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엄청난 기백에 일순 눈살을 찌푸리며 휘몰아치는 강풍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전열을 지키고 있던 정령들이 대거 쓰러지자 기세를 타고 치고 나오기 시작하는 신들.
팔렘의 시선은 프레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빛의 정령왕! 다시 한번 나와 목숨을 걸고 투쟁을 이어 가자!”
“천치 놈이!”
프레이는 울컥 화를 내며 빛의 창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팔렘은 가볍게 창을 휘두르며 막아 냈지만 주변의 다른 신들은 픽픽 쓰러져 갔다.
“가볍다, 가벼워! 다른 놈들은 보지 말고 오롯이 이 팔렘만을 봐야 할 것이다!”
자세를 낮춘 팔렘이 그대로 도약하여 떠 있는 프레이의 앞까지 도달했으나 어두운 그림자가 팔렘을 덮치며 다시 땅에 처박았다.
“노르먼!”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입구를 다시 막아라.”
“알겠다.”
다시금 퍼져 나가는 빛의 일격에 치고 나오던 신의 군세는 주춤거리며 밀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도 지금이 자신의 전력을 쏟아야 할 시간이라고 판단했기에, 뒤를 보지 않은 정령왕의 혼신의 힘이었다.
“이번엔 어둠의 정령왕인가.”
다시 일어난 팔렘은 상처 하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갑옷을 창으로 탕탕 치며 도발까지 감행했다.
“예전보다 손속이 많이 약해졌군!”
“그대들은 조금이라도 있던 명예마저 내버렸고.”
“모욕하는 것인가!”
으르렁거리는 팔렘에게 노르먼은 비웃음과 함께 천천히 검은색 검을 뽑아 들었다.
“악신들에게 패배했다고 우리에게 투정 부리는 꼴을 보고 내가 뭐라 말해야 하지?”
“우리는……!”
욱한 팔렘이 무어라 외치려다 체념한 얼굴로 창을 내리며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맞다, 패배했지. 그렇기에 정령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꼴사납구나!”
“알고 있다. 허나, 악신들조차 이 팔렘의 창을 꺾지는 못했다.”
전쟁에서는 패배했어도 전투에선 지지 않았다는 얘기였지만, 그건 결국 패배자의 변명이자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
“변명치곤 상당히 구차하군.”
“그래, 무어라 말해도 결국 통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할 걸 알고 있다.”
창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은 팔렘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전투 중에는 그 모든 걸 잊을 수 있어서 참으로 좋지.”
“추악하군.”
분명 예전에는 명예를 알고 창을 휘두르던 전사 중의 전사였다. 적이지만 분명 존중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추함뿐이었다.
시작된 전투와 울려 퍼지는 병장기 소리.
노르먼과 팔렘의 전투는 그야말로 전장 속의 전장이었다.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고위 존재들의 전투에 나 역시 입을 벌리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능할 것도 같다.’
왜인지 자신이 싸우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고위신이다.
그것도 전투에는 이골이 나 있는 전쟁과 투쟁의 신임에도, 악신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둘을 상대했기 때문일까.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다.
‘마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하다못해 테리스 선생이 줬던 약이라도 있었다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쥔다.
무력함에 분통이 터졌고 가슴이 미어졌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토할 것같이 무거운 숨만 내쉴 뿐이다.
전장의 흥분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프레이의 전력은 압도적인 화력을 선사했지만, 지속될 수는 없었기에 점차 전열이 밀리기 시작했고.
“크윽!”
휘둘러진 팔렘의 창에 노르먼도 검을 놓치고 쓰러졌다.
“정령계에서 오래도 쉬었나 보군. 예전 같은 날카로움이 없구나, 정령왕.”
“아직 안 끝났다.”
“아니, 끝났다. 그대의 말마따나 우리는 악신들에게 패배했지만 그건 우리가 늘 투쟁하고 싸워 왔음을 의미한다. 안일하게 정령계에 있던 정령들 따위 애초에 적수가 아니다.”
팔렘이 천천히 노르먼에게 다가가 안식을 선사하려던 순간.
