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후릅 하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자니 창문 밖에서 엘리나가 비를 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오늘 따라간 정령이 운디네와 플레임이라서 비가 와도 썩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마중을 안 나갔는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옆에 여학생이 하나 같이 있었다.
‘음?’
내 강의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은 푸른 머리의 소녀.
문이 열리고 시선을 돌리니 흠뻑 젖은 엘리나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여학생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니?”
아마 이 아이 때문에 정령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그냥 비를 맞고 온 것 같다.
“스, 스승님. 제 친구인데 오는 길에 비가 와서 잠깐 비 좀 피하고 가도 괜찮을까요?”
“리, 리스테린 레토리입니다.”
친구?
-응, 친구야!
-그것도 최근 꽤나 친하게 지내고 있어.
운디네와 플레임의 보고에 나는 책을 덮고 일어나 슬며시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씻고 오렴. 코코아가 좋을까 커피가 좋을까?”
“저는 코코아요!”
“저, 저도요.”
요번에 강의 숫자가 늘면서 보너스가 추가로 들어와서 사 놓은 고급 코코아 가루가 있었기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반을 뒤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럴만하겠지.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던 라푼젤과 테토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이제 일주일이 되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정말 많은 게 바뀌어 있었는데, 주 1회 강의하던 나는 이제 주 3회로 학교에 불려 가고 있었고.
엘리나를 향한 괴롭힘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독하리만치 열렬한 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오히려 동급생인 학생들과의 사이가 멀어져 버렸다고 들었다.
“소중한 친구를 잃게 할 수는 없지.”
외모나 말투를 봐서는 동갑인 것처럼 보이니까.
코코아는 물론이고 간단한 토스트까지 준비한다. 햄과 치즈, 잘게 자른 양배추를 넣은 심플하지만 맛있는.
다 완성되어 차려 놓자 때맞춰 나오는 엘리나와 리스테린.
엘리나는 혁명군에서 생활을 하면서부터 동갑내기들과 함께 씻는 게 익숙했지만, 리스테린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붉어져 있었다.
“코코아랑 토스트 준비해 뒀다, 와서 먹으렴.”
“와아!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머리도 말리다 말고 우다다 달려온 엘리나와 정반대로, 리스테린은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다가왔다.
“에휴, 머리는 제대로 말려야지.”
-이 아이도 머릿결이 참 곱구나.
-괜히 저번처럼 세게 당기지 마.
라푼젤과 플레임의 합작품으로 따듯한 바람이 두 사람의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말려 준다.
엘리나는 익숙하게 여겼지만 리스테린은 처음엔 놀라다가도, 내 마법으로 착각하고 몸을 맡겼다.
“자, 맛있을 거야.”
머그 컵을 건네자 리스테린은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며 홀짝 한 번 마시더니, 입가에 풀어진 미소가 슬며시 지어졌다.
역시 맛있는 건 사람의 마음을 풀어 주는 효과가 있다니까.
“천천히 놀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가렴.”
“그, 그럴 수는…….”
“괜찮아, 편히 있으렴.”
아무래도 교수인 내가 있어서 어색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책을 읽고 있자니, 두 여자아이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집안을 채워 갔다.
-좋네.
-착한 아이구나.
운디네와 라푼젤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책을 넘겼다.
썩 나쁘지 않은 하루구나 싶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이제 가야 하는데.”
리스테린이 슬쩍 밖을 보니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져서 근처 노점들은 일찍 장사를 접는 분위기.
“집이 어디니?”
“기,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
그럼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런 폭우면 전차는 운행을 중지한다.
“흐음, 그럼 오늘은 자고 가렴. 기숙사 페널티 점수는 내가 학장님에게 말씀드릴게.”
“와아! 그게 좋겠다!”
“저, 정말요?”
믿지 못하겠다며 눈을 빛내는 리스테린에게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과하게 친절하게 대해 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엘리나의 첫 동갑내기 친구를 잃을 순 없지.
“내 방에서 같이 자자!”
“그래, 좋아!”
해맑은 미소를 보니 내가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둘이 잠깐 놀고 있으렴. 저녁 찬거리를 좀 사러 다녀올게.”
“예? 이 비를 뚫고요?”
“걱정 마렴.”
어차피 운디네랑 라푼젤이 있으니까 태풍이든 뭐든 상관없다. 첫 손님이니까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그럼 다녀올게.”
“넵! 맛있는 거 사 오세요!”
“다, 다녀오세요.”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선다.
다른 사람들은 우산이 찢어지거나 날아가서 난리였지만, 나만은 평온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메뉴는 뭐로 할 거야?
-아무래도 디저트는 필수이지 않겠니?”
“그러게 요즘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좋아하는 게 뭐일까.”
태풍을 막아 주는 정령들과 대화를 하며 걷는다. 방향은 시장과는 반대.
밖에 물건을 펼쳐 놓는 시장은 이미 다들 철수했을 테니 조금 비싸도 브랜드 식료품점에 가서 살 생각이었다.
물론.
“이 태풍을 일으킨 녀석부터 족치고.”
* * *
라엘 텔리즈먼이 나간 후.
