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머리가 복잡하네요.”
탁상에 볼을 대며 머리를 식히려는 리스테린.
벌써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선 조금 충격적이면서도 따라오기 힘들 내용이었겠지.
그러자 문득 궁금해졌다.
이 아이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런데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해졌었니?”
“예?”
이젠 내가 조금 편해졌는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리스테린.
“마나랑 퍼지에 대한 인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특히나 퍼지에 대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역사이지만, 이어져 온 전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앞의 소녀는 단언했다.
‘제국민의 10분의 1을 노예로 만들어 놓고 고작 직책 하나에 매달린다니.’
퍼지라는 제도가 분명히 노예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는 것.
질문에 리스테린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답해 왔다.
“사실 아버지가 기자시거든요.”
“기자시라고?”
“예, 그래서 식사 시간만 되면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그렇구나.”
하긴, 포르쉔 국장님도 종종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었지.
“지금은 모든 언론이 강제로 통합되면서 아버지도 라디오 타워에서 근무하고 계시지만, 썩 원하시진 않는 것 같아요.”
아이의 표정이 대번 어두워진다.
포르쉔 국장도 라디오 타워에 대한 불만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에게 합류하셨지.
“언론을 통제한다는 건, 시민들을 자기 입맛대로 통제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되잖아요.”
리스테린이라는 아이와 대화를 할수록 이 아이에 대해서 점점 궁금증이 깊어졌다. 특히나 아이의 아버지와는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졸업하고. 제 학비 걱정을 안 하게 되셔서 라디오 타워를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장학금이 필요하겠구나.”
“거기에 더불어 조기 졸업도 노력해 봐야죠.”
주먹을 불끈 쥐는 리스테린을 보며 이 아이가 어째서 엘리나와 친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이 아이는 동경했겠지.
압도적인 성적을 내며 순식간에 4학년으로 껑충 뛰어 버린 엘리나를 보며, 부러우면서도 닮고 싶었기에 저도 모르게 다가온 것이다.
“그러면 잠깐 볼까.”
“예?”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발소리를 최대한 줄여 엘리나의 방으로 향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엘리나.
리스테린도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고, 방문을 슬쩍 열고 고개만 빼꼼 들이밀자 그곳엔 책상 위에서 열심히 펜을 움직이는 엘리나가 있었다.
“저 아이는 잠깐이라도 쉬고 싶지 않은 거야.”
“…….”
“배움이 재밌는 걸까? 그런 것도 물론 있겠지만, 저 아이도 너와 마찬가지로 이 학교를 얼른 졸업하고 싶은 거겠지.”
정확히 말하면 힘을 기르고 싶은 거겠지.
나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슬며시 방문을 닫아 주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엘리나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리스테린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나온 결론에 나는 웃음이 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집에 놀러 오렴. 내가 봐줄 수 있는 부분이라면 같이 봐줄게.”
“저, 정말요?”
“그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야.”
신난다며 몸을 부르르 떠는 리스테린.
물론, 단순히 그녀에게 정을 베푼 게 아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나 역시 얻은 게 있었으니, 종종 이런 식으로 토의를 할 수도 있겠지.
‘마나가 없는 건 썩 아쉽네.’
마법 쪽으로 가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정말 많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이에게 마도의 재능은 전무했다.
평범, 그 자체.
이 아이가 마나를 피부로 느끼고 다루는 일은 평생 없겠지.
‘뭐, 그것도 크게 상관은 없나.’
어차피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나에 재능이 없다.
책을 가져올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는 리스테린을 보며 엘리나의 좋은 친구로 남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치익, 탁.
두꺼운 담배에 불을 붙인 로건 웰스는 깊게 숨을 빨아들였다.
쾌쾌한 담배 냄새가 방을 가득 메운다.
솔직히 담배를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손이 허전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입에 대기 시작했다.
‘가서, 타이난의 의중을 파악해라.’
제1황자 젤롬은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즉결 처형을 해도 상관없다.’
타이난 베르커스가 뛰어난 무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차피 나이가 들 대로 든 노장.
고작 이 정도 사안에 마도사가 세 명이나 투입이 되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라마닉스가 불편해도 너무 불편했다.
그중 가장 짜증 나는 건 단연 퍼지들이 없다는 것.
로건의 저택에는 직접 구입한 수많은 퍼지들이 그의 수족이 되어 주었지만, 라마닉스에는 퍼지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워낙 비밀 임무다 보니 저택에 있는 퍼지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하아.”
그의 스승인 대마도사 알로이스의 제도 제건 작업도 슬슬 마무리라고 들었으니, 임무를 마치고 제도로만 돌아가면 다시 원래의 생활이 돌아오겠지.
뻐끔 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노크와 함께 페르난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담배 연기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페르난도는 조심스레 말했다.
“사형, 정기 보고 시간입니다.”
“금방 가마.”
치익 하고 불을 꺼트리며 재떨이에 담배를 버린 로건이 거실로 나가자 이미 클로이 노브가 마력 통신구를 준비해 놓은 상태.
앞에 앉자 수정구의 불이 켜지며 대마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잘 들리나?]
“예, 스승님.”
로건은 대답과 동시에 임무의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타이난 베르커스에게 반란의 의지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직접 만났던 타이난은 안정과 평화를 중시하는 노인에 불과했다.
거진 한 달 동안 행보를 쫓았을 때도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만, 공화국과 밀접해서인지 그들의 사상에 조금 물들어 있다는 느낌 정도.
[알겠다, 젤롬 황자님께는 그렇게 전하지.]
“그럼 저희는 복귀해도 되는 겁니까?”
[꽤나 서두르고 있구나, 거기가 썩 마음에 안 드냐?]
“정말 마음에 안 듭니다.”