날아든 거대한 불꽃이 팔렘의 가슴팍을 강타했고 그는 무참히 땅을 구르며 날아갔다.
“원래 강한 놈들을 좀 쉬어도 상관없어.”
후 하고 자신의 손끝에 피어 올린 불꽃을 꺼트리는 플레임.
녀석은 씨익 하고 웃으며 나를 보더니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처음엔 혜성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그게 정령들임을 깨달았다.
세계수를 배경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령들이 전장에 합류하여 그 판도를 뒤집고 있었다.
“에휴, 나이 많아서 그런지 한번 움직이는데 꽤 뜸을 들이네.”
기지개를 켜며 내 옆으로 걸어온 운디네는 찡긋하고 윙크를 날렸다.
“대화는 잘됐나 봐?”
물음에 운디네는 손을 입에 대고 고민하며 중얼거린다.
“뭐, 주먹이 90% 정도였지만 10%는 대화가 있었으니까 대화라고 볼 수 있겠지?”
“어머? 너랑 플레임은 그냥 죽자고 팼잖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라푼젤.
정령들은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큰 상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미안하다면서 자기들도 신이랑 싸우겠다고 소리 지르는 꼴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단다.”
“정말로 저 숫자랑 싸워서 이긴 거구나?”
이렇게 보면 이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 건지 체감이 좀 되기도 한다.
“뭐, 태초의 정령들이 방금 깨어나기도 했고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
나를 지나쳐 전장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테토의 낮은 목소리.
“결국엔 도와줄 거면서 괜히 심술 한번 부린 거지, 뭐.”
쳇 하고 손을 푸는 운디네는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이제 가 볼테니까 라엘은 뒤에 숨어있어.”
“그래, 괜히 다치지 말렴.”
“알았어, 이것들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약속이라며 손가락을 걸더니 그대로 전장에 합류한 정령들.
태초의 정령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나하나가 고위신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재앙의 정령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니 전장의 기세는 이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딴 창에 맞을 것 같냐?”
“플레임!”
게다가 플레임은 이미 아까부터 가장 까다로운 팔렘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일단은 막아 냈나?’
많은 피해가 있었다.
기존의 정령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이제는 소수만 남아 있는 상황.
태초의 정령들이 합류를 했다고 하더라도 정령계에서 모든 신을 몰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길고도 치열한 전쟁의 서막임을 알기에 승기를 가져왔음에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아이고, 삭신이 쑤시는구나.”
방금까지 전장의 일등공신 프레이가 등을 톡톡 두드리며 내 곁으로 왔다.
“고생했어.”
“이제 시작이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쓰디쓴 맛이 입안에서 퍼지는 것만 같은 안타까움이 담긴 한마디.
가시가 깔린 고난 길이 눈에 훤히 보인다는 듯 프레이의 눈동자는 생기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휙 하고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했다.
“이제 그만 인간계로 돌아가거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 힘도 없는 그대가 여기 있어 봐야 다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되겠지. 우리도 그대가 없는 편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다.”
그녀가 나를 걱정해서 일부러 강하게 말을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싫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부탁한다, 그대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구나.”
“나는 정령계를 지키는 수호의 기사잖아.”
“그래, 그랬지. 하지만 진정으로 그대가 무언가를 해 주길 바랐던 건 아니니라.”
작은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는다.
입가에 걸려있는 옅은 미소는 일종의 위로이자 부탁이었다.
“그거 아느냐? 1차 신령전쟁이 끝나고 나의 친구이자 전우들은 전부 세계수에 들어가 잠에 빠졌다.”
따스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울려온다.
“힘들었고, 지루했으며,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본녀도 그냥 눈을 감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프레이.”
“그때 그대가 나타났지. 썩 좋은 첫인상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 결말도 썩 좋지 않았고.”
그래, 오해에서 비롯된 정령들과의 전투는 빈말로도 좋게 포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와 함께했던 잠시는 즐거웠어, 나를 위해 분노하던 그대를 보며 내게 말해 줬던 이야기가 떠올랐어.”
“…….”
