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크헉!”
복부의 고통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성벽 밖으로 떨어진지라 몸도 여기저기 부러진 듯했고 당장에 마수들도 떨어진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저리 가, 이 괴물들아!
-라푼젤!
-하고 있어!
운디네와 테토가 달려드는 마수들을 막아 주고 있었고, 라푼젤이 애쓰며 내 호흡을 정상으로 돌려주려 했지만 내 눈은 여전히 마수왕에게로 향해 있었다.
녀석이 지금 달려들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걸 녀석도 알고 있다는 듯 곧장 내리꽂으려 했으나.
라마크 아데스가 방패로 마수왕을 후려치며 시선을 끌었다.
“페르난도 님! 제 뒤로!”
“뭐, 뭐야 이건 또!”
성벽 위도 혼란에 빠져 마법이 중지되었다. 라마크가 검을 휘두르며 마수왕에게 대항해 봤지만 생체기 하나 줄 수 없었다.
“크아아!”
되려 위협적인 포효와 함께 라마크에게 달려들어 바로 그의 목을 낚아챈다.
“크, 크읍!”
버둥거리는 라마크 아데스.
페르난도는 무언가 마법이라도 써 주고 싶어 했지만, 열파를 준비한 영향으로 몸에 마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손만 까딱하면 바로 라마크의 목이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등장한 건, 검은 갑주를 입은 군마와 창을 든 거한.
“우라라라라!”
호탕한 기합과 함께 마수왕을 향해 돌진한 볼트론 기사단장. 군마와 정통으로 들이박자 마수왕도 한 발짝 물러나며 라마크의 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커억! 쿨럭! 가, 감사합니다, 단장님.”
“라마크. 저놈은 도대체 뭐냐.”
볼트론 단장은 덩치 큰 푸근한 아저씨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 역시 그걸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의 덩치가 다른 사람에 비해 크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이런 덩치를 가지고 인상을 쓰거나 무표정으로 다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게 싫어서라는 답지 않은 상냥한 이유.
그렇기에 라마크 아데스는 오랜 시간 볼트론 단장을 모셔 왔음에도 이런 표정은 처음 봤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분명한 적의를 가진 채로 온몸에 검은 비늘을 두른 저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마법사님을 공격했습니다.”
“흠.”
슬쩍 내게로 시선을 내리더니 볼트론 단장은 자신의 창을 강하게 꼬나쥐고는 성벽을 내달렸다.
“내가 저놈을 상대한다! 너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마법사를 구해서 크라켄을 막아라!”
“존명!”
라마크 아데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디선가 밧줄을 하나 가져와서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검과 방패만 챙긴 채로 성벽에 밧줄을 묶은 후, 그대로 밑으로 내려왔다.
“미쳤어…….”
그 광경을 눈에 담은 페르난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라마크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났었다.
마수들의 침공이 한창인 성벽을 갑옷도 다 벗고 밧줄 하나에만 의지해서 내려가다니.
자살도 아주 독특한 자살이었지만, 라마크는 달려드는 마수들을 쳐내며 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예에, 어느…… 정도는.”
라푼젤 덕택에 숨을 쉴 수 있게 된 지금, 내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일단 양쪽 팔이 낙하할 때 충격으로 부러졌다.
갈비뼈도 몇 대 나간 것 같고 여기저기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은 걸 간신히 정신만 차리고 있었다.
“제 지팡이 혹시 어디 있는지 보이십니까?”
후 하고 숨을 내뱉고 고개를 뒤로 떨구며 묻자 라마크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을 빛내며 답했다.
힐을 사용하기 위해선 손으로 부상부위를 만져야 했는데, 양손이 부러져서 지팡이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살짝 거리가 있지만 보입니다.”
“부탁, 드립니다. 지팡이만 가슴팍에 올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후우, 플레임. 가서 도와드려.”
화르륵 하는 불꽃과 함께 다시 나타난 플레임은 꽤나 지쳐 보였지만, 알았다 답해 주며 라마크의 옆에 붙었다.
라마크는 처음 보는 정령에 깜짝 놀라면서도 혹시나 싶어 라엘에게 물었다.
“혹시, 방금까지 성벽 밖의 불꽃도 라만 님이 하신 겁니까?”
생각해 보니 아직도 나를 라만으로 알고 있구나.
“예에, 그렇죠.”
거짓말을 할 기력도 없고 해서 그냥 답해 주자 라마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무래도 마수 떼와 전투가 벌어진 것 같은데 부디, 무사하길.
그렇게 내 시선은 자연히 소란이 일고 있는 성벽 위로 옮겨졌다.
“크흠.”
흑황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 내고 있는 볼트론 단장이 성벽을 넘나들며 마수왕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분명 대단했다.
군마와 한 몸이 되어서 창을 휘두르는 모습은 파격적일 정도로 뛰어났으나, 마수왕을 상대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었다.
“빌어먹을, 더럽게도 단단하구만.”
자신의 오러로도 뚫을 수 없는 저 검은 비늘이 눈엣가시인 볼트론. 그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촛불처럼.
창끝에만 피어오른 볼트론의 검은색 오러.
하지만 면적이 좁을 뿐 그 깊이가 명확히 재어지지 않을 정도로 농밀했다.
한 방을 노려서 마수왕을 꿰뚫겠다는 뜻.
