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후우.”
얼어붙은 벤트 몰란의 거체를 보면서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마법진을 몰래 그리면서도 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진이 빠졌다.
“마나도 상당량을 써 버렸네.”
지팡이가 없었다면 그대로 마나의 역류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근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죽일 수는 있는 거니?
-흠, 힘들 것 같군.
-불꽃으로 태우면 안 되나?
정령들이 하나씩 튀어나오며 이것저것 의견을 내 보지만, 확실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이 버틸 수 없는 한 방을 맞춰야 죽일 수 있을 거야. 어설픈 공격을 하면 괜히 흡수하면서 다시 살아날걸.”
-껄끄러운 녀석이네!
“운디네랑 라푼젤이 근처에 있으면서 계속 낮은 온도를 유지해 줘. 잘못하면 녀석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어.”
-알았어!
-맡겨 주렴.
“테토는 라마크 씨를 옮겨줘. 부상이 심하실 거야.”
-받들지.
“플레임은 나랑 같이 가자. 크라켄을 죽이는 데 열파를 사용해야 하니까 네 도움이 있으면 효율이 좋아.”
-쳇, 부탁이라면 들어 주지.
정령들에게 간단히 지시를 한 후, 다시 성벽 위로 몸을 붕 띄워서 올라간다.
여전히 날뛰고 있는 크라켄.
제라니 황자와 흑황 기사단이 아직까지는 잘 틀어막고 있었지만, 녀석은 서서히 자신의 거체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와, 왔구나!”
어떻게든 혼자서라도 마법진을 발동시키려고 하고 있던 페르난도가 나를 보더니 단비라도 맞은 것처럼 감동받은 눈을 했다.
“다시 시작하자.”
“아, 알았어!”
마법진에 마나는 이미 채워 뒀기에 마나가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후우.’
대기 중의 마나를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며 체내의 마나로 변환시키고는 있었지만, 간당간당하게 마나가 부족했다.
자칫 잘못하면 마나 탈수 증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조준 똑바로 해. 나는 마나만 움직여 줄게.”
“준비됐어.”
마나의 흐름에 집중한다.
다시 움직이며 제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크라켄의 얼굴을 향해 페르난도의 손끝에서 거대한 열기의 폭풍이 직선으로 뿜어져 나갔다.
미리 보호 마법과 플레임을 세워 두지 않았다면 열기에 마법을 만든 우리까지 녹아내렸을 위력.
열파는 크라켄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혀 들어갔고, 녀석은 얼굴엔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화려하게도 날뛰던 다리들이 일제히 땅에 떨어졌다.
“하악! 하아!”
페르난도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는 성벽 바닥을 구르며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마도사의 제자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법사라는 얘기였는데, 그가 이 정도로 부담스러워 할 정도의 마법이었다는 얘기.
나 역시 두통이 왔지만 지팡이에 기대어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페르난도! 훌륭하다!”
호들갑스럽게 크라켄을 타고 성벽 위로 올라온 제라니 황자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찬란하던 금발은 흙먼지에 뒤덮여 색이 바랬고, 갑옷도 반쯤 부서졌으며 보검은 눅진한 크라켄의 피에 담갔다 뺀 듯 더러웠다.
크라켄이 빠져서 무너진 성벽을 타고 마수들이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벤트 몰란을 얼린 마법진의 범위 안이었기에 무턱대고 달려들던 마수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대도……. 감사를 표하지.”
“그래, 고생을 좀 하긴 했어.”
솔직히 지금 제라니 황자가 달려들면 패배할 확률이 매우 높았기에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아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지금만은 한 사람의 전우로 인정을 해 주는 걸까.
“그런데 저 마수는?”
페르난도를 돌보며 성벽 밖에 있는 눈에 띄는 코끼리를 가리키는 황자.
나는 별생각 없이 답해줬다.
“이 모든 일의 근원.”
“마수들이 제국을 침공하게 만든 존재라는 말인가?”
찰떡같이 알아들은 제라니 황자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더없이 흉악하게 변하며 보검을 다시 쥐어 들었다.
