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으윽, 물이 더러워.
“참아.”
-공기도 탁하구나.
“지하잖아.”
하수구 구멍을 열고 지하로 들어오자 한마디씩 내뱉는 두 정령. 뭐, 둘에겐 썩 마음에 드는 공간은 아닐 걸 알고 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테토, 얼마나 남았어?”
-지금 속도로 봤을 때는 10분이면 도착한다.
“젠장.”
시간이 부족했기에 신체를 강화한다.
붉은빛이 다리에 감돌자 지하 수로를 빠르게 내달렸고, 5분 만에 예상 도착지점 앞에 섰다.
아직 5분 정도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지하수로가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자칫 잘못하면 생매장당하겠네.”
-어떻게 할 생각이니?
라푼젤의 물음에 지팡이를 앞으로 뻗으며 답했다.
“지하에서 죽인다. 녀석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거야.”
-테토가 있는 편이 좋겠구나.
“플레임은 역소환한다.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바깥도 얼추 정리가 끝났어. 걔 사라진다고 해도 바로 다시 전투가 시작되진 않을 거야.
빠르게 브리핑해 주는 운디네 덕분에 플레임을 역소환한 뒤, 천천히 벽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다.
-마법진도 다룰 줄 알아?
“답지 않은 방식이긴 한데, 동굴에서 살면서 배웠지.”
스승님이 마지막에 보여 주신 마법도 마법진을 통해 사용하셨으니까 배우지 않을 순 없었다.
물론, 마법진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평소보다 더 위력적이고 강대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일정 마나를 떼어 두고 쓰는 느낌인지라 마나의 역류가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중요한 건 속도.
아무리 빨리 그리더라도 마법진을 그리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한 템포 늦게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사실 200년 전에는 스승님도, 나도 마법진을 자주 다루진 않았어.”
마법진을 사용해야만 할 수 있는 마법을 마법진 없이 구현하는 게 우리의 모토 중 하나였고 그걸 성공시켰다.
실제로 내가 사용하는 대군 마법의 대부분은 보통 마법사라면 마법진을 그려야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라도 사용 가능할 테니까.
-흠,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지만 조금 기대되는 군.
-어떻게 보면 라엘의 최고 전력인 셈이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지금까지의 화력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했기에 지금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쿠궁 하는 진동과 함께 떨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수로의 벽돌들이 하나둘 떨어져서 마법진을 그린 곳은 고정이 필요할 정도.
“도대체 얼마나 큰 괴물이 오는 거야.”
-지금, 녀석의 다리가 바로 앞에 있다.
다리?
그렇게 반문하려던 순간, 앞에 있던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붉은색 촉수가 지하수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어?”
-크라켄이잖아!
대양에 서식하는 마수가 어째서 지하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제라니 황자와 흑황 기사단에 대한 게 같이 떠올랐다.
방금까지는 그들이 유능해서 제도의 정보를 빠르게 얻어 지원을 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도망쳐 온 것이며 쫓아온 것이었다.
지하로 숨어 들어간 크라켄의 뒤를 쫓다 보니 녀석의 목적지가 제도임을 알아채고 먼저 왔던 상황.
“후우, 일단은 바로 제압하자.”
-크라켄의 가장 두려운 점은 크기가 아닌 재생력이야. 분명하고 확실하게 죽여야 해.
“알겠어.”
말로만 들었지 명확한 정보는 없는 마수였기에 운디네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서 있기도 힘든 진동 속에서 천천히 지팡이와 함께 마법진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마법진은 푸른빛을 뿜어 대며 울어 대기 시작했다. 진을 그려 넣었던 벽이 마법진의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터져 나갔지만, 마법은 분명히 발동됐고.
콰직 콰직 콰직
지하수로에서 난리를 치고 있던 녀석의 다리 중 하나가, 뾰족하게 찔러 들어온 흙으로 된 창에 꼬챙이가 되어 피 분수를 뿜어 대며 추욱 늘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물의 정령인지라 명확한 판단이 안 서는 운디네였지만 테토는 달랐다.
진심으로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
-놀랍군, 실력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한 방이 있는 남자잖아. 오늘 테토 표정 변화가 다양해서 볼거리도 있네.”
-무슨 상황인데! 나도 설명해 줘!
괜히 허세를 부리며 답해 보지만 솔직히 생각 이상으로 마나가 빠져나갔다.
물론, 그 위력은 확실했지만.
-크라켄의 몸체 전부에 가시가 박혀 들어갔다. 언뜻 봐도 수천 개는 보이는데 대단하군.
-확실히 죽은 거겠지?
-그래, 녀석은 움직임을 멈췄다.
방금까지 진동하던 대지가 다시 잠잠해진 걸 보면 크라켄은 죽은 게 분명했다.
“지하로 온 게 패착이야. 녀석의 온몸을 대지가 감싸고 있는 헝태니까.”
그 덕분에 거대한 크라켄의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후아, 조금 쉬어야겠는데?”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인다.
피곤함은 가시지 않겠지만 잠시 쉬면 마나는 다시 차오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마수왕을 찾아낼 심산이었으나.
