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뭐냐.”
“어?”
아침이 되어 눈을 뜬다. 피로감은 어느새 가셨지만 침 때문에 함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만 슬쩍 굴리고 있자니 보이는 루이나.
깜짝 놀라던 녀석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더니 호다닥 밖으로 나가 버린다.
“뭔데.”
당황해서 있자니 갑자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루이나와 에딘.
앞치마를 걸친 두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작은 탁자와 음식들이었다.
에딘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탁자를 침대 위에 놓으려 했으나.
“아야.”
“죄, 죄송합니다!”
허벅지 위에 탁상다리를 올려 그대로 눌렸다. 어쨌든 세팅이 된 탁자 위에 올라오는 음식들.
아침을 위해 갓 구운 빵부터 시작해서 버터와 잼.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자몽 주스까지.
“와, 이거 어디서 났어?”
이 귀한 걸?
“마르코스 냉장고 털었어.”
“…….”
도난품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건가.
침을 빼고 상체만 세우자 루이나가 잔을 건네며 자몽 주스를 따라 줄 준비를 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
침묵으로 어서 잔이나 대라고 압박하는 탓에 하는 수 없이 잔을 내밀었으나.
힘 조절을 실패한 건지 자몽 주스는 컵이 아닌 내 허리로 흘러넘쳐 버렸고, 차가운 자몽 주스가 온몸을 적셔 온다.
“미안해!”
급하게 행주를 찾지만 없어서인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앞치마를 벗어 닦기 시작한 루이나.
그래, 참 좋은 일 한다.
“덕분에 팬티까지 젖었어.”
“갈아 입혀 줘?”
“아니, 꺼져 줘.”
웃으며 말하자 루이나는 헤헤 하고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이번엔 에딘이 열심히 잼을 바른 빵을 받아 들어 내 입에 들이민다.
“가라니까?”
“에이, 오늘은 푹 쉬어. 우리가 다 해 줄게.”
“뭘 해 준다는 거야.”
아침부터 팬티가 젖는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
“축축해서 기분 나쁘니까 밥보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박힌 침을 빼고 일어나니 루이나와 에딘이 어색하게 웃으며 애써 자신들의 행동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침부터 이런 호사를 누리니까 얼마나 좋아!”
“맞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아침부터 자몽 주스 샤워한 걸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한숨을 내쉬며 묻자 둘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고, 루이나가 정답을 외치듯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혹시라도 자다가 지린 걸 숨길 수 있잖아!”
“제발 꺼져!”
먹으라고 준 빵을 던지며 외치자 에딘이 척 하고 받아 내며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렸고, 루이나도 갈아입으면 말해 달라 외치곤 에딘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자몽 주스를 한 입 마신다.
확실히 혀가 깨는 기분과 함께 입맛을 돋우지만, 침대가 흠뻑 젖어 있는 게 한숨이 나왔다.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세탁도 금방인데.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닦긴 했어도 찝찝함에 일단 씻어야겠어서 밖으로 나오니, 루이나와 에딘이 아닌 미오와 하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뭐해?”
“씻으러 가실 거죠? 안내해 드릴게요.”
“안내?”
“예, 이쪽으로.”
괜히 다소곳하게 말하는 두 사람에게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오늘 무슨 날인가 싶어 우선은 뒤를 따른다.
“샤워실은 이쪽인데?”
1층에 있는 샤워장을 가리키자 하트가 고개를 저었다.
“욕탕을 준비해 뒀습니다.”
“또 마르코스 욕실이구나?”
“…….”
입 다무는 거 보니까 맞네.
뭐, 한 번 써 보기도 했고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는 건 싫어하지 않았기에 밖으로 나오니.
“자, 쾌적한 운행을 위해 준비해 뒀습니다.”
“…….”
싱긋 웃는 하트가 지금 제정신인가 의문이 들었다.
앞에 있는 건 수레였다.
농사일을 하면서 자주 사용되는 평범한 수레.
중요한 건 그 앞에서 수레를 끌려고 콧김을 뿜어 대며 준비 중인 톰과 루이나. 처음엔 소인 줄 알았다.
“이걸 타라고?”
“예, 부디.”
지끈하고 머리가 아파 오며 한숨을 내쉰다.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속셈이야?”
이것들이 어울리지도 않게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얼른 타라고! 달리고 싶어 죽겠네!”
신난다며 소리 질러 대는 톰과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는 루이나. 이대로 있어 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무거운 발을 이끌고 수레에 올라탔다.
한마디로 탑승감은 최악이었다.
마르코스의 저택에 가는 잠깐 사이에도 돌부리에 몇 번을 걸려서 엉덩이는 아팠고 두통도 괜히 심해지는 기분.
어쨌든 저택 앞에 도착해 내리니 이번엔 헤니가 웃으며 서 있었다.
“모실게요!”
“……그래.”
순응해 버렸다.
그냥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의외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름 멋을 부린답시고 욕탕에 꽃잎을 뿌려 놓은 것이었다.
처음엔 나름 괜찮은 것 같았지만, 막상 탕에 들어가 보니 꽃잎들이 다 몸에 달라붙어서 떼느라 꽤나 고생했다.
“편하세요?”
밖에서 들리는 헤니의 목소리에 그렇다고 답해 준다. 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건 확실히 기분을 편하게 해 주었으니까.
“씻겨 드릴게요.”
“무, 뭐?”
당황해서 목욕물을 순간 삼켰지만 급하게 몸을 틀어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나 이미 문이 열렸고.
“…….”