“죽은 건가?”
“아직. 방금 전 크라켄을 죽인 마법보다 강한 마법을 사용해야 죽일 수 있을 거야.”
“그렇게나…….”
“일단 얼려 뒀으니까 시간이 좀 있어. 나도 마나가 부족하니 잠깐 쉬면서 생각 좀 해 볼게.”
털썩 성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숨을 고른다.
새빨간 노을이 하루의 끝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놓였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 대군 마법을 몇 번을 쓴 거야.’
지하에서 크라켄을 죽이기 위해 한 번, 열파를 두 번을 썼고 벤트 몰란과 마수왕을 얼리기 위해 또 한 번.
총합 네 번을 사용한 것이었다.
페르난도가 대군 마법 한 번을 쓰고도 저렇게 나자빠져 정신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는 생각이 들지만.
‘마나를 과하게 쓴 건 맞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마나 탈수 증상이 와서 한동안 못 움직일 뻔했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회복을 해야 한다.’
제도에는 다른 마교단장들 역시 숨어 있었다. 그들이 같이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는 하지만, 같은 단장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알면 또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에는 여기서 남은 마교단장 전부를 상대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최대한 마나를 다시 갈무리하며 끌어모으고 있던 때에.
“마법사…….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살짝 떨리는 황자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성벽 밖을 확인했고,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엘! 이거 위험해!
-상황이 썩 안 좋아.
벤트 몰란을 지키고 있던 운디네와 라푼젤의 다급한 말투.
거대한 코끼리의 위에 흑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적빛을 띄우며 눈부시던 하늘은 기이하게도 빠르게 움직이는 먹구름에 의해서 완전히 뒤덮였고.
벤트 몰란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와 위압을 가진 코끼리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이 하늘에 떠올랐다.
“체체로.”
자신의 가장 오래된 신자를 지키겠다는 악신의 의지.
아까도 정령들과 한 번 얘기했었다.
과거 신들은 미증유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의 신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부리거나, 자신의 성물을 하사한다.
그걸 인간들은 기적이라고 부르고.
제국이 이 정도의 위기라면 신이 기적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일면에서는 아직까지 기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반대로 돼 버렸네.”
허탈한 중얼거림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절망감을 애써 억누른다.
기적이 내려진 곳은 제국의 수많은 신자들이 아닌 벤트 몰란이었다.
벤트 몰란의 발밑에서 거대한 입이 벌려진다. 그대로 녀석을 먹어 치우며 해수면으로 올라오는 고래처럼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무언가.
“저게 무슨…….”
크라켄보다 거대한 크기.
두 발로 지면에 서 있는 거대한 코끼리는 하얀 눈동자로 우리를 응시했다.
크와아아아!
포효 소리만으로도 성벽에 금이 가고 심한 곳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위에 떠오른 구름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곳에서 빼낸 건 하얀 곤봉이었다.
타원형으로 된 머리 부분에는 끔찍할 정도로 많은 가시가 짐승의 이빨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낭아봉?”
제라니 황자가 중얼거리지 않았으면 무기의 이름도 몰랐을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 대는 물건.
“……!”
그리고 분명하게도 녀석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피해!”
구름에서 꺼내 든 낭아봉을 그대로 내가 있는 성벽을 향해 내리친 체체로.
순간적으로 육체를 강화하여 페르난도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제라니 황자의 허리에 팔을 감아 뒤로 빠질 수 있었다.
무참하게 무너지는 성벽.
밑으로 내려오니 그 노련한 흑황의 기사들도 체체로의 압박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기사들 모아. 저건 크라켄보다 더한 괴물이야.”
자신이 구해졌다는 걸 인지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 물어 왔다.
“저건 정말로 마수인가?”
“아니, 저건 신이야.”
벤트 몰란을 먹어 치우고 강림한 악신.
“신이라고?”
“질투와 폭식의 신, 체체로.”
처음 들어 보는지 제라니 황자는 다시금 의문을 품었지만, 지금 그렇게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기사들을 데리고 할 일은 하나뿐이야. 사람들을 대피시켜.”