“공주를 구하는 기사. 참으로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냐. 그래서 그대를 정령계의 기사로 만들기로 결정했지.”
나는 마법사라고 계속 말했음에도 기사로 하자고 우기던 이유가 이건가. 헛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하지만 기사님도 쉴 때는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궁전에서 개최할 승전 파티에 그대를 꼭 초대하도록 하마.”
옆에 나타난 포탈.
인간계로 향하는 것임을 알아챈 나는 그녀를 불렀지만 프레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가려무나.”
조심스럽게 떠미는 그녀의 손길에 밀렸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어 봤자 방해만 될 뿐 어떤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너무 강하게 쥐어서 이제는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내려다보던 순간.
“프레이!”
포탈에서 황금빛 검이 쑤욱 하고 내밀어졌다.
프레이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찔러 들어온 검에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순식간에 웅덩이를 자아낸다.
“라, 라엘!”
“기사로서, 역할 하나쯤은 했네.”
슬며시 내려다본 프레이의 얼굴에 눈물이 맺히며 슬픔이 퍼져 나간다.
그래도 왕을 위해 몸을 바치는 역할 정도는 해냈나.
내 어깨를 관통한 검이 쑤욱 빠지더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다시 휘둘러지며 내 등을 베어낸다.
“크억!”
피를 토하며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프레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연신 불러 대지만, 미안하게도 목소리가 울려서 머리가 아프다.
‘죽는 건가?’
검상이 깊다.
출혈도 심하다.
원래부터 부상들 탓에 유리장 같은 몸이었는데 이번 일격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내가 쓰러졌다는 것도 깜빡이는 시야를 통해 겨우 알아차렸다.
뭐지?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등장한 푸른빛 피부에 청색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무언가 말을 해 대지만 들려오지 않았다.
프레이 역시 악에 받쳐 뭐라 소리치지만 웅얼거림으로만 들린다.
하지만 시야가 급변한다.
날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그냥 점점 포근해지고, 눈이 감겨 온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 * *
“신뢰와 믿음의 신 뫼르아네. 전장에 참가한다.”
인간계로 향하는 포탈에서 나타난 건 푸른 피부에 푸른색 갑옷, 찬란한 보검을 들고 있는 신뢰와 믿음의 신 뫼르아네였다.
정령왕 프레이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얼른 라엘을 인간계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차원을 여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네노오옴!”
빛의 창이 순식간에 뫼르아네에게로 날아들었지만, 그는 몸을 틀며 그대로 검을 휘둘러 모든 공격을 튕겨 냈다.
“정령왕이여, 그 목숨을 받아가마.”
뫼르아네는 프레이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 쓰러져 있는 인간은 그에게 있어 벌레나 다름없었기에 방금 자신이 찔렀음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 새끼가!”
하지만 당연히 정령들에겐 달랐다.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언행을 내뱉으며 달려든 라푼젤의 일격에 뫼르아네는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재앙의 정령인가.”
“프레이, 일단 세계수 쪽으로 라엘을 데려가!”
“……응!”
빛 구름에 둥실 하고 떠오른 라엘.
지혈을 해 보지만 신의 보검에 당한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출혈 또한 심했다.
“안 된다! 죽지 마라! 이렇게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살리고 싶었다.
제발, 제발.
그렇기에 하염없이 달렸다.
무의미하다는 건 실은 알고 있었다.
세계수로 향한다고 해도 라엘 텔리즈먼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정령인 자신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라엘 텔리즈먼의 신체는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 왔고.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일선을 넘었으며.
홀로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라엘 텔리즈먼이라는 남자가 살아 있던 것도 기적과 기적이 모여서 만들어진 산물이지 않았을까?
“제발, 라에엘!”
울면서 외쳐 본다.
예정된 죽음 속에서 라엘 텔리즈먼은 이미 동공이 풀려 무엇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무의 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수?”
프레이의 물음에도 나무는 라엘 텔리즈먼에게로 휘감겨 왔고.
수많은 태초의 정령들을 지켜 주고 치료해 줬으며 보호해 주었던 세계수가.
본연의 의지로 라엘 텔리즈먼을 감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