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큼큼.”
거울 속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를 올렸고 안경을 써서 외모를 얼추 바꿔 본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자세히 본다면 알아챌 수는 있겠지만, 인상 자체는 아예 다른 사람.
"콧수염 같은 거라도 붙여 볼까?”
-진심은 아니지?
-정말 센스…….
“…….”
한 손에 집어 들었던 변장용 콧수염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동굴에서 살다가 여기 오니까 숨이 좀 트이네.
“괜히 잘못 움직였다가 불 내지 마라.”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아무래도 여관이 오두막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물론, 녀석이 불 그 자체이다 보니 번지거나 할 걱정은 없지만 가구가 타들어 간 걸 고칠 순 없으니까.
“스승님! 이거 어때요?”
자기 방에서 교복을 입고 나온 엘리나는 환하고 웃으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쁘네, 예전에 우리는 교복이랍시고 누더기 같은 로브나 입고 다녔는데.”
“……지금 입고 계신 그거예요?”
“이거 황녀님한테 받은 거다.”
“옷은 200년의 세월을 그대로 맞았네요…….”
안쓰럽게 바라보는 엘리나의 표정에 슬쩍 내 모습을 확인한다. 처음 받았을 때는 꽤나 멋들어진 로브였는데 지금은 너무 바랬다.
황녀한테 받았다고 소중히 여긴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계속 입다 보니 편해져서 다른 로브는 잘 안 걸치는 거였는데.
‘옷을 바꾸긴 해야겠네.’
엘리나의 새 교복과 비교하니 썩 볼품없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교복이 소포로 왔을 때 같이 왔던 옷이 있어요.”
“음?”
“제 건 줄 알았는데 사이즈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들어 있는 건 얇은 하얀색 코트와 더불어 깔끔하게 차려입을 수 있는 옷가지들.
따로 편지가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안 입으면 돌려보낼 거라는 이걸 보낸 사람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크흠, 어쩔 수 없네.”
로브를 벗어 던지고 나도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와아.”
-엄청 똑똑해 보여.
-마음에 드는구나.
-흠, 로브 걸친 것보다는 낫군.
-나쁘진 않네.
“여기에 안경까지 쓰면.”
짜잔, 완벽한 교수의 탄생.
검은 머리에 더불어 하얀 코트. 나름대로 교수다운 면모가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가요!”
학교에 간다는 게 신이 나는지 엘리나는 호들갑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고 나도 뒤를 따랐다.
이곳은 제도에서 꽤나 떨어진 도시, 라마닉스.
제도를 중심으로 발전을 이루는 제국의 특성과는 반대로, 제국 북쪽 끝에 있음에도 라마닉스의 발전 수준은 제도에 버금갔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바로 근처, 합루스크 공화국과 교역이 활발하기 때문이란 게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은 바로 이곳에 위치한 ‘세인트 학교’ 때문.
예전 태양왕국 라스와 교류 목적으로 세워진 이 학교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의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라스는 전쟁으로 지도에서 사라졌고 그 탓에 세인트 학원은 이제 완전히 아르니티 제국의 손아귀에 넘어왔지만, 그럼에도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인제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나도 여기 졸업생이고.”
예전에 술자리에서 들었을 때, 텐과 톨레스도 이곳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참고로 둘은 219기이고 나는 54기다.
“와아, 학생들이 엄청 많네요.”
“입학식이니까.”
그런데 조금 독특한 점이 눈에 띄었다.
신입생은 신입생인데 여성은 리본 색이, 남성은 넥타이 색이 다르다는 것.
누구는 하얀색이고 누구는 빨간색이다.
“흐음.”
주변을 살펴보고 엘리나를 한 번 본다.
아마, 하얀색인 아이들은 평민이고 빨간색은 귀족인 듯싶었다.
그 외에도 초록색이나 검은색도 보였는데 아무래도 타국에서 온 학생들이겠지.
‘차별을 아주 적극 권장하고 있군.’
세인트 학교의 학장은 이런 걸 허락할 위인이 아닌데 어떻게 됐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학생들은 저쪽인 것 같다.”
넓디넓은 운동장에 깔린 잔디를 밟고 서 있는 아이들 무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해 준 말 기억하지?”
괜히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묻자 엘리나는 주먹을 꼬옥 쥐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책상을 발로 차고, 이 쉐끼들아! 이 반 짱이 누구냐! 라고 외치는 거요?”
“뭐?”
방금 내가 들은 게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 건가 싶어 입이 떡 벌어졌으나, 범인이 누군지 예상은 된다.
“정령들 다 집합.”
스르륵 내 앞에 나타난 정령들.
“엘리나한테 교실 들어가자마자 싸움 걸라고 한 정령 거수.”
내가 팔짱을 끼고 묻자 서로 눈치를 보던 정령들. 결국 운디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쉐끼들아는 플레임이 말한 거야!
-나, 나는 그냥……. 싸움을 건다고 해서 좀 임팩트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애 입학하자마자 퇴학시킬 일 있냐?”
꾹 입을 다무는 정령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엘리나에게 다시 말해 준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 친구도 많이 만들고, 연애도 해 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 알겠어요!”
번쩍 손을 들고는 그대로 달려간다.
