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마도사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92화 (92/200)

92화

“후우!”

지팡이에 마나를 둘러 그대로 휘두르며 크라켄의 다리를 베어 낸다. 루이나한테 창술을 배운 값이 여기서 드러나는구나.

“너는…….”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고 말할 관계는 아니지만.

너무 놀라서 넘어진 걸 까먹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제라니 황자에게 달려드는 다른 다리를 베어 내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거야?”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만날 때마다 질문밖에 안 하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제라니 황자가 급하게 일어나며 자세를 잡았다.

“……도울 생각인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까.”

“어째서지? 너는 반란군이지 않은가. 제국을 무너뜨리기엔 지금이 최적의 기회일 텐데.”

이 황자가 정신을 못 차렸네.

“똑바로 말해.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어.”

“…….”

“다만, 퍼지라는 제도에 불만이 있는 것뿐이야. 그건 28대 자데오스 황제께서 폐지하셨던 노예 제도와 유사하면서도 훨씬 더 악질적이야.”

분명 당시 노예 제도가 좋지 못한 이유를 한 무더기로 써서 기록으로 남겨 두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제라니 황자가 무언가 답하려 했으나 크라켄의 다리가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제라니 황자는 검을 들어 올리곤 그대로 몸을 틀어 뒤에서 날아드는 다리를 베어 낸다.

그리고 잠시, 우리는 서로 눈이 맞았다.

“이번 한 번만…… 도움을 청하마.”

“흠.”

설마 황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간 걸 보면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아 가면서까지 내게 부탁을 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국은, 너의 힘이 필요하다.”

‘여전하네.’

황족인 그가 국가의 반역자인 내게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제국과 그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생각하자 괜스레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감추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부탁, 받들지.”

내 답을 통해 기운이라도 받은 건지, 황자는 고개를 치켜들고는 더욱 더 가열차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페르난도가 성벽 위에서 대군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 그걸 도울 수 있겠나?”

“상황 보고. 나도 지금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야.”

“…….”

슬쩍 내 모습을 보곤 알았다 답하는 제라니 황자. 크라켄이 지하수로를 무너뜨려 거의 죽다가 살았다.

정령들이 아니었다면 무너지는 지하에 그대로 깔려서 압사할 뻔했다.

“혹시, 크라켄의 이 상처는 네가 만든 건가?”

“맞아, 지하에서 녀석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지상으로 나오기 전에 제압하려 했는데 실패했어.”

“그런가…….”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표정을 짓던 황자는 상념을 털어 내려는 듯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여전히 자신의 군마를 타고 진두지휘하며 크라켄을 베어 나가고 있는 볼트론 기사단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순간 뜨끔했는지 반응이 느렸지만 제라니 황자는 생각보다 능청스럽게 답했다.

“볼트론 단장, 이 마법사를 페르난도에게 데려다주게.”

“성벽 위로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이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아주 유능한 마법사네.”

눈짓 한 번 주고는 다시 크라켄을 상대하기 시작한 제라니 황자. 볼트론 기사단장은 황자의 말에 의심 없이 나를 자신의 군마 뒤에 태웠다.

“마도사는 아닌데. 뛰어난 마법사라, 기대하고 있겠소.”

“마음껏 하시죠.”

다부진 체격의 볼트론은 다급한 상황임에도 껄껄 웃어 대며 크라켄을 타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자, 그럼 나는 다시 갑니다.”

성벽 위에 내리자 볼트론은 다시금 오러를 뿜어 대며 크라켄의 머리로 향했다. 거대한 촉수를 전부 베어 낼 기세로.

-완전 터프한 아저씨네.

-대단한 남자구나.

-썩 마음에 드는군.

“옛날부터 흑황 기사단의 단장들은 하나같이 엄청났어.”

잠깐 봤을 뿐이지만 200년 전의 흑황의 기사단장보다 뛰어나 보였다. 오러의 질도 뛰어나고 창술도 훨씬 현란하다. 게다가 기마술은 월등히 이쪽의 승리였다.

“저런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제국이 이어지고 있는 거겠지.”

믿고 뒤를 맡기며 성벽을 쭉 달리자 마법진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페르난도와 그 앞을 방패로 막아서고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라마크 씨?”

