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재앙의 정령들의 참전으로 전장은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아무래도 이쪽의 전력이 갑자기 강해졌다 보니 신들 쪽에서도 한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옷이 더러워졌구나.”
“꽤나 많이도 왔더군.”
“오랜만에 날뛰어서 꽤 재밌었어.”
“고생했어.”
다방면으로 날뛰며 전장의 판도를 뒤집은 나의 정령들을 보며 웃어 주자 녀석들은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며 답해 준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에 정령계가 멸망하는 건 분명하게 막아 냈다.
“라엘!”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날뛰던 빛의 정령왕이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려고 했지만, 손을 뻗어 녀석을 막는다.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쉬면서 들어 봐.”
정령들을 진정시키고 빛의 정령왕에게 물었다.
“일단은 프레이, 혹시 신들 중에 악신도 있었어?”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프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었어. 그러고 보니까 왜 없지?”
의문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프레이. 나도 전장을 봤을 때 불길한 기운을 가진 신은 없었기에 예상이 갔다.
“얘들아, 대침공 기억하냐?”
“잊을 수 없지, 내가 대활약했으니까!”
가슴에 힘을 주며 당당하게 외치는 플레임. 다른 정령들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맞다고 말해 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그때 운디네랑 라푼젤이랑 했던 얘기 기억나? 신들이 돕지를 않는다고.”
“맞아, 원래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 뽐내고 싶어 하는 애들인데.”
“오히려 체체로가 기적을 내렸잖니.”
대침공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신이 자신의 신도에게 기적을 내리면 당연히 그 신을 향한 찬사가 쏟아지고 신도들도 늘어나며 결국 영향력이 커진다.
그런데 신들은 침묵했다.
오히려 악신 체체로가 기적을 내렸으며 플레임이 날뛰는 걸 예의주시하며 지켜봤다.
그때부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야 확신이 섰다.
“신들은 인간계를 버리려는 거야.”
그래, 어째서 기적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어째서 플레임을 예의주시했는가.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게다가 이번 침공은 악신들이 껴 있지 않다는 것에서 확신했다.
신들은 이미 악신들에게 완전히 장악당한 인간계를 버리고 정령계를 먹어 치울 계획인 것.
어차피 버릴 인간계에 자원을 투자하지 않았던 것이다.
“꽤나 얕보였군.”
답지 않게 잔잔한 분노가 담긴 테토의 한마디.
무감각한 테토가 이럴 정도면 다른 정령들도 꽤나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아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신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거지만, 그래도 정령계는 여기까지 밀렸어. 전력이 부족해.”
다시금 침울함이 감돈다.
직접 전장에서 뛰었던 이들이기에 누구보다 전력 차이를 극심하게 느끼고 있을 거다.
“그래서 제안을 하는데, 우리는 세계수로 간다.”
“세계수? 태초의 정령들을 깨우자고?”
프레이가 휙 하고 어둠의 정령왕을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 다른 답을 주진 못한다.
“맞아, 전력을 증원해야만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결계 때문에 거기는 아무도 못 들어가. 게다가 이미 신들한테 점령당해서…….”
“뚫어야지.”
그렇게 어중간하게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여기서 계속 거북이처럼 등껍질 안에만 숨어 있어 봤자 저쪽에서는 여유롭게 기다리기만 해도 우리에겐 승산이 점점 떨어진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조금은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강하게 어필했고, 결국 정령왕들은 잠시 고민해 본다며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라엘, 가능할까?”
발코니에서 바깥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내게 슬며시 다가온 운디네.
늘 해맑던 그녀의 얼굴에도 짙은 근심이 깔려 있었다.
“가능할까가 아니야. 해내야지.”
“그치? 그래야지?”
답이 조금은 도움이 된 걸까, 운디네는 양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거기 결계로 막혀 있는 건 들었어?”
