡이에 담겨 있던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기억이 형상화된 존재.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에 와서야 들린 건가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지팡이에 담겨 있는 한 여인의 기억이 엘리나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