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음? 예쁜 사람이네.”
굳어 있던 내게 다가온 에레오나는 슬쩍 고개만 빼꼼 내밀어 확인한다. 잠깐 벙찐 정신이 덕분에 되돌아오며 두통이 다시 심해지는 기분.
“레온을 불러 줘.”
“음? 무슨 일 있어?”
혹시 몸이 안 좋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에레오나에게 씁쓸하게 답했다.
“이거, 200년 전의 마교단장이야.”
그러자 표정이 굳으며 에레오나는 다시 그림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서재 밖으로 나갔다.
“얘들아.”
한마디 하자 곧바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네 정령들.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자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바뀐다.
-또…… 그놈들이랑 싸우는 거야?
-어쩔 수 없단다.
-다행인 건 미리 발견했다는 건가.
-평화에 찌들 정도의 시간도 아니었지.
플레임을 제외하고는 다들 내가 다시 마교단장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썩 반기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어. 너희는 마르코스의 저택을 전부 뒤져서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해.”
알았다고 답하고 각자 움직이기 시작한 정령들. 잠시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레온과 에레오나가 함께 들어온다.
“이야기는 들었어, 마르코스의 서재에서 마교단장의 초상화가 발견됐다고?”
“이거.”
그림을 건네자 레온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내게 다시 묻는다.
“이름은?”
“아이란, 정욕과 음기의 여신 메로아루아를 섬기는 마교단장이야.”
레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에레오나에게 눈을 돌린다.
“들어 본 적 있는 신이야?”
“아니, 전혀.”
“저번 플로이드의 안뜰에서 만났던 여자가 아이란이야. 단원들 시체를 가지고 구울로 만든 것도 이 여자고.”
기억이 났는지 레온은 뿌득 하고 이빨을 갈며 주먹을 쥐었다.
“갚아 줄 게 분명하게 있는 여자였군.”
아직도 레온의 눈앞에는 죽음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 옛 동료들이 타오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라엘한테 꽂혔던 파멸의 창 주인이라고 했지?”
당시엔 자리에 없었기에 이야기로 들었던 에레오나가 기억을 더듬었고,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게 가장 위험한 무기야. 스치기만 해도 즉사지.”
다시 생각해 봐도 파멸의 창에 꿰뚫리고도 살아 있는 건 단순히 운이 좋았다는 말 정도로는 끝낼 수 없는 수준.
두 사람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물방울이 보글보글 떠오르며 운디네가 등장했다.
-흐음, 라엘.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응, 메로아루아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알겠어, 충분해.”
-충분해?
대답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운디네는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고 레온과 에레오나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털어놓으라는 시선을 보내 왔다.
“내 기준에서 생각해 봤을 때, 이상한 것들투성이야.”
“이상한 것들?”
“모순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마교단장 아이란과 마르코스가 무슨 관계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200년이 지나도 아이란이 하는 행동은 여전히 비슷했다.
고위 관료들을 매료시키고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메로아루아를 믿게 만든다.
그렇게 악신이 세상에 더 깊고 넓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번 상황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다.
마르코스를 매혹시켰다.
그런데 막상 그가 통제하는 마을은 신을 믿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설명하자 다들 미간을 모으며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지?”
“그러게.”
“그게 끝이 아니야. 요번에 체체로도 그렇고, 메로아루아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질투와 폭식의 신 체체로.
정욕과 음기의 여신 메로아루아.
두 악신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활개 치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누구도 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신은 자신의 신도가 많아야 세상에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래서 내 시대의 마교가 강제로라도 신도 수를 늘렸던 거지.”
퓰리가 섬기던 눈물과 절망의 여신 아도리아나 후회의 신 볼택스가 대표적인 예로, 그들은 정말 닥치는 대로 신자들을 모아 댔었다.
“이것도 모순되고 있어. 아무도 체체로와 메로아루아를 모르는데 그들의 힘은 그 어떤 신보다 강력하게 세상에 퍼지고 있지.”
의문이 여러 가지 남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수께끼는 늘어만 간다.
지금 떠오르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예전부터 머릿속을 간질이던 의문까지.
전부 쏟아놓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방대한 질문의 산이 솟아올랐지만, 사실 지금 당장에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거야.”
두통은 익숙해졌지만 마나를 다루려고 하는 순간, 기절할 것만 같은 통증이 벼락 떨어지듯 덮쳐 왔다.
“후우, 아직도 그렇단 말이지?”
레온은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르코스와 마교단장의 내통을 눈치챈 건 좋지만 가장 필요한 전력인 내가 고장 나 버린 상태.
“결국 휴양 계획은 쓸모가 없었네.”
“그걸 휴양이라고 계획한 거였냐?”
물론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과 함께 이들이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깨달았다. 그래도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잖아.
“방법이 없을까?”