“라만 님?”

순간 라만이라뇨 하고 답할 뻔했으나, 제도에서 쓰던 내 가명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흑황 기사단이라면 그가 없을 리가 없었다. 흑황 기사단의 3부대 대장이자 아들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남자.

물의 신전의 아도리아 사건 때 이어졌던 인연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설명하기엔 복잡합니다. 뒤에 있는 건 마도사 페르난도죠?”

“예, 맞습니다만.”

상상하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라마크는 상당히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 뒤에서 마나 탈수 증상을 겪고 있던 페르난도가 소리를 질렀다.

“다, 당신은!”

“페르난도 님. 아시는 분입니까?”

“알다마다요! 이 사람은 반란군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페르난도의 말에 방금까지 얼이 빠져있던 라마크의 방패가 다시 굳세게 앞을 가로막는다.

“라만 님, 정말입니까?”

적개심을 풀풀 풍기며 여차하면 베어 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라마크 아데스. 나는 부정하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서 지금 저를 체포하실 겁니까? 저 크라켄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저를요?”

“무슨 말을…….”

“크라켄을 구멍 투성이 상태로 만든 게 저라는 말입니다.”

충격을 받은 듯 라마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페르난도를 확인했고, 페르난도는 침음을 낼 뿐이었다.

“라만 님이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시다고요?”

“죄송하지만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 마수 잡고 싶으면 비키세요.”

“…….”

잠시 고민하던 라마크는 천천히 방패를 내리며 옆으로 슬쩍 길을 터 줬다.

자신의 기사도를 꺾은 것이었다.

“아들을 구해 주신, 당신이기에 믿습니다.”

“감사를.”

나는 그대로 라마크 아데스를 지나쳐 벌벌 떨고 있는 페르난도에게로 다가갔다.

“화, 황자님을 해하기 위해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어림도 없다. 제라니 황자님은 나 같은 것 없어도 네놈에게 죽으실 분이 아니다!”

“개소리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 그 황자가 보내서 온 거니까 정신 집중 똑바로 해.”

“뭐, 뭐?”

“저 문어 대가리 죽여야 할 거 아니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페르난도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지금은 생각하겠어.”

“마법사라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치, 칭찬하지 마!”

칭찬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지금 쓰려는 마법은?”

마법진을 그려 둔 걸 봐서는 꽤나 강렬한 대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마나가 부족해서 탈수 증상이 일어난거고.

그 나름대로 자신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

“대군 마법 레이 오브 아그니를 쓸 생각이야.”

뭐?

뭔 소리야.

“장난치는 거지?”

“장난?”

“아니, 마법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마법에 그런 이름을 붙이냐. 그것도 대군 마법을 만들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라는 얘기인데.

병 있는 거 아니야?

스승님이 들었으면 반나절은 배꼽 잡고 웃어 자빠졌을 작명 센스 아닌가.

“설마 네 취향이냐?”

“그럴 리가! 네가 모를 수도 있지. 이 마법은 말이야……!”

“아 됐어. 어디의 누가 만들었는지 들을 시간은 없고. 그 레이 뭐시기 어떤 식으로 쓰는지 틀만 설명해 봐.”

탈수 때문에 상기된 얼굴에서도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성 바깥의 열기를 이용해서 위력을 증가시킬 거야, 이 마법은…….”

설명을 듣고 있자니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점차 몸이 굳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입이 벌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때? 이해했어?”

“…….”

“이해 못 했어? 다시 설명해 줘?”

조금 으쓱해하는 페르난도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결국 말을 뱉었다.

“그거, 누가 만든 마법이냐.”

“아까는 안 듣겠다며.”

“말해 봐.”

불안한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고 투덜거리면서도 페르난도는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모를 수밖에 없지. 사실 마도사 중에서도 이 마법을 알고 있는 건 나랑 첫째, 둘째 사형뿐이니까.”

“…….”

“제국, 아니 대륙 최악의 대량 학살범이자 최악의 마법사.”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제국을 팔아넘기려 했던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광신도이며 그녀의 오른팔이었던 재앙. 라엘 텔리즈먼의 마법이야.”

