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부디, 행복하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승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나만을 걱정해 주시고 생각해 주신 그분의 앞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숨기고 나는 몸을 틀었다.
이곳은 동굴의 내부.
하지만 동굴 특유의 냄새도, 습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또 꿈인가.’
내가 사라지고 스승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돌아가셨던 스승님이 살아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의문이 들었으나 천천히 의식이 수마에서 깨어남을 느꼈다.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니 당연하게도 사지가 쇠사슬에 결박당한 상태.
슬쩍 눈을 돌려 확인하니 꽤나 멋들어진 침대에 누워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 얘들아.”
심호흡을 하며 정령들을 불러 본다.
“얘들아?”
몇 번이나 다시 불러 보지만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답조차 없었다.
‘정령들을 막는 무언가 작동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현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령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정령들의 간섭을 방해할 수는…….
“잠깐만.”
설마 하고 소름이 돋아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문이 열리며 화가 난 채로 방으로 들어오는 스승님.
“라엘! 깨어났구나!”
하지만 나를 보시더니 금세 웃으며 다가와 끌어안아 주신다. 답지 않게 차가운 체온.
“여기는 어딥니까?”
“좀 더럽지? 걱정하지 마. 금방 다른 장소로 이동할 거니까.”
“다른 장소요?”
“응, 같이 살려면 아무래도 층수가 높은 집이 좋겠지? 마당도 있고.”
“…….”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스승님과 평범하게 살아가게 된다면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며 혼자 몰래 웃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크리스티나 엘리나일지언정.
나의 스승은 아니었다.
“거절합니다.”
“뭐?”
“나는 당신과 함께 살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나를 닮은 그 당돌한 계집 때문이니? 그 아이를 보고 확신했어. 너도 나를 그리워했잖아. 보고 싶었잖아! 그러니까 나랑 쏙 닮은 그런 꼬마애를 제자랍시고 데리고 있던 거잖아!”
광기에 가까운 집착.
도대체 나의 스승님은 어째서 이렇게 변한 걸까 하는 슬픔보다 이제는 냉정하게 상황을 해결할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을 따라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그만 풀어 주시죠.”
단언.
그러자 스승님은 ‘제국의 태양’을 불러내더니 내 목에 겨누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어야겠니? 정말로 네 사지를 자르고 데려가게 만들어야겠어?”
“마음대로.”
“으아아악!”
위협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자마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변의 가구들을 지팡이로 마구잡이로 부수기 시작한 크리스티나.
그녀의 감정이 실린 마나 탓에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뱀의 형상을 한 팔찌를 차고 있는 여인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난동을 부려?”
“닥쳐!”
여인은 꽤나 호기롭게 외쳤으나 크리스티나가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자 그대로 벽에 처박히며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끄, 꺽!”
“내가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말 같지 않은가 봐?”
“사, 살……려!”
“벌레 새끼처럼 꿈틀거리는 게 딱 어울리는구나.”
마나의 압력에서 해방된 여인은 자신의 목을 감싸며 애써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크리스티나는 냉혹한 눈으로 선언했다.
“아무리 세크메트 너라도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죽여 버릴 줄 알아.”
다시 지팡이를 휘두르자 세크메트라 불린 여인은 그대로 문을 통해 방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얼마나 강하게 날렸는지 여인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가 울려왔지만, 크리스티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안해, 불청객이 들어왔네.”
미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크리스티나 엘리나는 많이 망가져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음?”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
“아름답고 당당하던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알던 크리스티나 엘리나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타락해 버렸다는 것이.
그녀의 죽음보다도 더욱 아리게 다가왔다.
“미안, 미안해. 라엘.”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지금의 그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사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세크메트의 주인이라는 놈이 올 거야. 그놈만 만나고 바로 우리끼리 다른 곳으로 가서 살자.”
“방금 그 여자.”
“세크메트 말이니?”
내 기억 속에 있는 여자였다.
크리스티나는 그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
“누구인지 아십니까?”
“흐음,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는 걸까?”
말을 끈다.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신호였지만 미안하게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세크메트라는 여자는 제가 본인을 기억 못 할 줄 아는 것 같군요.”
잊을 리가 있나.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
“로그니다츠 세이야스의 신전을 부수러 들어갔을 때, 저 여자가 도망치던 걸 똑똑히 봤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노아와 하남 마을을 그렇게 만든 광신도 집단의 얼굴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금세 얼굴을 가렸기에 몰라봤을 줄 알았겠죠. 바로 도망쳤으니까 모를 줄 알았겠죠.”
“…….”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싸하게 변한다.
진실을 숨기려 했겠지.
미안하게도 세크메트의 방심 탓에 전부 눈치채 버렸다.
게다가 방을 둘러싸고 있는 정령들을 쫓아내는 일종의 결계까지.