“내가 더 알고 싶어. 마법을 못 쓴다는 게 이렇게 불편하다는 걸 오랜만에 느끼고 있어.”
양손이 사라진 기분.
상상 이상으로 불편해져서 나도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 답이 나오지 않는 의논에서 먼저 일어난 건 에레오나였다.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날게.”
“지금 훈련을 한다고?”
“어, 참을 수가 없네.”
마교단장 듄에게 경험했던 치욕스러운 패배가 다시금 떠오른 듯 인상을 구기며 강하게 검을 쥔 에레오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잠시의 정적.
레온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도 방비에 신경을 써야겠어. 너는 가능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게 회복에 전념해 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떠나는 레온을 붙잡는다.
“그러면 에딘 좀 빌려 줘.”
“에딘을?”
“응,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어.”
“너무 심하게 굴리지는 마. 이제 14살이야.”
알겠다며 서재를 나선 레온.
탕하고 문이 닫히며 나와 운디네만 남았지만, 그녀는 나를 배려하여 스르륵 사라졌다.
“후우.”
거의 눕듯이 소파에 기대며 천장을 바라본다.
또다시, 아주 바쁜 시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그날 이후, 마을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책은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이기 시작했고, 비상 상황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대피 훈련에도 들어갔다.
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고 외부와의 보안을 더욱 철저하게 확인한다.
심지어는 내부에 숨어들었을 수도 있는 마교의 잔당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부 수사까지 들어갔을 정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불만 어린 소리가 곳곳에서 새어 나왔지만, 레온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비난 정도는 감내하겠다.”
마르코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가 자리를 비우자 레온이 여우처럼 왕 노릇을 한다며 분을 토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에레오나 역시 최근 훈련 강도가 상당해졌다.
그녀를 따라서 자벨린 부대뿐만 아니라 사자 혁명군의 일원들도 훈련에 동참했기에 전체적으로 부대의 질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기다, 저기.”
“하악 하악. 잠시만요. 어지러워요.”
에딘을 데리고 이곳저곳 마을을 돌고 있었다.
때로는 마을 안을, 때로는 바깥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는데 덕분에 종종 한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라엘 님, 정말로 이게 특훈인가요?”
“당연하지.”
“뭐가 썩 늘어나는 기분은 아닌데요.”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녀석을 보며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그런 거야. 너는 네가 키 크는 걸 느끼고 컸냐? 어느새 보니까 커 있던 거지.”
“으음.”
납득한 듯 안 한 듯 묘한 반응을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가볍게 무시하며 멀리 서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이번엔 여기서 저기까지다. 자, 시작.”
“네에…….”
처음에 나랑 같이 다닌다고 했을 때는 엄청난 마법이라도 배우는 줄 알고 신나 했는데, 막상 하는 일은 별것이 아니라 실망한 모습.
그렇다고 내가 이제 막 자신의 마나를 제압하고 다루기 시작한 꼬마한테 대군 마법을 가르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는 에딘을 보고 있자니 헤니가 흑삼이와 함께 쫄랑쫄랑 걸어왔다.
“라엘 님! 선생님께서 다 만들었다고 한번 들르라고 하셨어요.”
“오, 그래? 이거 끝나면 바로 가겠다고 전해 줘.”
“그런데 뭘 부탁하신 거예요? 선생님도 저한테 꽁꽁 감추시던데.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하하, 그런 게 있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삐졌다는 티를 숨기지 못하는 헤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옆에 있던 흑삼이가 꼬리를 흔들어 대며 자기도 해 달라고 앞발을 내민다.
“그래그래, 흑삼이도.”
잔뜩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만족했다고 에딘에게 달려간 흑삼이.
“저리 가! 노는 거 아니야!”
컹! 컹!
상관없다며 해맑은 흑삼이는 계속 에딘의 뒤를 따라 함께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슬슬 에딘도 한계에 달한 듯 보여서 쉬라고 말해 주고 테리스 선생이 있는 보건소로 이동했다.
테리스 선생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 의미를 알기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몸에 정말 좋지 않은 거다.”
“그러니까 복용할 때 주의하라고요?”
“그래, 이것아.”
“고맙습니다.”
“환자한테 이런 걸 건네주고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냐? 아서라.”
꼴도 보기 싫다며 손을 휙휙 저어 그만 가 보라는 테리스 선생의 등쌀에 밀려 밖으로 나온다.
방금 받은 건 독약이다.
다만, 조금 특별하게도 사형수를 위해 준비된 것으로 복용하는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며 그대로 눈을 감게 되는 물건.
테리스 선생이 알아서 독성을 억제했겠지만, 두통이 해결되지 않는 내가 마법을 쓰기 위해선 모든 고통 자체를 중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 이제는 이런 것까지 먹어야 하네.”
점점 몸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신체 나이는 급격히 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고 멈추기엔 아직 너무 이르기에.
테리스 선생이 준 약을 품에 챙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