그곳엔 반바지만 입고 있는 레온과 톰이 서 있었다.
나와 비슷한 표정인 두 사람에게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건넨다.
“진짜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가.”
“고맙다.”
농담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올려 마법을 사용할 뻔했을 정도의 살인 충동이 깊게 올라왔다.
그렇게 씻고 나온 이후에도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내 혈압을 높일 뿐 그닥 효과적이진 않았다.
예를 들어 에레오나와 톨레스가 마사지를 해 주겠다며 왔지만, 둘 다 힘이 너무 세서 몸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던가.
혹은 텐 씨와 포르쉔 국장님의 편안한 숙면을 위한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선 이라던가.
무슨 생각들로 행동하고 있는지는 적당히 눈치챘지만 그게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결국 저녁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있자니 문을 열고 테리스 선생이 들어온다.
늘 피곤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그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슬며시 그려져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냐?”
“진짜 심한 욕이랑 격정적인 욕. 두 개 준비했는데 어떤 거로 해드릴까요?”
“레온이랑 톰이 목욕탕에 들어왔다며? 그때 너희 표정을 내 눈으로 봐야 했는데.”
큭큭 거리며 웃어대는 테리스 선생을 짜증 난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의자에 앉으며 물어 왔다.
“어때, 두통이 좀 나았냐?”
“나았으면 제가 더 놀랐을 겁니다.”
심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들 속에서 오히려 두통이 사라진다니. 기적도 그런 기적이 따로 없겠군.
“그래도 오늘 하루 꽤나 많은 걸 느꼈을 텐데.”
“예?”
테리스 선생은 향초를 피워 주며 말을 잇는다.
“똑똑한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거 하나만 말할게.”
자리에서 일어난 테리스 선생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방을 나섰다.
“어제 새벽까지 다들 꽤나 고민했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방에 내리 앉는 적막. 괜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생각이 깊어져서인지 두통이 조금씩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우.”
그래, 알고 있다.
그 녀석들의 바보 같은 짓거리에 휩쓸릴 때는 나도 모르게 두통을 잊었다.
내가 아프다는 걸 테리스 선생에게 들었기에 어제 새벽까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나 고민하다가 휴양 차원에서 오늘 같은 하루를 보내게 해 줬겠지.
어색함이 발목을 붙잡기도 했고 미숙한 서비스이긴 했지만 나름 묘하게 마음은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 녀석들이 나를 생각하는 감정이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겠지.
테리스 선생이 노린 건 이거겠지.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두통이 나아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노력을 눈에 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이상하게 차오르는 고양감 탓인지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괜히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침대 위에서 눈만 감고 있는 때에 방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해 줬고 그곳엔 금발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엘리나의 얼굴을 보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의 마지막 손님은 아무래도 그녀인 듯했다.
“많이 아프셔서 누가 간호를 해 줘야 한다고 들어서 찾아왔어요.”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 오빠가 더 많죠.”
머리에 열이 있는지 이마에 손을 대 보는 엘리나. 진짜로 확인을 한다기보다는 일종의 버릇처럼 보였다.
“능숙한데?”
“마수들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쳤잖아요. 테리스 선생님이랑 헤니가 도와 달라고 해서 엄마랑 같이 계속 부상자분들 간호했거든요.”
“착하네.”
“그런가요?”
의아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어 주자 소녀 역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사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음?”
“오빠한테 엄청나게 소중한 사람이랑 제가 엄청나게 닮았다고.”
“……누가 말해 줬니?”
“비밀이에요.”
헙 하고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감싸는 엘리나.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부정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의 앞에선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맞아, 내 스승님이랑 많이 닮았어.”
“얼마나요?”
“아주 판박이지. 나이가 들면 더 닮겠지.”
“으음.”
다시금 미묘한 표정을 짓는 그녀. 그래, 닮긴 했지만 이건 해 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지만 너는 내 스승님이 아니야.”
“예, 그렇죠.”
“그러니까 괜히 삶에 속박당하지 말렴. 너는 너로서 살아가는 거야. 내 스승이 아닌 10살의 크리스티나 엘리나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부디, 계속 그러길 바랄게.”
닮았다는 이유로 그녀 본인도 모르게 그 삶을 쫓을 수도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200년 전의 대마도사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삶을 살 필요는 없다.
10살 소녀,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혹시 스승님이 칭찬을 많이 해 주셨나요?”
“뭐, 그렇지. 이래 보여도 유능한 제자였으니까.”
그러자 엘리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해요. 저도 엄마에게 상당히 유능한 딸이거든요.”
“크큭.”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괜히 스승과 겹쳐 보였다. 정말 닮았구나.
“이제 그만 나가 주지 않겠니?”
그렇기에 정중하게 부탁했다.
“……불편하셨나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리나에게 고개를 저어준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럼요?”
“그냥, 그냥 오빠가 너무 약해서 그런 거야.”
이룰 수 없는 꿈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건 비극이다.
당장에는 즐거울 수 있지만 결국에 그 상처를 떠안게 되는 건 나였기에.
슬슬 졸릴 이 아이와 마찬가지로 내 안의 가장 소중한 사람 역시 보내 줘야만 했다.
‘몇 번이나 각오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도 계속 스승에게 의지나 하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썩 뛰어난 제자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알겠어요. 하지만 하나만 하고 갈게요.”
“음?”
소녀는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조차 몇 번 본 적 없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내 제자 파이팅.”
“…….”
“안녕히 계세요!”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리는 엘리나.
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중 가장 가슴에 울리는 말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나가 버린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