“우리도 싸우겠다.”
단호한 제라니 황자의 눈동자.
“각자 싸우는 방식이 있어. 네가 지금 싸우는 방법은 시민들을 지키는 거야.”
“물론,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저 도망치기만 해서는 지킬 수 없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황자의 말에 흑황의 기사들도 정신을 차리며 하나둘 근처로 모여들었다.
훌륭한 기개였지만.
“체체로한테 검이라도 박아 넣으려고? 간지러워해 주기라도 하면 다행이겠다.”
제라니의 보검조차 체체로에겐 이쑤시개나 다름없었다.
“그럼 그대는 방법이 있는가?”
“있어.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저 빌어먹을 코끼리랑 싸울 때 사상자가 안 나오게 막는 거야.”
“…….”
“내가 온전히 녀석과 싸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
황자에겐 처음으로 하는 부탁.
그 역시 내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자신의 검과 기사들 그리고 점점 다가오기 시작한 체체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고맙다.”
시내의 건물을 타고 제니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귓가에 흘러들어 왔기에, 목소리를 따라서 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을 거라고 말해 주니 제라니 황자가 자신의 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라……엘 님.”
“쉬, 쉿!”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려다 주변의 상황을 보고는 말끝을 흐리는 카밀라와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으로 사인을 보내는 하트.
제니아의 목소리가 들릴 때부터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카밀라뿐만 아니라 무너진 건물을 뛰어넘으며 노아도 내게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하트의 물음에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시를 고쳤다. 어차피 또 금방 더러워지겠지만.
“형, 저것도 설마…….”
“마교단장 벤트 몰란. 지금은 자신의 신인 체체로에게 먹혀서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라면 그렇게 쉽게는 강림할 수 없으나, 200년간 자신을 섬겨온 신자이자 세상을 뒤흔드는 악인이었기에 그 업보를 먹어 치워 현현한 듯했다.
“저도 싸울래요.”
양 주먹을 쥐며 그대로 달려들 기세로 적의를 뿜어 대는 노아.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팡이로 슬며시 소년을 뒤로 밀었다.
“개죽음이야.”
노아를 낄 바에는 차라리 제라니 황자한테 같이 싸워 달라고 하겠다.
“하지만 형……!”
“안 된다고. 카밀라, 노아 좀 챙겨 주세요.”
“아, 알겠어요.”
카밀라가 노아를 진정시키려 데려가니 하트가 슬며시 앞으로 나왔다.
“가능할까요?”
“글쎄.”
솔직하게 가능성은 썩 크지 않았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확신할 수 없는 상대인데 지금은 탈진 직전까지 갔던 상태니까.
“해 봐야지.”
“……죽지 마세요.”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나는 알겠다고 답해 주었다.
“기사들을 다 모았다. 이자들도 데려가면…….”
그때, 기사들을 다 모은 황자가 때마침 내게로 다가왔고.
“자벨린 부대의 하트?”
“힉!”
자벨린 부대원들이 아무래도 지명수배가 되어 있다 보니 황자의 눈에 딱 걸린 듯했다. 하트가 기겁을 하며 내 뒤로 숨었지만 황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
“지금 목소리가 울리는 곳에서 온 건가?”
“어, 예……. 맞습니다만.”
예를 차려야 할지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하트는 결국 자존심을 꺾었다.
“안내를 부탁하지. 그곳 시민들을 지켜야 한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하트는 당황하며 나를 쳐다봤고, 나는 슬쩍 몸을 틀어 황자와 하트 사이를 비켜 주었다.
“부탁할게, 하트.”
나까지 그렇게 말하자 하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라디오 타워 방면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감사를.”
앞장서기 시작한 하트를 뒤따르는 제라니 황자.
마지막에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나를 쳐다봤지만, 내 시선은 이제 성벽을 지나기 시작한 체체로에게 향해 있었다.
“후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올려 거대한 악신을 바라본다.
이 장소에 남은 건 오롯이 나와 녀석뿐이었고.
길고 긴 하루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