“듣긴 했는데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라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사실상 결계를 뚫지 못하면 앞에는 세계수의 결계에, 뒤에는 신들의 군세에 막혀 그대로 포위당해 버린다.
위험천만한 계획이었지만 이게 아니라면 현 상황을 타파할 수가 없다.
“그런데 태초의 정령들이 도와줄까?”
“뭐?”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니, 게네는 전쟁에 이골이 나서 잠에 빠진 건데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하면 도와줄지 걱정돼서.”
“…….”
맞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정령들을 내버려 두고 지들만 잠에 빠진 녀석들인데 책임감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
“아오, 그러면 진짜 전부 꽝인데.”
정령계 전체가 위험해도 그냥 무시할 수 있는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아마 안 도와준다.
다시 계획을 수정하자고 정령왕에게 말하려 했지만, 운디네가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응?”
“우리가 어떻게든 할게.”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왜인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너희가 한다면 하는 거지.”
운디네가 다른 정령들과 해내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반응은 없었고, 태초의 정령들은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라엘! 들어 봐!”
부르는 소리에 슬쩍 몸을 틀자 프레이가 웃으며 달려왔다.
“그 작전 오케이! 우리는 세계수로 가는 거야.”
“좋아,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지금 당장…….”
“대신 모두가 다 같이.”
“뭐라고?”
내가 되묻자 프레이는 여전히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살아남은 모든 정령들이 다 같이 갈 거야!”
* * *
“나까지 와야 하는 건가?”
전쟁과 투쟁의 신, 팔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묻자 다른 하위 신들은 고개를 숙이며 혹시 심기라도 거스를까 허겁지겁 설명을 시작했지만, 팔렘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진 않았다.
인간계를 버리고 정령계로 넘어가는 것 자체도 팔렘 입장에서는 악신들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라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나마 정령들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건만.
‘이건 전쟁이 아니다.’
신이 인간을 죽이는 걸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인간이 벌레를 밟아 죽이는 걸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래, 이건 학살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행위였다.
학살에 관련된 악신이 봤더라면 박수를 치며 좋아할, 지겹도록 따분하고 재미없는.
그렇기에 팔렘은 정령계를 침공한 첫날을 제외하곤 일체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신이라는 것들이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고 설명하는 걸 들어 보니 정령왕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흠, 재앙의 정령이라.”
분명 1차 전쟁에서도 상당한 힘을 가진 정령들이었기에 다수의 신들이 합심하여 싸웠던 기억이 났다.
‘아직 깨어 있는 태초의 정령들도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조금 흥분되기 시작했다.
좋다.
어디 한 번 그들의 실력을 봐 볼까 하고 바로 출진을 명하려 했으나.
“파, 팔렘 님! 정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호?”
이것들 봐라.
팔렘은 흥미롭게 턱을 괴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 눈짓했다.
분명 듣기로는 정령왕의 궁전을 중심으로 포위가 끝난 상태였는데.
“궁전을 버리고 모든 정령들이 포위를 뚫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로!”
답답한 녀석.
전쟁을 겪어 봤어야 제대로 된 보고를 하지.
매일 누워서 인간들이나 구경하고 악신들 눈치나 보다 보니 이런 기본적인 부분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세, 세계수 쪽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세계수? 거기는 결계로 막혀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팔렘의 일갈에 벌벌 떨면서 어서 물러나고 싶어 하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저놈은 무슨 신이냐?”
옆에 있는 신에게 묻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잉어와 붕어의 신입니다.”
“별의별 신들이 다 있구만.”
“악신들에게 대부분의 힘을 빼앗기고 저런 것만 간신히 남은 거죠. 예전엔 호수의 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멍청한 새끼들.”
이런 잡것들에게 자신과 같은 ‘신’이라는 명칭을 달아 줘야 하는 건가?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화가 나서 터질 것만 같았기에 팔렘은 자신의 창을 쥐고 일어섰다.
