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도대체 어떻게 두 분이 오실 거라고 알고 있었던 거지?”
“으음, 힌트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반쯤 죽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입을 놀리고 있는 마르코스. 그렇게까지 궁금하면 까짓거 풀어 줘야지.
마지막 가는 길인데 궁금한 게 있으면 안 되지.
“일단 시작은 제도의 대침공이야. 녀석들에게 지금 당장 가장 큰 위협은 나인데, 어째서 그때 벤트 몰란과 나를 협공하지 않았을까?”
퓰리, 로그니다츠 세이야스, 벤트 몰란.
다섯 명의 마교단장 중 세 명이나 내게 당했건만 아이란과 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다른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뻔했다.
천천히 마르코스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예전부터 거슬리던 게 다시 떠오르더라?”
애써 어물쩍 넘어갔던 진실.
“듄이 펠른을 습격했는데 어째서 에레오나 한 명만 죽이고 끝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마르코스. 피를 많이 흘려서 사고가 평소보다 많이 느린 듯했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 기적이다? 그런 말은 녀석들에게 통하지 않아. 듄이 직접 움직였으면 펠른을 무너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전부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어.”
듄의 심판 속에서 자비란 찾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듄은 에레오나만 죽인 후, 펠른을 무너뜨리는 선에서 그치고 돌아갔다.
“반대였던 거야. 우리는 에레오나를 죽인 것에 눈이 돌아갔지만, 실은 듄한테 에레오나 한 사람은 아무 상관 없었어. 그냥 펠른을 없애는 것만이 목적이었지.”
어째서? 같은 물음은 너무 촌스럽다.
딱 봐도 보이지 않는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하려고 그런 게 뻔하잖아.”
살며시 웃어 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동안 다른 혁명군에게 일절 관심도 가지지 않던 네가 갑자기 우리를 위해서 마차를 보내고 마을로 받아 줬어.”
듄이 펠른을 부순다.
아이란에게 명령을 받은 마르코스가 거점을 잃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상황.
“아주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지?”
200년을 살아서 그런지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러면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그냥 죽이려면 플로이드의 안뜰에서 아이란이 나를 죽일 수 있었고, 듄은 펠른에서 사자 혁명군과 자벨린 부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들에게 어떠한 목적이 있기에 혁명군을 이곳으로 모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요번 일로 조금 감이 잡혔어, 강림이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마르코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당혹스러움이 떠오른다.
벤트 몰란을 통한 체체로의 강림 같은 일을 녀석들은 노리고 있는 것.
그렇기에 일부러 마수왕 사태에서 도망치지 못한 주변 마을 사람들을 마르코스는 받아들였다.
산 제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데다가, 나까지 필요한 정도면 꽤나 멋들어진 신을 부를 건가 봐?”
감히 나를 악신을 부르는 도구로 쓰려 들어?
오만해도 너무 오만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다.
우르르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양옆에서 달려온 에레오나와 레온.
“라엘, 동쪽은 뚫렸어.”
“서쪽도 마찬가지야.”
“잘했어, 생각보다 훨씬 오래 버텼어.”
아무리 대응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마교단장들이 진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전력으로는 그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
괜히 200년을 악신만 섬기며 살아온 괴물들이 아니니까.
거대한 권능을 흩뿌리는 두 존재가 양옆에서 숨조차 편하게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게 압박해 왔다.
기가 약하거나 신체가 연약한 사람들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힘들어했고 마르코스는 클클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분명, 꿰뚫렸다. 부끄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간파당했지만 결국 그분들의 압도적인 힘은 변하지 않는다.”
마르코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낸 두 인영.
동쪽에는 어두운 피부에 불길한 문신들이 새겨진 2m 덩치의 묵직한 무인.
서쪽에는 사람을 홀리는 말과 몸짓으로 세상을 농락하는 여인.
“라엘 텔리즈먼.”
“꽤나 고생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오랜만에 보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군.”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얼굴들.
듄 역시 신체를 바꾸긴 했지만, 문신 같은 특징 자체는 예전과 전혀 바뀌지 않아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모멸감은 오랜만에 느꼈다.”
“옛날엔 꽤 자주 느끼게 해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아이란이 짜증을 내며 파멸의 창을 꺼내 들었다. 듄 역시 주먹을 쥐며 나를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
마르코스와 대화 도중에 먹어 두었던 약의 효과가 슬슬 차오르며 두통이 사라지지만, 호흡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나를 향해 달려든 마교단장들을 보며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쿵 하고 내리쳤고.
바닥에는 푸른빛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뭣?”
“마법진?”
마교단장들은 당황해서 마법진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미안하게도 그건 힘들 거다.
마법진은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마법사의 마법진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을 가르쳐 줬는데 아직도 당해 주냐.”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푸른빛의 쇠사슬이 마교단장들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크읍!”
“이게!”
끊어 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체체로를 상대한 이후 처음으로 쓰는 마법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걸 보면 기적의 편린을 맛본 것이 내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한 단계 높이는 길이 되어 준 듯했다.
“내가 마법을 못 쓴다고 듣고 왔지? 정확해. 이젠 약이 없으면 마법을 쓰지 못해.”
“그러면……!”
이 거대한 마법진은 누가 만들었냐고?