나도 교수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딱 보기에도 엘리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교수들. 그들은 주도면밀하게 이번 학기 신입생들을 보면서도 단정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느낌이었지.’
당시 교수님들도 딱 이랬다.
철두철미하고, 냉철하며, 영민하다.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들이 처음으로 혼비백산한 걸 봤던 건 내 스승님이 심심하다고 나를 보러 왔을 때.
당시엔 최연소 대마도사로서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다들 떨면서도 사인을 받거나 강의를 듣고 싶어 했다.
새로운 교수인 나를 보는 눈빛은 좀 더 매서웠다. 나야 보조 교수인지라 크게 관심은 없겠지만, 같은 교수로서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은 용서치 않겠다는 눈초리.
‘살벌하긴.’
교수진을 지나치니 혼자서 앉아 있는 학장님이 보였다.
흰 머리에 하얀 수염.
딱 봐도 나이가 지긋이 든 양반이 인자한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내가 눈에 들어왔는지 헛기침을 하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오랜만입니다, 학장님.”
“설마……. 학교 제일의 문제아가 돌아올 줄이야.”
“에이, 설마 200년 동안 저만한 문제아가 하나 없었겠습니까.”
“그대처럼 학생 본인과 보호자, 둘 다 문제인 경우는 없었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네.
“잘 지냈는가?”
정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분은 참 답지 않게 이럴 때가 있었고, 변하지 않으셨다는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름.”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학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신입 교수에게 쏟아지는 눈초리가 꽤나 매서웠다.
결국 학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전음으로 대화를 시도해 왔다.
‘그래,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머리에 울리는 학장의 목소리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답했다.
“저는 전음 못 씁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아침 조회 때 매일 내 머리에 전음을 날려 놓고.”
“……그랬던 적도 있군요, 추억이네요.”
“그걸 지금 추억이라고 말한 건가? 덕분에 당시 신분이던 체플린 델리노스 학장은 조례에서 혼자 웃어 댄 학장으로 남았네.”
“학장님이 낡은 개그를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그때 갑자기 조례 중에 혼자서 웃음이 터져서 교수진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큼큼.”
학장님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음을 못 쓴다는 얘기는 뭔가?”
내 입으로 말하기엔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음?”
“이에 관해선 학장님께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합니다.”
세인트 학원에 온 이유는 단순히 제자인 엘리나의 성장만을 위함이 아니었다.
학장님이 혹시 내 상태에 대한 치료 방법을 알고 있을까 해서 찾아온 것.
“마법을 쓰지 못해?”
“예, 그렇게 됐네요.”
“그럼 그대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데?”
“이론만 가르치면 되죠.”
애초에 보조 교수로 채용해 놓고.
학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려 했으나, 입학식을 위해 학장님을 부르는 다른 교수 탓에 단상으로 가셨다.
잠시 멍하니 기다리며 학장님의 지루한 인사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고 요번 학기부터 우리 학교에 새로운 보조 교수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이름은 라만 아인. 다들 박수로 맞이해 주시지요.”
짝짝짝.
‘능구렁이 같은 영감.’
물론, 학장님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 표현을 아주 안 좋아할 걸 알기에 입에 담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귀찮은 일 벌이는 건 참 좋아한다.
단상 앞에 서자 꽤나 많은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소 입학 나이가 10살이라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작고 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중에서도 엘리나는 자기 스승이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모습에 설레는지 가뜩이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더욱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라만 아인입니다. 여러분에겐 마도의 이론적인 측면을 많이 가르치게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여기서 임팩트를 강하게 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엘리나가 성장해서 조기졸업하면 나도 금방 때려치울 생각이었으니까.
‘조기졸업도 필요 없지. 그냥 내 수준에 맞다고 싶으면 나와야지.’
불순한 의도지만 무슨 상관인가.
여기서 이렇게 애들이나 가르치면서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입에서는 번지르르한 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나름 단상에 서는 재능도 있는 듯했다.
“그럼, 여기서 말을…….”
이런 자리에서는 말을 빨리 끊는 게 모두에게 좋았기에 천천히 말을 줄이려 했으나.
“…….”
한 남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입이 멈췄다.
하지만 풍경처럼 펼쳐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가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밑으로 내려왔다.
“흠, 꽤 잘하는군.”
시험해 봤던 건지 학장님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죄송한데 저 여기서 일 못 할 것 같습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 정체를 아는 사람을 봤습니다.”
벌써부터 그 사람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몸을 틀어 도망치려 했으나 학장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 보니 200년이나 지나서 그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직 듣지를 못했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놔주세요.”
“소개를 끝내고 내려온 지 10초도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교수를 어떻게 보내 주나.”
“아니, 그러니까…….”
“당신!”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다행인 건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위로 쏠려 있어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나 사형당하면 학장님 때문입니다.”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곤 괜히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야,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고 할 사이는 아닐 텐데!”
특별하다기보다는 어디에나 널린 평범한 분위기와 외모를 가진 남자.
하지만 그가 두르고 있는 건, 대마도사의 제자인 마도사들만이 두른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고급스러운 노란색 로브.
다섯 번째 마도사, 페르난도 레빌로스가 나를 노려보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