“바로 녀석들의 뒤를 쫓는다. 마지막 발악이니 조금은 재밌겠지.”
“예! 바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사실 팔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들이 악신들에게 힘을 빼앗겼다.
대표적으로 고위신인 빛과 태양의 신 라헬을 보면 알기 쉬웠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뱀 새끼한테 이름이나 뺏기고.
같은 고위신으로서 답답해서 짜증이 치솟았다.
안타깝지만 오갈 곳 없는 이 분노는, 정령들에게로 향할 것이다.
* * *
“거리는?”
“금방이니라.”
내 옆에 있는 프레이는 빛을 뿜어내며 제일 앞단에서 정령들을 이끌었다.
남은 정령들의 숫자는 이제 200명 정도밖에 안 돼서 씁쓸했지만 그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신들의 추격이 금방이겠지만, 노르먼이 잘 막아 줄 것이다.”
노르먼은 어둠의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생각보다 평범한 이름이라서 조금 놀랐지만.
“그런데 내가 준 지팡이는 어디 있느냐?”
프레이의 물음에 뜨끔했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잠깐 제자한테 맡겨 뒀어.”
“흐음? 늘 품에 지니고 있으라고 했거늘.”
“마법도 못 쓰는데 지팡이 들고 있어서 뭐 하냐.”
“그래도…….”
아쉬워하는 프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았다고, 다음부터는 들고 다니겠다고 말해 주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저기다!”
나의 정령들이 힘을 합치니 앞에 있던 신들은 허수아비처럼 날아가 버렸다.
확실히 전력을 다한 녀석들의 힘은 봐도 봐도 놀라웠다.
“덕분에 금방 도착했느니라.”
궁전에서도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확실히 어마어마한 크기의 세계수.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단단한 막이 접근을 불허했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초조하게 묻는 프레이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결계를 둘러봤다.
뒤따라오던 정령들도 하나같이 내게로 시선이 쏠려 있었고.
“좋아, 가능할 것 같아.”
“음?”
“너희가 힘 좀 빌려 줘, 나한테 손 좀 얹어 봐.”
프레이의 손을 잡자 그녀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른 정령들에게도 자신의 손을 잡으라 지시했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진 정령들은 이게 무슨 짓인지 의아해했지만, 나는 천천히 결계에 손을 대었다.
“지금부터 너희의 힘으로 이걸 해제할 거야. 힘만 보태, 계산은 내가 한다.”
“그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하다.
수많은 태초의 정령들이 자신들의 안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온 힘을 다해서 만들어 놓은 결계를.
자신들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고작 인간이……
순간, 대부분의 정령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쑤욱 하고 몸에서 빠져나가는 무언가에 당황스러웠지만 덤덤하게 서 있던 결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복잡하긴 한데.”
식은땀이 살짝 흐르고 있었지만 딱 거기였다.
미안하지만 몇 세기나 지났는데 이런 구시대적인 결계를 사용하고 있는가.
“낡아도 너무 낡았어.”
복잡하기에 정교하지 않다.
내구력은 뛰어나지만 부수는 게 아닌 문을 따는 느낌으로.
결국 씨익 하고 미소가 지어진다.
“됐다.”
세계수 전체를 감싸던 결계가 사라진다.
정령들은 당황하며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인간계 시간으로 따지면 5분 정도이지 않을까?
“라엘…… 그대는.”
“응?”
프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체체로와의 결전에서 인지를 뛰어넘는 마법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랬지, 일종의 기적이었어.”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
“아무래도 그대는 그날을 기점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은 듯하군.”
“뭐라는 거야.”
“본인은 잘 모르겠지. 원래 자신의 변화는 자신이 가장 늦게 알아차리니까. 게다가 마나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구나.”
혼자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프레이.
대충 내가 나 자신의 강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다.
“바로 들어가자.”
“그래, 우선 가도록 하지.”
태초의 정령들을 깨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