방금까지 눈치만 보던 리스테린의 표정도 조금, 아니 꽤나 편안해진 상태였다.
오히려 흥분해서는 말이 많아졌다.
“생각도 못 했어. 설마 라만 교수님이랑 같이 살고 있었다니.”
“그런가? 다른 교수님들 집에 들어가 사는 학생들도 꽤 있지 않아?”
“고학년들이 조교나 제자로 들어가면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너는 아직 4학년이잖아.”
4학년이라는 말에 리스테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함께 입학했지만, 앞의 소녀는 벌써 3학년이나 껑충 뛰어서 4학년을 다니고 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엘리나가 천재 중의 천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부러운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나도…….’
아버지가 라디오 타워에 입사하시면서 학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원체 가난하던 집안이다.
예전 다니시던 신문사도 저널리스트로서의 사명감이 원동력이었을 뿐 돈을 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저버렸다.
자신의 학비를 위해서 기자로서의 긍지와 책임감을 버리고 제국이 원하는, 그들의 입맛에만 맞는 기삿거리를 기계처럼 내뱉어 댄다.
그래서 얼른 졸업을 하고 싶었다.
졸업해서, 자신의 학비를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아버지는 다시 한번 자신의 긍지를, 신념을 위해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헤헤, 무슨 음식을 해 주실까? 우리 스승님이 저렇게 보여도 음식 솜씨가 훌륭하셔.”
“라만 교수님이 요리를 하신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가지만.”
“그래?”
아무래도 엘리나와 세인트 학교 학생들 사이에 라만 교수에 대한 이미지 차이가 상당히 큰 것 같았다.
사실 방금 전의 인자한 모습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리스테린조차 믿지 않았을 거다.
“고학년 선배님들이 무서운 교수님 뽑은 순위에서 탑 3위에 드셨어.”
“엑? 그런 순위도 있었어?”
“너는 쉬는 시간에도 도서관에 가거나 공부만 해서 몰랐겠지만, 요번에 여러 가지 설문조사가 있었어. 뭐였지? 통계 동아리 선배님들이었나?”
쉬는 시간에 잠깐 와서 여러 가지 설문을 했고, 그걸 발표한 게 어제다.
“확실히 강의하실 때는 무섭긴 하지만 집에선 전혀 안 그래. 오히려 조금 맹하신 부분이 있어.”
히히 하고 웃는 엘리나의 표정은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이 기쁜 소녀의 얼굴.
“그렇구나.”
조금 다른 점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리스테린은 과연 오늘 저녁에 먹게 될 교수님의 요리는 무엇일까 기대가 조금 되기 시작했다.
* * *
덜컹하고 옥상 문이 열리자 남녀는 당황하며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남자는 놀라면서도 이제 다 해결됐다는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어째서 내가 여기 있는지 의문이 담긴 눈초리.
홀딱 젖어서 지팡이를 쥔 손을 뻗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지금 뭐하십니까?”
페르난도의 뒤통수를 당장이라도 후리면서 화를 버럭 내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두 번째 마도사 클로이 노브 탓에 애를 쓰며 존댓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로건 사형보다 빨리……?”
“도와줘!”
클로이 노브는 내가 첫 번째 마도사보다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페르난도한테 걸어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뒤통수를 후렸지만.
“끄악!”
“무, 무슨!”
“사고를 쳐도 아주 제대로 치는구나.”
울상을 한 표정의 페르난도와 깜짝 놀란 클로이.
후 하고 짜증을 내면서 슬며시 하늘을 바라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면…….”
“아니까 설명할 필요 없어.”
단언에 입을 꾹 다무는 페르난도.
“딱 봐도 내가 알려 준 기후 조작 마법을 한 번 사용해 보려고 했던 거겠지.”
“십 분……. 딱 십 분만 옥상 위에 비를 내려 보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첫 강의에서 기후 조작에 대한 마법을 다뤘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보니 직접 실현할 수 있는 학생은 없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학생들 사이에 마도사가 끼어 있었다.
그때 수식을 적는 걸 봤을 때는 맥락 자체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것뿐.
다른 부분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던 거로 봤는데, 아무래도 제2 마도사인 클로이 노브의 도움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거기에 더불어 둘 다 슬슬 마나 탈수 증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아, 진짜 짜증 나.”
“네가 어떻게 좀 해 줘.”
“기다려 봐.”
두 사람의 기대에 어린 시선에는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맡겨 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아이야.
운디네는 나름 페르난도를 좋아했는데 라푼젤은 또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 건가?
어쨌든 두 정령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기세는 줄었지만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이거 너무 거친데? 지금 우리 힘으로는…….
-제약을 풀면 3초 안에 없앨 수는 있단다.
“…….”
잠시 고민이 되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으니 라푼젤에게 제약을 한번 풀어 보라고 말하려던 찰나.
반대편 옥상.
검은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작은 체구.
뻗어진 하얀 손에선 가공할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태풍을 일으키던 마나는 완전히 그 존재에게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멀쩡해진 하늘.
당황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닌 다른 두 마도사 역시 마찬가지였고, 우리의 시선이 쏠리자.
녀석은 내게 살짝 시선만 맞추고 미소와 함께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