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전투는 끝났고 우리는 승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잃은 게 너무도 많았고, 그럼에도 승리를 축하해야 했으며 앞으로 나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눈을 감고 쉬러 간 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으니까.
문득, 이 싸움은 이제 내 마음대로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단장들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
아마, 내 앞에 있는 레온도 같은 기분을 느껴 왔을 테고 지금도 느끼고 있겠지.
“묵념.”
많은 것이 담긴 레온의 한마디에 우리 모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고.
앞에 놓인 묘비들을 바라본다.
수많은 묘비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건 ‘텐’, ‘톨레스 트레이먼’ 그리고 ‘마리아’.
한참을 곁에서 울었던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거라고 중얼거렸던 게 고작 10분 전임에도 내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그저, 아이의 금발을 쓰다듬어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와 레온 그리고 에레오나는 소니아를 배웅해 주기 위해 마을 밖을 나섰다.
소니아와 톤파 영감 덕분에 마을의 사람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중간에 아예 도망쳐 버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겠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니?”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레온이나 에레오나가 리더라고는 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나 레온은, 텐이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썩 힘들어 보였다.
“계속 싸워야지.”
그래서 내가 대신 답했고 소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번 일은 꽤나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뗀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아.”
“…….”
갑작스러운 소니아의 말에 레온은 천천히 소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청색 눈동자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던 동료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톤파 영감이나 소니아에게도 마르코스의 배신은 충격적이다 못해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만약 언젠가 모든 혁명군이 다시 규합한다면, 그 중심에 서는 건 그들의 리더였던 찬탈자 로마르코의 동생인 마르코스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여자에 눈이 멀어 모든 걸 등졌다.
그것도 같은 혁명군을 제물로 삼아 죽음의 신을 부르려던 계획을 세웠고, 이전에는 혁명군 리더들에게 암살단까지 보냈다.
“가능하다면, 다시 함께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싶어.”
서쪽의 철거북도 크라켄과 마수 떼의 습격 탓에 본거지를 잃고 이쪽으로 합류했다. 지금이 갈라졌던 혁명군이 다시 하나가 되기에 최적의 타이밍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니아의 용기 있는 한마디에 레온은 애써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내가 준 통신구 잘 가지고 있어. 도착하고 정리한 뒤에 통신을 걸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걸 끝으로 소니아는 떠나갔다.
앞으로 혁명군은 하나가 되어 움직이겠지. 동쪽의 자유 혁명군은 레온이 지배하게 되었고, 철거북은 이미 함께한다.
청색횃불이 더해진다면 다시 한번 하나의 깃발 안에서 모두가 자유만을 위해 외치고 싸우는 시절이 돌아온다.
언제나 바랐던 것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무거워.”
레온의 한마디에 나와 에레오나는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희생된 목숨이 너무 무겁다.
우리는 같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으나 서로의 것을 들어 줄 수는 없었다.
* * *
“뭐하니?”
“애들 먹이 줘요.”
숙소 앞, 흑주신의 새끼들에게 밥을 주고 있는 미오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로 뭘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냥, 말을 걸고 싶었고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평소와 그렇게 다를 거 없는 목소리.
하지만 소녀의 등은 너무나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새끼들을 쓰다듬어 주자니 녀석들이 좋아라 하며 얼굴을 비벼 댄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챙겨 주진 못했는데 얘들은 나를 꽤나 좋아해 준다.
“위로해 주러 오셨어요?”
“…….”
티가 났나.
요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니까.
“어.”
거짓말을 해 봤자 어색해질 게 보여서 그냥 그렇다고 답해 준다. 미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여전히 내겐 눈을 맞추지 않고 새끼들을 쓰다듬는다.
“사실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음?”
뜻밖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려서 미오를 바라본다. 옆에서 바라본 옷 틈새로 화상을 입은 그녀의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엄마도, 아빠도, 저를 버리고 먼저 가 버렸어요. 할아버지는 저주받은 아이라며 저를 태워 죽이려 했죠.”
“…….”
작은 아이의 입에 담기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도망치고 도망쳐서 스승님을 만났어요.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런 게 진짜 가족이구나 생각했죠.”
크리스티나 엘리나에게 마리아가 있었다면 미오에겐 톨레스 트레이먼이 있었다.
“검을 배운 이유는, 스승님이랑 닮고 싶어서였어요. 태어나서 처음이었죠. 누군가와 똑같아지고 싶다는 건.”
“그래, 무슨 느낌인지 알아.”
“……정말요?”
슬쩍 나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에 나는 살짝 웃어 준다.
“동경이지. 그 사람을 따라잡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결국엔 옆에 서고 싶어져.”
“맞는 것 같아요.”
푹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미오.
“스승님이 레펠리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도, 로마르코 대장이 죽고 무너져가는 혁명군에서 저를 도망치게 하시다가 체포되신 거였어요.”
살짝, 목소리가 떨린다.
숨겨 보려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은 아무리 숨기고, 감추고 싶어도 드러나게 되어 버린다.
“그때 저에게 스승님은 이미 죽은 거였어요.”
“…….”
