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오늘이 바로, 아르니티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머리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제관을 쓰고 있는 제라니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신민들을 위해.
“어둡던 과거를 밟고, 여러분도 저와 함께 앞으로 나아 가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지축이 떠나가라 울려온다.
젤롬 황자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새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3황자 제라니.
대침공에서부터 그가 목숨을 걸고 신민들을 위해 검을 들고 싸워 온 걸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에, 그의 즉위에 대한 반발은 크지 않았다.
귀족들이나 주교 측에서는 당연히 말이 나왔지만, 젤롬이 손바닥 뒤집듯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그들의 입장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말로 황자님께서 황제가 되실 줄이야.”
감격했는지 페르난도는 얼굴이 엉망이 될 정도로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좋은 것만은 아니야. 권력을 가졌으면 그만한 책임도 따르니까.”
“그래도, 그래도!”
핀잔에도 페르난도는 감동이 가시지 않는지 제라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결국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제라니를 바라봤다.
‘미안하네.’
제라니라는 남자를 많이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천성이 무인이었다.
정치 같은 테이블 밑의 전쟁에 대해서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기에 등한시했고, 그 결과 무지하다.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하리라.
행사가 끝나고.
제라니는 자신의 침실로 나와 페르난도를 불렀다.
“그 가면은 아직도 쓰고 있는 건가?”
“어쩔 수 없잖아, 대마도사랑 마도사들은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하얀 가면을 벗으며 나는 숨을 골랐다.
가면이라는 게 생각보다 숨쉬기도 힘들고 시야도 가려져서 상당히 불편했다.
“야! 이제 황제 폐하셔! 말을 높여!”
호들갑을 떠는 페르난도였으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넘어갔고, 제라니도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괜히 그러면 기분만 묘할 것 같아.”
“그렇다네.”
“짜증 나.”
약 올리듯 페르난도에게 혀를 내밀자 녀석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고 쏘아본다.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믿음은 있었지만 막상 눈에 담게 되니 또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단순히 나를 위해서 날 황제로 만든 건 아닐 테고.”
“…….”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도와준 거겠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물어오는 제라니.
감도는 긴장감에 페르난도가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은 분위기 속, 나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물었다.
“그 전에, 내가 예전에 줬던 문제는 풀렸나?”
“문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페르난도의 눈이 찌푸려졌지만, 제라니는 달랐다.
예전과는 다르게 분명하고 또렷한 신념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의 몸짓과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제라니 데 아르니티. 네 눈으로 봤을 때, 퍼지와 성지인들은 정말로 달라?”
플로이드의 안뜰에서 겨루었을 때 그에게 했던 질문.
제라니 데 아르니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더군.”
허탈하면서도 자조적인 답.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었다. 핏줄로부터 이어진 저주 따위는 실은 어디에도 없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나는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제라니 황제는 이미 내 요구 조건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주저 없이 뒷말을 내뱉었다.
“자유.”
억압과 핍박 속에 200년 전 채워졌던 족쇄를, 이제는 풀어헤칠 시간이 되었다.
* * *
마도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대마도사인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조차 최근 들어 상당히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왜냐 묻는다면 당연히 ‘마도 대회’ 때문.
제국의 황제가 눈을 감고 다음 황제로 권력이 계승되면 내부 직책 등은 당연히 다시 뽑는다.
보통은 새로운 황제가 직접 지정하거나 그대로 유지하지만 ‘대마도사’의 자리만큼은 특별했다.
부정과 부패가 지독하리만치 껴 있던 제국에서도 유일하게 실력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대마도사.
마도제국이라 불리는 아르니티의 자존심과도 같은 자리.
이전 대마도사이던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그 밑에 있는 마도사.
1석 로건 웰스와 2석 클로이 노브는 자신의 스승을 뛰어넘기 위한 기회로 보고 욕망을 충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둘을 욕할 수는 없었다.
이건 대마도사라는 자리를 위해서는 당연한 거였으니까.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조차 마도사로서 생활하다가 자신의 스승을 꺾고 대마도사의 자리에 올랐던 거니까.
일종의 선의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형은 준비 안 하세요?”
“맞아요, 저희는 가망이 없어도 페르난도 사형은 조금 다르지 않나?”
총 7명 있던 마도사.
3석 극독의 숑과 4석 철의 마법사 바라모테는 죽었다.
결국 실력이 아닌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5석에서 2단계나 뛰어올라 3석이 된 페르난도 레빌로스.
그리고 그 뒤에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쌍둥이 소녀.
이제 18살이 된 쌍둥이 소녀 4석의 스테아, 5석 스테미.
사탕 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노란 머리의 두 소녀는 웃으며 페르난도에게 달라붙었으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웃어 주었다.
마도사들은 다른 마도사와 일종의 경쟁 관계였다.
로건은 자신에게 관심도 없고 클로이도 로건을 이길 생각만 하고 있다.
숑은 자신을 괴롭혔었고 바라모테는 이상하게 거부감이 든다.
그나마 이 두 소녀만이 페르난도의 쉼터였다.
그렇기에 페르난도는 일종의 비밀과도 같은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해 주었다.
“이번 마도 대회의 우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어.”
“음? 비리 같은 건 아니죠?”
스테아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어 왔으나 페르난도는 그런 건 아니라고 일축했다.
“스승님이 우승할 거라고 보시나요? 저희가 최근에 로건 사형 훈련하는 거 몰래 보고 왔는데 진짜 장난 아니시던데.”