로건의 직설적인 대답에 대마도사는 껄껄 웃음으로 화답했다. 자신의 제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어떤 부분에서 욕구불만인지 훤히 보였다.
로건 웰스는 전투광이었다.
불꽃 마법을 주로 사용하며 마법도 오롯이 전투에 관련된 것들만 배우고 다룬다.
클로이 노브와 대련이라도 하면 조금은 가라앉겠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요란한 짓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돌아오면 내 한 번 상대해 주마.]
“꼭! 꼭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마도사라도 대마도사와의 대련은 귀중한 기회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전패 중인 입장이었기에 로건은 다시금 투지를 불태웠다.
“아참, 스승님. 그러고 보니 요번 세인트 학교에서 혁신적인 이론이 발표됐습니다.”
옆에 있던 클로이 노브의 발언에 페르난도가 슬쩍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흠? 흥미롭다?]
설명을 시작한 클로이 노브.
당연하게도 그건 라엘 텔리즈먼의 ‘마나 순환 이론’이었는데, 말이 끝났음에도 대마도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홀로 생각에 잠긴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 가 봐야겠구나.]
순간적으로 세 마도사는 놀라서 서로를 바라봤다. 스승인 대마도사가 직접 라마닉스로 찾아온다?
“재건 작업은 괜찮으십니까?”
[성벽은 이미 끝났다. 시민들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충분하겠지.]
“하지만 제도를 비우시는 건…….”
요번 대침공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마도사는 황실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잠깐 다녀오는 것이니 괜찮을 거다. 정 안되면 대역이라도 세우면 되겠지.]
“…….”
[젤롬 황자의 억지를 들어주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정도는 허락하겠지.]
맞는 말이었다.
이번 타이난 베르커스를 확인하는 일에 고급 인력인 마도사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건 물론이고, 대침공 때 대마도사가 본 적도 없는 마수를 해치운 거로 만들었다.
이딴 수모를 겪게 했으면 하나쯤은 내놓아야지.
“확실히 혁신적인 이론이지만 아직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로건의 말을 대마도사는 부정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교수라는 사람을 한번 보고 싶구나.]
이렇게까지 스승님이 흥미를 가진다?
마도사들은 긴장하면서도 준비를 해 두겠다 답하며 통신을 끊었다.
“스승님이 직접 오신다니.”
“한동안 돌아가지는 못하겠군.”
클로이는 조금 기대된다는 목소리였고 로건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난도만은 근심으로 표정이 어두웠지만,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내가 왜 그 녀석 걱정을 하고 있지?’
대침공 때 제도를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결국은 국가 반역자.
반란군의 마법사다.
‘정신 차려 페르난도!’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는 순간.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이들이 지내고 있는 곳은 라마닉스에서도 고급 호텔의 최상층.
잠복근무를 하면서 꽤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빈축을 살 수도 있지만, 이들의 입장에선 이런 곳에서라도 생활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페르난도, 룸서비스라도 시켰냐?”
“아뇨, 그런데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온 존재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체구로 보아 여성인 듯했다.
화르륵!
불덩어리가 그대로 침입자에게 쏘아졌지만 불은 침입자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클로이와 페르난도는 당황했지만 로건 웰스만큼은 냉정하게 침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평범한 놈은 아니다.”
“페르난도, 저거 아마.”
“예, 맞는 것 같습니다.”
태풍을 일으켰던 맞은편 옥상에서 나타났던 기이한 마법사.
자신들의 마나가 잔뜩 들어간 태풍을 순식간에 잠재워 버린 수수께끼의 존재.
클로이와 페르난도도 마나를 끌어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정체를 밝혀라, 마법사.”
로건 웰스는 오랜만의 전투로 흥분 상태였지만, 그래도 마도사로서의 체면을 지키며 적에게 물었다.
그러자 침입자의 입에서 큭큭 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위라 생각한 마도사들은 우선 저 입을 다물게 만들겠다 생각했으나.
손끝에 모았던 마나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앞의 침입자에게로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말도 안 돼!”
당황한 클로이가 뭐라도 해 보려 마나를 끌어올리지만, 당연하다는 듯 마나가 사라진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냉정한 판단을 한 건 페르난도였다.
“도망쳐야 합니다! 녀석은 저희 마법사들에겐 최악의 상성이에요.”
솔직히 겁을 먹었다.
이런 존재는 처음이었기에 아무리 뛰어난 마도사들이라도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 손쉽게 패배할 뻔했다.
하지만 겁쟁이인 줄로만 알았던 페르난도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몇 번이나 만나며 무력감에 익숙해지고, 위기를 헤쳐 왔던 페르난도이기에 가능한 선택.
아예 옆에 있던 전등을 들고 항전을 준비하는 페르난도였지만, 침입자는 그들에게 빨아들인 마나에 눈이 팔려 있었다.
그러곤 한마디.
“최악이야.”
마도사들을 발끈하게 만드는 도발이었지만, 페르난도는 그에 맞춰 전등을 앞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사형들! 도망치세요!”
한 템포 늦게 두 마도사가 문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둘에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전등을 피하는 침입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여유롭게 페르난도의 허접한 공격을 피했는데, 그러다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며 긴 머리칼과 얼굴이 드러났다.
“너, 는……?”
페르난도는 이 사람을 본 적 있었다.
정확히는 너무나 빼닮은 아이를 봤었고 인사도 했었다.
그 아이가 나이를 먹고 자란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은.
후드가 벗겨진 여인은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찬란한 금발을 숨길 생각도 없이 한 번 쓸어 넘기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역시, 같은 마도사라도 내 제자만큼은 아니야.”
“제자?”
“신경 쓰지 마. 질은 떨어지지만, 잘 받아갈게.”
그 순간, 호텔의 꼭대기 층에선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