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폭식의 권능이 발동된 데오르그는 검을 들어 올린 것이 무색하게도 짐승처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성과 본능이 싸우는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공격을 멈추진 않았다.
데오르그 기사단장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까지 멋들어진 죽음을 선물할 수는 없었다.
‘4대 원소를 사용한 마법은 연료가 되어 줄 뿐이다.’
예전 벤트 몰란을 상대할 때를 떠올리면 절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시에는 공격 마법밖에 쓸 줄 아는 게 없다 보니 녀석이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마법을 퍼붓는 무식한 방법뿐이었으니까.
폭식이라 해도 배가 무한한 건 아니라서.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손실이 너무 크다.’
분명 어디선가 벤트 몰란이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과격한 짓을 했다간 녀석을 상대할 마나가 없어지기에 이번에 생각한 방법은.
“사슬.”
가벼운 시동어와 함께 푸른빛의 사슬이 대지에서 솟아오르며 데오르그의 몸을 구속한다.
녀석의 비늘 갑옷이 달라붙은 사슬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지만, 그것보다 녀석을 묶는 속도가 더 빨랐다.
재빠르게 마인화를 해제한 이후, 앞으로 내달린다. 지팡이를 얻었음에도 마인화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건 아직은 무리였다.
그대로 구속된 데오르그의 머리에 지팡이를 가져다 댄다.
“당시에는 이런 마법을 쓸 수 없었지.”
내가 선택한 건 정신계 마법.
마수왕이 되어 버린 지금의 데오르그라면 육체와는 반비례하여 정신 쪽은 심각하게 불안정할 것이기에 아예 내부를 파괴할 심산이었다.
이렇게 하면 그 잘난 폭식의 권능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테니까.
“끄아아아아!”
효과가 있는지 데오르그가 괴로움에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고, 그 반작용인지 녀석의 기억 일부가 내게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진부하다면 진부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한 남자의 삶이었다.
실패한 자신의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노력했으며, 그것을 재능이 뒷받침해 주었다.
검술보다는 지략에 재능을 빠르게 깨달은 그는 방향성을 틀자 생각보다 손쉽게 기사단장을 달 수 있었고,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그에게 땅끝마을에서의 무력감.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플로이드의 안뜰에서의 패배는 치욕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이런 괴물이 된 거냐.”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으나 기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펠리스 신학 연구소의 지하.
그는 그곳에서 두 남자를 만났다.
하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박사라는 천재.
마나에 대한 강박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소개해 준 건,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으나 이상한 불길함을 속에 품고 있는 연구원이었다.
적갈색 머리의 훈남.
명찰에 박혀 있는 이름은 하르먼트 맥클라인이었지만 실제 이름은 달랐다.
벤트 몰란.
다섯 명의 마교단장 중 하나인 그가 펠리스 신학 연구소에 기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오르그 단장의 가슴에 강제로 마수왕의 심장을 박아 넣었다.
“싫……어!”
“…….”
“나, 는! 나는……! 기사…….”
오해하고 있었다.
마교단장들의 손에 넘어가 복수에 눈이 먼 마수가 되어 버린 줄 알았으나.
벤트 몰란에 의해 그는 강제로 마수왕이 된 것이었다.
완전무결한 자신의 인생에 흠집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는, 어찌 보면 오만한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사로서 남고 싶어 했다.
순간, 이빨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이빨이 아닌 입이었다.
거대한 입이 나와 마수왕을 함께 집어삼키려 했던 것.
“술수를 부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기습은 데오르그에게 당했던 한 번으로 충분했다.
지팡이에 마나를 담아 휘두른 후, 뒤로 물러나자 땅에서 한 남자가 스르륵 튀어나왔다.
“200년 만에 찾아온 손님이군!”
“묫자리를 찾아왔나, 벤트 몰란.”
적갈색 머리의 미남형의 남자.
겉보기엔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거대한 아가리가 입을 벌린 채로 모든 걸 먹어 치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엘 텔리즈먼, 우리가 만든 세계는 잘 즐기고 계신가?”
명백한 도발.
굳이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너희 친구인 줄 아나 봐?”
지팡이를 휘둘러 마력의 창을 다발로 날려 보지만 옆에 있는 데오르그가 몸을 날려 대신 맞아 낸다.
“멋지지 않나? 꽤나 공들인 작품이야.”
“마수왕의 심장을 이식시킨 것? 너희는 하나 같이 진부해 빠졌어.”
“너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어떻게 데오르그가 마수왕이 된 지 고작 며칠만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지.”
확실히 그건 그랬다.
정령왕의 말대로라면 마수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최소 3년은 있어야 정령계로 침공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고작 며칠만에 데오르그는 강해져도 너무 강해져 있었다.
의문이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수께끼의 정답을 아예 모르겠는 건 아니었다.
“정령왕의 말로는 100년 전, 마수왕이 태어났으나 너희 다섯 명에게 죽었다고 들었어.”
“음, 왕이란 놈이 입이 가볍네.”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마수왕은 죽지 않은 거겠지.”
“…….”
그래, 이게 바로 내 가정이었고 벤트 몰란의 굳은 표정을 보아선 정답인 듯했다.