“마법사 꼬맹이가 만들었지.”
마나 탈수 증상으로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는 에딘이 요 며칠간 나를 따라다니며 마을에 마법진을 그려 넣어 주었다.
에딘의 능력으로는 꽤나 고된 일이었겠지만, 요령을 알려 주고 녀석도 노력을 해 주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간과했겠지.”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강하게 옥죄인다.
쇠사슬이 부러지더라도 금세 다른 쇠사슬이 쏟아져 나오며 다시금 옭아맨다.
“드디어 끝이 보이네. 남은 건 도망친 로그니다츠인가? 걱정 말고 편히 눈을 감아라. 금방 보내 주마.”
“어디까지 나를 욕보이는가!”
분노에 찬 듄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던 순간.
새벽달의 빛이 다시금 가려진다.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구름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는 특이한 모습이었지만 분명한 건 더없이 불길한 징조라는 것이었다.
왜냐면 체체로가 나타나던 당시의 상황과 비슷했으니까.
“저건…….”
내가 무언가 말하기 전,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를 내게 바쳐라.]
까마귀 수천 마리가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 신의 손가락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한 소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찬란한 금발이 너무나 인상적인 소녀, 크리스티나 엘리나를.
“대마도사?”
심지어는 아이란마저 그녀를 눈에 담은 순간 깜짝 놀라며 사고가 정지했을 정도.
하지만 짐승과도 같은 감각으로 지금이 역전의 발판이라는 걸 알아챈 남자는 옭아맨 쇠사슬을 그대로 부수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앞에서 누굴 향해 다가가는 거냐.
듄을 향해 다시금 수십 개의 쇠사슬이 바닥에서 날아들었으나 이번엔 그의 등 뒤에서 투구를 뒤집어쓴 투사의 형상이 떠올랐다.
파괴의 신, 가이스.
전력으로 모든 권능을 끌어올린 듄은 마치 전신 갑주를 입은 기마처럼 사슬들을 끊어 내며 앞으로 질주했다.
“젠장!”
예전 기억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과거에도 자신의 모든 마법을 맨몸으로 부숴 버리고 달려들던 저 남자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이 사력을 다해야 한다고 판단한 듄은 모든 힘을 뿜어내고 있었고,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도망칠 여력을 남겨 두지 않는 녀석은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달리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소모전으로 끌고 갔으면 이쪽의 승리였다.
듄의 저 상태를 버티기만 해도 마법진의 쇠사슬은 내 마나가 전부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 솟아올라 오니까.
결국엔, 또 악신들의 장난과도 같은 한마디가 이 상황을 망쳤다.
탈출구가 있으니 듄도 아끼고 아끼던 힘을 지금 전부 투자한 셈.
“내가…….”
하는 수 없이 근접전을 하려고 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육체도 강화할 수 있고 검술과 창술도 배웠다.
잠깐 정도는 시간을 버틸 수 있겠거니 했지만, 발걸음을 떼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큽!”
입 밖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각혈.
약의 여파임을 알고는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나서 달리고 싶었지만 애처롭게 기어가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콰앙!
내 마음을 대변하듯 듄의 앞을 가로막은 건, 에레오나.
흉흉하게 뿜어져 나오는 심검은 분명 위력적이었으나.
“하찮다.”
전력을 전개한 듄의 상대는 아니었다.
정면에서 맞부딪친 에레오나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2층 건물 벽을 부수고 처박힌다.
듄을 대응하기 위한 훈련은 그렇게 많이 했지만, 정작 듄이 전력을 냈을 때의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선 어떤 전술, 전략도 무의미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도망치는 것만이 답이라고 언질만 했을 뿐.
다른 사람들도 하나 같이 달려들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고 결국 그는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 앞에 서 있었다.
“절대로, 이 아이한테는 손 하나 대지 못해요.”
자신에게 달라붙은 엘리나를 꼬옥 껴안아 주는 마리아.
피가 섞인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와 함께한 11년의 세월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를 지키게 만들어 주었다.
“어리석구나.”
하지만 듄의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리아의 목을 낚아채고 그대로 옆으로 던져 버린다.
“엄마!”
가차 없이 땅을 구르는 마리아.
엘리나는 비극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불렀으나 듄은 비릿한 비웃음만 입가에 담았다.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절망에 빠진 모습이라니, 달콤하군.”
“엄마아아아!”
엘리나는 마리아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이미 듄에게 잡힌 상태.
전신이 병장기나 다름없는 그의 손이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갔고.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잔인하고, 잔혹하면서도, 비극적인.
소녀였던 아이는 심장이 꿰뚫린 채로 듄의 손에 박혀 있었다.
휙 하고 더러운 걸 닦아 내듯 듄이 손을 털자 이제 숨을 쉬지 않는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네가 진짜든 아니든, 기분은 나쁘지 않군.”
담담한 듄의 한마디.
그건 내 이성을 끊어 놓기엔 충분한 도발이었다.
“으아아아아!”
감정이 격해지고 의지와 살인에 대한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양손을 빠득빠득 움직이며 기어가도 거리는 한참 모자랐고.
쿠르릉!
하늘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양 칠흑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어둠의 틈새로.
사람의 목숨을 수확하는 낫을 든 죽음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