이건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정령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정령을 막는 도구나 마법이 만들어졌을 리가.
그래, 지금 정령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건 권능이었다.
정령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신들이 만든.
“저 여자는 마교의 일원입니다.”
“…….”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에게 이제 나는 실망감마저 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슬퍼해야 이 비극은 끝이 나는 것일까.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 더 슬퍼지기에 현 상황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녀의 주인이라면 분명 마교단장인 로그니다츠겠죠. 녀석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당신과 싸우고, 나와 싸웠던.
우리가 함께 살아왔던 제국과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선사했던 남자가 오고 있단 말이다.
무언가 반응을 해 주길 바랐다.
차라리 그녀가 깜짝 놀라며 몰랐다고 말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엘리나는, 너무나 덤덤하게.
“그래, 알고 있어.”
사형선고와도 같은 대답을 내렸다.
* * *
-그래, 이쪽 부근에서 사라졌단다.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라푼젤.
범위가 꽤 되지만 아직 라마닉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소식이었다.
-소환 자체가 차단되고 있어. 근처에 가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어떤 신인지 명확하진 않으나 권능이 분명하군.
플레임과 테토의 분석에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가 보면 되겠지?”
-많이 위험할 거야. 우리만 다녀와도 괜찮아.
근심이 담긴 운디네의 말에 엘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스승님이야. 내가 구해야지.”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하얀색 지팡이를 챙겨 든 소녀.
정령왕이 선물한 라엘의 지팡이를 양손에 쥐고 엘리나는 저택을 나섰다.
“끌끌, 드디어 나왔구나.”
“학장님?”
“손 정도는 보태 줄 생각으로 왔단다.
밖으로 나오니 뜻밖의 손님이 엘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와의 전투로 부상이 심각했던 학장. 벌써 회복됐는지 붕대를 풀고 쌩쌩해 보이는 모습.
“몸은 괜찮으세요?”
“회복 마법을 인간들에게 가르친 게 우리란다.”
“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차, 라엘 텔리즈먼이 제자에겐 자신의 정체를 아직 밝히지 않았구나 하고 학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도와줄 거야?
“정령이라, 오랜만에 보는군.”
팔짱을 낀 운디네가 조심스럽게 학장에게 물었다.
학장은 운디네를 시작으로 라푼젤, 테토, 플레임까지 한 번씩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과 학부모의 불화를 중재하려면 학장이 나서야겠지.”
-라엘은 이제 학생이 아닌데.
“몇 살을 먹든, 내게는 언제까지나 학생이란다.”
플레임의 핀잔에 학장은 웃으면서 답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용족은 절대적 중립을 지킨다고 들었다. 지금 사건은 악신이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대에게 매우 위험할 거다.
테토 역시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장은 별거 아니라며 답했다.
“언제까지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면, 그것도 죽어 나간 동포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가 어느 정도의 결심을 하고 왔는지 깨달은 정령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고마워.
감사를 표했을 뿐.
“흘흘, 정령들과 같이 싸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겠군.”
-우리도 용이랑 다시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야.
기분 좋은 목소리의 라푼젤.
“어? 용? 중립? 무슨 소리야?”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엘리나는 이리저리 물으며 설명을 부탁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도착했으니까.
“여기가 그 교수의 집이라고?”
“학장님?”
마도사 로건 웰스와 클로이 노브.
거기에 붕대를 칭칭 감고 목발을 짚고 있는 페르난도까지.
“자네들은 무슨 볼일인가?”
학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로건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희를 습격한 마법사가 라만 교수의 스승이라고 페르난도가 말하더군요.”
엘리나가 찌릿하고 노려보자 페르난도는 쭈글거리며 눈을 피해 버렸다.
알고 있는 걸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태워 버리겠다는 로건의 협박에는 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단순히 사제 관계라고만 말했지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라만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듣고 그 마법사가 있는 곳을 찾으려 했습니다.”
“저런, 안타깝군. 어제 오후에 그 마법사에게 라만 교수가 납치당했다네.”
“네?”
가장 당황한 것은 단연 페르난도였다.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는 들었지만, 그 괴물 같은 존재를 납치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와 싸워야 한다?
벌써부터 위장이 아파 와서 다시 답답하던 병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서 스승님을 찾으러 갈 거예요!”
번뜩 손을 들고 외친 엘리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가능한 친절한 미소를 띠며 클로이 노브가 물었다.
“어디 있는지 아니?”
“지금은 모르지만 스승님의 지팡이로 알 수 있어요.”
“흠.”
실은 정령들이 찾아주는 거지만 이들에게 정령들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또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 못된 여자를 찾을 거면 따라오세요.”
휙 하고 가버리는 엘리나와 허허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학장.
세 명의 마도사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 역시 작은 소녀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