“맞아, 클로이 사형도 엄청나요. 요전번에 훈련장 천장을 박살을 내 버렸잖아요!”
별 같은 두 아이를 보면서 페르난도는 피식 웃어 보였다.
굳이 대답을 해 주진 않았다.
그래, 1석 로건 웰스와 2석 클로이 노브가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최고의 기회를 두 사람 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스승인 대마도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골방에 틀어 앉아 식사도 거르고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인가.
‘완전 괴물이었어.’
솔직히 라엘 텔리즈먼이 황자의 침실에 첫 등장했을 때.
페르난도는 확신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 사람의 뒤만 바라보며 살아가겠구나.
전에도 그렇게 강했으면서, 이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구나.
그래서일까.
페르난도는 의욕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압도적인 무력에 의욕이 상실되었으니까.
“페어로 나갈 수 없는 게 너무 아쉬워!”
“우리는 다음 마도 대회를 노려야지 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서로를 보며 깔깔 웃어 대는 쌍둥이 자매를 보며 페르난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 대회는 마도사라면 무조건 참가해야 한다.
“참가하기 싫어…….”
벌써부터 자신의 미래가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페르난도의 투정이었다.
* * *
마도 대회.
제국의 시민이라면 누구든 관람할 수 있으며 입장료도 일절 받지 않는다.
자리가 부족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볼 수 없지만, 요번 마도 대회부터는 라디오 타워 덕분에 실시간 중계를 라디오로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참가 자격조차 없다.
외인들조차 참가할 수 있는데,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마도제국만의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누구든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광고하지만, 한 번도 외부의 인사가 대마도사가 된 적은 없었다.
제국은 마법사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옛날 마탑이 있을 때는 마탑의 인재를 데려오기 위함이기도 했고.’
아주 오래전에는 마탑에 틀어박혀 있는 마법사들을 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지금은 마탑이 전부 사라져서 그런 효과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어쨌든 결국 누구든 오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현 대마도사나 그 밑의 제자인 마도사들이 차지하는 자리.
예외는 몇 번인가 있긴 했었다.
대표적으로는 스승인 크리스티나 엘리나.
아무런 연줄도, 명성도 없이 출전해서 전부 박살 내 버렸던 광경이 여전히 내 눈에 새겨져 있었다.
“에휴, 솔직히 신분이 불분명하다고 거절되길 바랐는데.”
대기실에서 멍 때리고 있던 내게 페르난도가 양옆에 금발의 쌍둥이를 끼고 다가온다.
“뭐야, 벌써 여자라도 꼬시고 다니냐?”
대기실에선 3석 마도사인 페르난도의 등장에 술렁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뿐만은 아닌 듯했다.
“쌍둥이 마도사 스테아, 스테미 자매다!”
“와, 나 실물 처음 봐.”
“귀엽다!”
“중간에 남자는 누구야?”
“평범하게 생겨서 마도사 둘을 끼고 다닌다니!”
“…….”
울상인 페르난도가 괜히 불쌍해진다.
그것보다 옆에 있는 두 사람도 마도사?
확실히 마나량은 썩 괜찮아 보였다. 쌍둥이라 두 사람의 공명도 좋아 보였는데, 아무래도 둘이 같이 협력해서 마법을 쓰는 타입인 듯했다.
‘그러면 대회에서는 썩 별로겠네.’
개인전으로 치러지다 보니 둘은 사실상 가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본인들도 알고 있는지 썩 긴장한 티는 보이지 않았고.
“음? 사형 친구에요?”
“제자 아니야? 허접해 보이는데?”
입이 생각보다 험하네.
마나를 숨기고 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이해가 되지만, 페르난도는 두 사람은 진정시키며 나를 바라봤다.
“나도 솔직히 불안했는데, 제국의 황제가 시민권 바로 발행해 줘서 별문제 없던데.”
대마도사와 1석, 2석은 내 얼굴을 알지만 아직 만나진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내 뒤에 황제가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
실력으로 이겨 보라지.
“수준은 어때?”
재미없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쌍둥이 자매를 내버려 두고 내 옆자리에 앉은 페르난도.
나는 흘긋 주변을 둘러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형편없어.”
“……그렇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니, 애초에 제국 자체가 웃겨도 너무 웃기지 않는가.
“마나를 과하게 많이 소지하는 사람을 잡아서 수용소에 가두면서 마도 대회라니 이것도 참 웃겨.”
선천적으로 마나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한마디로 재능 있는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썩게 만들고 있으면서 마도 대회를 개최하면, 당연히 어중이떠중이 밖에 오지 않는다.
실제로 아르니티 출신들보다는 타국 출신들이 훨씬 실력이 뛰어나 보였다.
“개선될 거야. 요번에 그냥 개최한 이유는 시간이 없기도 했고…….”
슬쩍 나를 보는 페르난도.
“네가 있으니까.”
아르니티의 어중이떠중이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
결국 내가 다 이기고 대마도사가 되면 끝이니까.
제라니도 그걸 알고 있기에 모순투성이인 이번 마도 대회를 부담 없이 개최한 것이겠지.
“하아, 마교단장들이 뿌려 둔 씨앗이 너무 많아. 다 고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거야.”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듯했지만 어쨌든 해야 할 일이다.
“벌써 대마도사 된 것처럼 말하네.”
피식 웃는 페르난도의 반응에 나는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짜증 난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던 녀석은 잠시 멈추더니 슬쩍 몸을 틀어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제안한다.
“혹시 나 만나면 너무 아프게는 하지 말아 줘.”
“너 하는 거 봐서.”
은근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징그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