“웃기지 마!”

쾅 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위해 크라켄의 다리를 막아 주고 있는 라마크조차 깜짝 놀라 뒤를 확인할 정도.

“무, 뭐야!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거야!”

“레이 오브 아그니? 장난하냐! 그딴 이름을 지을 리가 없잖아!”

“라엘 텔리즈먼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지은 적 없다고!”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레이 오브 아그니?

무슨 7살 아이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조합해서 친구들이랑 장난칠 때 필살기인 양 내뱉을 법한 이름이지 않은가!

-라엘! 진정해! 지금 그럴 시간 없어!

-맞아, 억울한 건 알겠지만 크라켄의 회복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단다.

“크으…….”

정령들의 말에 힘이 들어간 손으로 페르난도의 어깨를 잡았다.

“잘 들어. 지금부터 너는 내 지팡이가 되는 거야.”

“뭐?”

“닥치고 그냥 들어! 기분 더러우니까!”

불만을 일갈하자 페르난도는 기세에 눌려 웅크린 채로 마법진에 손을 댔다.

“마나, 술식, 흐름. 전부 다 내가 조정할 테니까 너는 그냥 마법을 내뱉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 알았어.”

녀석의 대답과 동시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하자 페르난도가 당황하며 고개를 틀어 나를 보려 했다.

“고개 돌리지 말고, 마법에 집중해! 그렇게 어벙하게 있다가는 역류 온다!”

“크으윽!”

무차별로 주입되는 마나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는 페르난도였지만 그는 정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텨 냈다.

결국 마법진에 모든 마나가 불어넣어졌고.

“이제 조정에 들어간다.”

“뭐?”

“이름도 이상하게 지었으면서 마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잖아.”

레이 오브 아그니라는 이 마법이 내 마법이라는 건 알겠는데, 술식이 여기 저기 달랐다. 아무래도 시전자의 몸에 부담이 덜 가도록 조정한 것 같은데.

“멍청하긴, 이 마법은 대군 마법을 쓰면서도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사람만 다룰 수 있게 만든 거야.”

이 마법의 열기에 마법사 본인이 휩쓸리지 않게 몸에 보호 마법까지 동시에 칠 수 있어야 이 마법은 완성된다.

“지금, 뭐 하는…….”

처음엔 자신의 마법진을 망친다고 생각했는지 소리를 질러 대는 페르난도였으나 점점 입을 다물었고, 마지막에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뛰어난 스승과 재능이 있으면.”

씨익 웃으며 페르난도의 등을 팡 쳐 준다.

“레이 오브 아그니 같은 마법이 아니야, 이건.”

그것보다 몇 배는 강한.

내 오리지널의 대군 마법 중 하나.

“열파(熱波)라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마법이지.”

앞에 열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마법을 친 후, 라마크도 우리 뒤로 나오라고 외친다.

“마법이 완성되었다는 신호는?”

“내 품에 있는 적색 신호탄을 쏘면 다들 뒤로 빠질 거야.”

“많이 물러나야 할 텐데. 자칫 잘못하면 휩쓸릴 거야.”

꿀꺽하고 페르난도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녀석은 고개를 숙여 동의한다.

내 것과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녀석의 로브에서 신호탄을 꺼낸 순간.

-라엘!

두 정령이 동시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야가 돌아간다.

방금까지 내 앞에 있던 페르난도와 거대한 크라켄은 어디로 가 버리고 붉은 하늘만이 눈에 들어오더니, 곧이어 입에 흙이 잔뜩 들어온다.

방금까지 타오르던 뜨거운 대지의 열기가 뺨을 통해 느껴지고 그와 동시에 복부의 고통이 갑작스레 다가왔다.

“크헉!”

뭉텅이로 뿜어져 나오는 핏덩이.

슬며시 보이는 성벽을 통해 내가 무언가의 충격에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그 장소에는.

보랏빛 머리를 흩날리는 인영.

온몸을 검은색 비늘과 같은 갑옷으로 감싸고 있으나, 그 틈새로 빛나는 적색의 안구만큼은 또렷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엘 텔리즈머어어언!”

이 모든 일의 원흉.

마수왕의 등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