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잘 전하고 왔어?”
-그럼, 당연하지.
“애는 뭐래?”
-너보다 더 강해질 거니까 얼른 오라고 하더라.
“당차네.”
제자의 답변을 들은 나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어차피 금방 올 수 있을 거다.
“이번에는 어디에 떨어지려나?”
지난번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령왕의 감옥에 떨어질 뻔해서 운디네가 구해 줬던 기억이 있다.
-저번처럼 초대가 아니라 정령왕이 권한을 준 거니까 아마 정령왕의 궁전이랑 연결되어 있을 거야.
“…….”
-괜찮을 거란다. 저번이랑 다르게 이번엔 우리도 같이 갈 수 있으니까.
“그건 좀 다행이네.”
혹시 정령왕이 이상한 수작을 부리면 바로 정령들이 도와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엔 정령계에 간 적이 없네.
-라엘 말고 엘리나도 같이 봐야 했으니까.
-어차피 정령계는 늘 그대로다.
-맞아, 나도 꽤 오래 틀어박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별 달라진 건 없더라.
몇 세기를 살면서 바뀐 게 하나 없는 정령계가 뭐가 다르겠냐며 자기들끼리 대화 중인 정령들.
순간 정령계로 어떻게 가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마음을 먹자 바로 앞에 나타나는 하얀색 문.
“와, 이거 편하네.”
권한을 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싶어 신기해하며 문고리를 돌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음? 라엘?”
빛의 정령왕이 아닌 어둠의 정령왕이 자신의 왕좌에 앉아서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안녕.”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슬쩍 들어 인사하자 양손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 소리가 울려온다.
그러고 보니 손이랑 발에 구속 좀 풀어 달라고 해야겠는데.
“오오! 이게 무슨 일이지? 나를 위해 자신을 포장해 온 건가?”
“아무리 좋게 봐도 포장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냐?”
손이랑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게 포장이라니.
마침 내 뒤에서 같이 걸어 나온 크기가 커진 정령들이 눈치 있게 구속을 부숴 주었다.
“아쉽군.”
“쓸데없는 거로 아쉬워하지 마.”
진심으로 입맛을 다시는 어둠의 정령왕.
피부가 분칠을 한 것처럼 하얀색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온몸이 검은색일 저 남자가 거북하긴 했지만, 잠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기서 잠깐만 살게. 돌아갔을 때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궁리 좀 해 보고.”
정령계로 왔지만 다시 인간계로 돌아가도 어차피 감옥에서 나타난다.
얼마 버티면 알아서 사형식이 지나갈 거고 경비도 느슨해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릴 생각이었다.
“으음.”
그런데 반응이 묘했다.
정령왕이 꽤나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인상을 살짝 쓰며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군, 돌아가라.”
“뭐?”
나 말고 다른 정령들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하나 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분위기.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혼자 있고 싶달까?”
“웩! 저 모습으로 그딴 말을 한다고?”
“말을 가려서 하렴, 울컥해서 죽일 뻔했잖니.”
“혼자 있고 싶으면 내가 쓰던 방에 처박혀 있던가.”
운디네와 라푼젤 그리고 플레임이 한마디씩 내뱉자 어둠의 정령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봤지만, 정령들은 지지 않고 되받아친다.
“이유를 알고 싶군.”
유일하게 냉정한 테토만이 팔짱을 끼며 묻자 정령왕은 그것도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
“어쨌든, 돌아가야 해. 한동안 정령계 출입은 통제한다. 너희도 인간계에서 오지 마.”
“도대체 무슨…….”
너무 뜬금없는 선언이라서 황당함에 물으려 했으나 순간, 바깥에서 들려오는 우렛소리.
“음? 정령계에도 천둥이 치나?”
슬쩍 묻자 정령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발코니로 발걸음을 옮겼고 어둠의 정령왕은 급하게 우리를 막아서려 했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바깥을 확인했다.
하늘이 열려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인간계와는 다르게 다채로운 색감을 가진 정령계의 하늘은 망치로 때린 듯 금이 가 있었고, 그곳에선 어떤 존재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나 역시 상대했던 기억이 있다.
잊을 수가 없지.
그것들 상대하다가 몸 상태가 이 꼴이 되어 버렸는데.
“신?”
중얼거림에 어둠의 정령왕은 이마를 탁 하고 치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들의 침공은 방금 시작된 게 아니었다.
꽤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여기저기서 화마와 같은 산불이 번지고 있었고 태풍, 해일은 당연했으며 심지어는 운석 같은 것들도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각종 자연재해들이 넘치는 상황.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단연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정령왕.
분명 어둠의 정령왕과 한 몸이었을 그녀가 그와 따로 떨어져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신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아, 이래서 돌아가라고 한 거다.”
“뭔 일이냐고.”
이미 눈으로 보고 있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어둠의 정령왕의 입으로 분명하게 현 사태를 듣고 싶었다.
“전쟁이다.”