“그리고 100년간 썩어 문드러진 마수왕의 심장을 신선하면서도 강력한 신체인 데오르그에게 이식했겠지.”
한마디로 지금의 마수왕은 고작 며칠 된 게 아니었다.
자그마치 100년의 세월을 지나온 그야말로 마수들의 제왕, 그 자체였다.
“보관 방법이 썩 훌륭하진 않았나 봐. 100년이 지났으면 이것보단 훨씬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건 우리 실수였어. 듄이 생각보다 심하게 마수왕을 때려 놨거든.”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답하는 벤트 몰란.
“너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들어. 뭔가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하면 손쉽게 정답을 맞힌단 말이지.”
“너희가 상상력이 빈약한 거야.”
“두 세기를 살았는데 그럴 수밖에!”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 솔직히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한 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인 점이 있었다.
“그래,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해.”
“음? 잘난 마도사님께서 나한테? 어디 말해 봐.”
지금까지 중 가장 신난 듯한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음?”
“마수왕이니 뭐니. 다 알겠어. 그런데 이건 심하잖아. 이미 너희 손에 들어와 있는 제국을 너희가 부수고 있는 형국이야.”
그들은 곳곳에 퍼져 제국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마교단장들이 자신의 것을 파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 내전이라도 치르는 중이냐?”
“안타깝지만 그건 아니야. 연락이 안 되는 애도 있긴 하지만, 원래 우리 애들이 자유분방해서.”
마교단장 중에 그나마 상식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게 벤트 몰란이었기에 다른 마교단장들의 뒷정리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자들에 비해 덜 미쳤다는 건 아니었지만.
“뭐, 정답을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 그렇겠지.”
괜히 말했다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
녀석의 앞으로 손을 뻗고 손바닥을 펼친다.
거기에는 푸른빛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열파(熱波).”
아직 남아 있는 플레임의 흔적을 이용하여 고온의 열기가 응축되어 벤트 몰란에게로 날아들었다.
데오르그 단장이 다시 방패가 되려 했지만, 땅에서 솟아오른 푸른빛의 쇠사슬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페르난도와 함께 크라켄을 향해 쏘려 했던 것보단 작았지만, 그 위력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랑 대화하는 동안 마나로 마법진을 그렸어? 퓰리랑 로그니다츠가 당할 만하네.”
거대한 입이 튀어나와 내 열파를 전부 먹어 버린 상태. 물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입이 찢어지며 하늘을 향해 토해 냈지만 벤트 몰란은 이미 피한 상태였다.
“이거 이거, 정말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는걸? 크리스티나 엘리나가 기뻐하겠어.”
“너희가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같잖긴.”
히죽 하고 지어진 벤트 몰란의 미소는 일순 소름이 끼치며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어.”
“…….”
“그중 가장 신과 동화가 된 게.”
벤트 몰란의 육체가 기이하게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2층 건물 정도 되는 덩치에 몸이 기이하게 변형되기 시작한다.
손과 발이 부으며 뭉툭한 발톱이 생기고.
뒤룩뒤룩 배가 튀어나오며.
미남형의 얼굴은 상아를 달고 있는 코끼리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울리며 두 발로 선 벤트 몰란은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비웃음과 함께 선언했다.
“바로 이 몸이다.”
질투와 폭식의 신, 체체로.
늘 앉아서 남의 먹을 것을 탐내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입에 집어넣는 신은 코끼리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신이다.”
벤트 몰란의 거대한 입이 나를 향해 벌려졌고, 그 안에서는 방금 전 내가 쏘았던 열파와 비슷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
피할 순 없었다.
바로 지팡이를 들어 올려 보호 마법을 쳤지만, 녀석의 공격은 끝이 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금까지 먹은 것을 토해 내듯.
중요한 건, 상대는 벤트 몰란만이 아니라는 것.
“크윽!”
어느새 달려든 마수왕이 주먹으로 보호 마법을 한 겹씩 깨트리고 있었다.
“200년 전부터 궁금했어! 도대체 너는 어떤 맛일까, 라엘 텔리즈먼!”
“미친놈.”
너희 마교단장들이 놀라울 만큼 강해진 건 알고 있었다. 200년 간 악신들을 섬기며 쌓아온 견고하면서도 경이로운 힘.
“나도 놀고 있던 건 아니야.”
고작 5년이지만 수백 년 전부터 이어온 초대 마탑주 드레이크의 연구와 인류 최고의 마법사,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모든 마법을 담아온 나이다.
그동안 마나의 역류를 경험하고, 지팡이도 없는 상태였기에 흔들림이 있었지만.
더는, 내 자신의 부족함으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마법진을 확인한 벤트 몰란이 당황해서는 공격을 멈췄다.
반경 1km를 감싸는 대형 마법진.
“이걸, 어느새?”
“무리 좀 했지.”
고작 손바닥에 마법진 하나 새기려고 저 역한 코끼리랑 대화를 이어 나간 게 아니다. 정령들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빠듯하게 완성이 되었다.
그림이 컸기에 그 중심에 있는 녀석은 보지 못했던 것.
“냉기도, 먹어 치울 수 있냐?”
차가운 한기가 올라온다.
마수왕은 벌써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네, 놈!”
“오늘은 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