“그런데 몇 년이나 지나서 이제 조금은 괜찮아졌을 무렵, 라엘 님이 오셔서 레펠리아 수용소를 무너뜨렸죠.”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당시의 그녀는 나를 혁명군에 데려온 책임을 지기 위해서 따라왔다고 말했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스승님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내 뒤를 따른 것이었다.
“선물이었죠. 기적 같았어요. 오랜만에 본 스승님은 늙고 많이 다치셨지만, 여전히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톨레스 트레이먼의 마지막 의지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라는 걸 나도, 미오도 알고 있었다.
“많은 걸 다시 배웠어요. 스승님은 수용소에서도 언젠가 저를 만날 날을 고대하며 비전서를 적어 주셨고,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
“그러니까 이제 떠나셔도, 저는 울지 않아요. 언젠가 제자는 스승을 떠나야 하는 거잖아요. 반대로 스승님이 제자를 떠나셨지만 저는 이제 충분히 성장했어요.”
“네가 나보다 났구나.”
소녀가 푹 고개를 숙인다.
“나는 톨레스 트레이먼의 제자예요. 검객의 후계자에요. 난, 나는……. 슬프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요.”
흐릿해진 목소리로 소녀는 말했다.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걸 부정하며, 세상에게 보지 말라는 듯 숨으며.
그렇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로브를 들어 천천히 작은 소녀를 감싸 주는 것뿐이었다.
울지 않는 소녀의 눈물을 누구도 보지 못하게.
* * *
언덕을 오르며 잠시 여러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복잡하고 잡스러운 생각이 계속 맴돌았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한다고 정답이 나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언덕이 높아서 호흡이 가빠졌지만 어쨌든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천히 저무는 노을빛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황금색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추억에 잠긴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요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는 걸 다시금 느끼며 나는 엘리나의 옆에 서서 잠시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낀다.
“빨리 말해 주실래요? 위로를 하러 왔으면 울고, 잊으라고 말하면 때릴 거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이틀은 걸려요.”
“…….”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싶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자 소녀의 눈가는 벌겋게 부어 있었다.
“노, 노을빛 때문이에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황급히 눈가를 가리는 엘리나는 내 대답이 짜증 났는지 퍽 하고 주먹으로 허벅지 근처를 때렸다.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지금 소녀의 감정이 느껴지는 한 방이었다.
‘꽤나 아프네.’
소녀의 목에는 이제 목걸이가 아닌 반지가 걸려 있었다. 마리아가 끼고 있던 은반지.
그녀에게 남은 유품이었다.
“제가 다시 되살아나고, 잠깐이었지만 엄마랑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듄에게 당했음에도 평범한 사람인 마리아가 거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정신력과 딸을 향한 사랑 덕분이겠지.
“아프면서, 눈도 잘 보이지 않으면서 제 뺨을 계속 어루만지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그래, 훌륭한 어머니셨네.”
“그렇죠? 엄마 복은 참 좋은 것 같아요.”
헤헤 하고 웃는 엘리나는 코를 훌쩍인다.
다시 떠올랐는지 입을 꾹 다물고 팔에 얼굴을 반쯤 파묻는다.
“나는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내 발언에 깜짝 놀란 엘리나는 눈물이 쏙 들어갔는지 고개를 번뜩 올린다.
“평상시의 두통은 사라졌지만 마나를 쓰려고만 하면 두통이 심하게 찾아오더라고.”
왜인지 증상이 명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이런 몸이 되어 버렸다.
그걸, 정말 미안하지만 소녀에게 가장 먼저 고백하고 싶었다.
“약을 먹으면 가능은 하겠지만, 아주 강한 약이 있어야 해. 테리스 선생은 주지 않더라고.”
그 약을 먹고 어떤 부작용을 겪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테리스 선생은 극구 거절했다.
“그러니까 마법사 라엘 텔리즈먼으로서의 이야기는 끝이라는 소리지.”
생각해 보면 이미 진즉에 끝나 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몸으로 우레아의 힘을 받아들여 한순간이나마 세상의 마나를 지배하고, 질투와 폭식의 신을 쓰러트렸다.
거기서 이미 내 마법사로서의 수명은 끝난 거라고 볼 수 있었지만 어떠한 힘이, 어찌 보면 작은 기적이.
마지막으로 이들을 지키라고 여기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나는 완전 백수란 말이지. 마법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게 썩 없거든.”
그나마 스승님 뒷바라지하면서 요리는 조금 늘었지만, 그것도 식당 아주머니들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값진 걸 해 보려 해.”
천천히 앞으로 몸을 숙이고 발을 뒤로 빼며 손을 내민다.
연회장의 중심에서 아름다운 영애에게 춤을 권유하듯 가능한 예의를 차리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만약 너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가장 소중한 걸 잃었지만 아직 다른 많은 걸 지키고 싶다면…….”
설마,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크리스티나 엘리나. 나, 라엘 텔리즈먼의 제자가 되어 다오.”
“……!”
천천히 일어난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반사된 석양빛뿐이었다.
그렇게 찰나였지만 내게는 너무도 긴 시간의 끝에서.
소녀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