자포자기했는지 침울한 목소리로 어둠의 정령왕이 답했다.
“제2차 신령대전이 벌어졌다.”
옛 고대에 인간계를 빼앗기 위해 신들과 정령들이 싸웠고 정령들은 패배하여 정령계로 쫓겨났다.
그리고 지금.
신들은 다시 한번 정령들의 처소에 발을 내밀었다.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제일 감정적인 플레임이 가장 먼저 화를 버럭 내며 정령왕에게 따지고 들었다.
최근 정령계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네 정령은 현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승산이 없다.”
“뭐?”
어둠의 정령왕의 대답은 꽤나 참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정령들의 숫자도 부족할뿐더러 전투에 대한 경험이 전무인 정령들이 훨씬 많다. 그에 비해 신들은 1차 전쟁을 치렀던 건 물론이고 악신들과의 전쟁으로 전투엔 이골이 나 있다.”
“…….”
“숫자도 우리보다 훨씬 많지. 질도, 경험도. 모두 이쪽의 패배라는 거다.”
어둠의 정령왕은 한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아마 처음엔 그 역시 이러지 않았겠지.
수치를 모르고 정령계까지 손을 뻗은 신들에게 철퇴를 내리자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잔혹했을 것이다.
딱 봐도 피해가 심상치 않아 보였으니까.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정령계에 남은 정령들의 땅은 이제 이곳밖에 없다.”
“왜인지 아니?”
비릿한 비웃음과 함께 라푼젤이 몸을 돌렸다.
“우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거란다.”
“웃기지도 않네. 정령계 최강을 내버려 두고 전쟁을 논해?”
라푼젤의 말에 동의하며 운디네가 몸을 풀며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다녀오겠다.”
“잘 보고 있어. 네가 계약한 정령들이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테토와 플레임 역시 바깥으로 향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믿음직스러운 녀석들이었나.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하고 있었지만 나름 녀석들과 함께해 왔던 입장으로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지금 말도 안 되게 화가 나 있다는 걸.
“하아.”
정령들이 밖으로 날아가고 뒤에서 숨을 고르는 어둠의 정령왕.
“저 녀석들이 합류했으니까 당분간은 문제없을 거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시간문제다.”
그렇겠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령들이 합류했다고 해도 고작 4명.
개개인으로 보면 비할 존재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전쟁에서는 티끌과도 같은 전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넷이서 전장의 판도를 뒤엎을 수는 없을 거다.
“아예 방법이 없어?”
“없지는 않다만…….”
말을 끄는 정령왕.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그런 모습이 조금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정령계가 멸망하면 또 어디로 도망가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어? 아니면 여기서 다 같이 죽을 거야?”
“…….”
“네가 나한테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어. 정령계를 지키기로 계약했지만 이제 나는 마나를 다룰 수 없으니까 침묵한 거겠지.”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와 봤자 어차피 개죽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정령계로 오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대라면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네가 무슨 의도였든 결국 나는 여기 와 버렸어. 그러니까 말해 봐. 몇백 년을 살면서 둔해진 네 머리보다는 싱싱한 내 머리가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 방법이라는 게 뭔지.
정령왕은 입을 떼고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말했다.
“잠들어 있는 태초의 정령들을 깨우는 거다.”
“아! 저번에 운디네한테 들었어. 나이 많은 정령들이 동면에 들어갔다고.”
1차 신령대전에서 패배하고 각자의 이유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한 정령들이 꽤나 많다고 들었다.
“당장 가서 그것들 깨우면 되잖아.”
뭐가 문제인 거지?
“태초의 정령들은 모두 세계수라는 나무에 잠들어 있다. 중요한 건,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결계를 해제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복잡하다는 거지.”
“너희 잘하는 거 있잖아. 그냥 부숴 버리는 거.”
특기 중의 특기지.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잠들기 전, 놈들이 합심해서 만든 거라 부수려면 정령계 전체를 부술 각오를 해야 한다.”
“골치 아프긴.”
답답해서 뒷머리를 긁적인다.
인간계에서 워낙 여러 일이 있었다 보니 정령계에서 요양이라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겸 왔는데, 이쪽 상황은 더 심각했다.
“거기다…….”
“또 있어?”
황당함에 되묻자 어둠의 정령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계수가 있는 곳을 이미 점령당했다.”
“뭐?”
“……거긴 이미 신들의 영토다.”
욕을 한 바가지로 해 주고 싶었지만 답지 않게 주눅이 들어있는 녀석을 보니 결국 입만 꾹 다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네.”
이 녀석도 열심히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지.
생각해 보면 이 어깨에 얼마나 많은 책임이 올라가 있을지 괜히 안쓰러웠다.
“괜찮으니까 하나씩 생각해 보자.”
크리스티나는 스승님의 지팡이에 담긴 기억과 힘을 이용해서 세크메트가 만든 존재였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시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
그러한 부분은 잠시 접어 두고 나는 전장에 참전한 나의 정령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