“그대,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군. 마수인 듯하면서도 일면이 기사인 움직임.”
“…….”
“훌륭한 무인임은 인정하지만 이쪽은 몇만의 목숨을 짊어졌다.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단 소리지.”
볼트론의 군마가 거칠게 내달렸다.
지쳤을 법도 한데 마치 오늘 처음 달리는 것만 같은 기세는 볼트론의 오러와 같이 흉흉한 빛이 서려 있었다.
“이 몸의 뿔을 받아 넘겨 보거라!”
방패를 꿰뚫는 검은 황소의 문양을 짊어진 남자는 그대로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수왕의 비늘이 벗겨진다.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간 창은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치고 나갔으나.
“오러……?”
볼트론 기사단장의 눈이 부릅 뜨여지며 천천히 적색 마안과 눈을 맞췄다.
“보라색 오러라고?”
순간적으로 볼트론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 하나의 인물이 떠오름은 명확했다.
“데오르그?”
“크아아아!”
보랏빛 오러에 막혀 결국 뚫지 못한 마수왕의 심장. 그렇다면 그 결과는 명확했다.
볼트론과 군마가 하늘로 붕 뜬다. 볼트론은 성벽 난간에 부딪치며 내성으로 떨어졌고 군마도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쥐고 있던 창만이 허무한 소리를 내며 성벽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수왕의 적색 안광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라에에엘!”
“여기! 가져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라마크가 내 지팡이를 가지고 왔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게 꽤나 격렬한 전투를 치루고 온 듯했다.
하지만 마수왕이 한 템포 빨랐다.
포탄처럼 쏘아진 마수왕을 막으려 정령들이 나섰으나.
인간계에서 제약이 걸린 그들의 힘으로는 마수왕을 잠깐조차 막아 내지 못했다.
이제 막 지팡이를 통해 힐을 발동한 나도 막을 수 없었으나.
쾅 하고 자신의 몸을 날려 마수왕의 궤도를 틀은 건 라마크.
“크억!”
그는 그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러 성벽에 박혀 들었다.
마지막에 그가 내게 보낸 눈빛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모든 희망이 맡겨졌다.
뿌득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맞춰지고 고통이 사라지지만, 피로감이 격하게 몰려옴을 느꼈음에도 눈을 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징한 인연이야.”
우선은 지팡이를 휘둘러 라마크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뒀다.
피 때문에 흐릿한 시야를 로브 소매로 닦자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의 적이 눈에 들어왔다.
“마수왕, 아니……. 데오르그 기사단장.”
“라엘 텔리즈먼!”
“내가 라엘인 건 벤트 몰란이 말해 줬나?”
“크아아아!”
나를 향한 증오로만 이루어져 움직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데오르그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이 그 보랏빛 머리칼밖에는 없었기에 천천히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끝낼 시간이야.”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내부에 마나가 담기기 시작한다. 온몸에 푸른빛 마나의 잔향이 퍼지며 마인화가 시작된다.
“나도 지팡이를 가지고 마인화를 쓰는 건 처음이라, 힘 조절을 못 할 수도 있어.”
도발에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마수왕.
그러나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녀석의 몸에 마나의 창이 박혀 들어간다.
볼트론 단장의 최후의 일격으로 겨우 뚫을 수 있던 강도를 지닌 비늘이었지만, 마치 두부에 박혀 들어가듯 꽂히는 창들.
“기사단장 덕분에 어느 정도 강도로 해야 할지 감이 왔거든.”
마나의 창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부어 대자 결국 마수왕은 온몸이 구멍투성이가 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슴도치가 떠오르는 모습.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마에 떠오르는 아홉 개의 붉은 이빨 문양.
“그래, 체체로의 권능이 있었지.”
질투와 폭식의 신, 체체로.
아마 지금 마수왕에게 걸려 있는 건 폭식의 권능.
볼트론 단장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 낸 것도 저 권능을 통해 오러로 오러를 잡아먹었다고 볼 수 있었다.
보라색 오러가 마수왕의 온몸에 뒤덮인다.
내 푸른빛의 창들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해 가며 녀석은 전신으로 탐욕스럽게도 먹어 치워 갔다.
그리곤 손에 만들어지는 오러로 된 검.
형상 자체는 불투명했지만 그건 분명히 검이었고, 놀랍게도 데오르그 기사단장의 자세를 잡았다.
“거기까지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가.”
안 보면 좋을 것을 봤다.
씁쓸함이 목구멍을 넘어 들어오는 느낌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땅끝마을에서 한 번.”
데오르그의 뒷발이 살짝 뒤로 빠진다.
“플로이드의 안뜰에서 한 번.”
그의 돌진을 예상한 나는 바로 수십 겹의 방벽을 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마지막 결전이야.”
당신을 마수왕이 아닌 데오르그 기사단장으로 보겠다.
“라엘 텔리즈머언!”
“그래, 내가 라엘 텔리즈먼이야.”
그저, 원수의 이름만을 부르며 증오를 내뿜어 대기만 하는 마수가 되었다.
마지막을 불태우는 불꽃처럼 지금은 한없이 드높은 기세이지만, 결국엔 초라하게 꺼져갈 당신을 위해.
“덤벼, 데오르그.”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불태웠다면, 그걸 꺼트리는 것 역시 내가 책임을 져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