움찔하고 지하수로에 나와 있는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였다.
-잠깐만!
-위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어.
-아직 살아있는 건가?
그 말에 호응하듯 녀석은 점점 더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다리를 몇 개 더 지하수로 쪽으로 내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재생력이야!”
다시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 녀석의 다리를 향해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일어나 한 번 더 마법진을 그리려던 순간.
다리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제도 안으로 들어오려는 게 아니라…….
-올라가려고 한다! 지상으로 올라가려 하고 있어!
지하에서는 자신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도 없고, 미지의 존재인 나에게 당했던 탓인지 녀석이 빠르게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
“이런 미친!”
당황스러웠지만 촉수가 일부 지상으로 올라갔는지 성벽의 비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바로 위는 성벽이다. 녀석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성벽이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내성 수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수들을 성벽 없이 대응해야 한다는 소리.
“테토, 도와줘.”
-알았다!
우선은 녀석이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대지의 압력을 조여 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 건 느껴졌으나.
-다리를…… 끊어 내고 있다.
결국 녀석은 잡힌 다리를 끊어 내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무너진다! 라엘!
성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 밑에 있던 지하수로 역시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로가 범람하고 땅이 갈라지며 어둠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 * *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며 등장한 크라켄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제라니 황자에 의해서 크라켄의 존재는 이미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몸을 막상 눈에 담으니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부상을 당했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라켄의 온몸에 구멍이 뚫려서 피가 분수처럼 흘러내리며 대지를 적셔 왔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상태임에도 이 정도의 힘을 보이고 있다는 것.
“페르난도, 부탁하지.”
“무운을.”
최전선이라 볼 수 있는 성벽 위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던 제라니 황자는 자신의 보검을 뽑아 들었다.
달려들기 전, 슬쩍 눈을 돌려 황실을 확인했으나 여전히 그곳의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고 한없이 멀어 보였다.
‘형님…….’
입술을 꽉 깨물며 앞으로 치고 나간 제라니 황자의 검이 오러를 뿜어 대며 크라켄의 다리를 잘라 냈다.
“다들 집중해라! 부상을 당한 지금을 놓치면 끝이다! 녀석도 한 마리의 마수일 뿐이란 말이다!”
“방패를 꿰뚫는 거대한 황소들아! 출진의 시간이다!”
성벽 밑에서 기마를 한 상태로 대기 중이던 검은 갑옷의 기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왔다.
크라켄이 성벽을 부쉈지만, 지금 당장에 다행인 건 크라켄이 마수, 인간 가릴 것 없이 공격하고 있기에 마수들이 당장에 넘어오진 못하고 있다는 것.
위에서는 황자가, 밑에서는 흑황의 기사들과 볼트론 기사단장이 날뛰고 있었다.
“부상이 심한 상태라서 이전보다 상대하기 편하다!”
“가자! 일전의 패배를 갚아 주자!”
자신들의 무대인 양 날뛰고 있는 흑황 기사단은 제국을 넘어 대륙에 널리 떨친 자신들의 위용을 이 자리에서 다시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한 방이 부족하다.’
누구보다 많은 수의 다리를 베어 넘긴 제라니 황자이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피해는 지속적으로 주고 있지만 명백한 한 방이 부족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지구력 싸움이 가게 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진 크라켄이 승리하게 된다.
“페르난도, 사용 가능한 대군 마법이 있나?”
“……준비는 해 보겠습니다만, 시간이 걸립니다.”
“준비해라. 라마크 대장, 페르난도의 호위를 부탁하지.”
“존명.”
제라니 황자를 지키는 호위 역이던 흑황 기사단의 라마크 대장이 짧게 목례를 하며 페르난도의 앞에서 방패를 치켜들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계속 시간이 끌린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과 없는 건 큰 차이니까.
‘중요한 건 그 공격으로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이지만.’
페르난도는 지원형의 마법사이다.
아무리 제국의 정점인 대마도사의 제자라 하더라도 그의 특기 분야가 아닌 마법을 제대로 발동할 수 있을지, 하더라도 그게 저 괴물에게 먹힐지는 여전히 미지수.
“후읍!”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거대한 오러를 만들어낸 제라니 황자. 이전과는 다르게 분명히 한 단계 성장한 그의 힘이 가감 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황자님, 대단하시군요!”
“그대와 비교해선 아직 멀었군.”
승마를 한 상태에서 크라켄의 다리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볼트론 기사단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제라니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볼트론의 창에 넘실거리는 오러는 제라니 황자보다는 길이가 짧았으나 그 강도가 남달랐다.
게다가 그의 창이 찌르고 간 상처는 다른 부위보다 재생이 느린 걸 보아 무언가 다른 속성도 부여한 듯했다.
‘나도 말을 한 마리 구해야겠군.’
볼트론 단장의 다리가 되어 주는 흑색 갑주를 걸친 말을 보며 제라니는 입맛을 다셨다.
물론 황자인 그에게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건 모든 걸 믿고 맡기며 함께 내달릴 수 있는 전투마였다.
그런 군마가 있으면 그 마법사와의 결전에서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제라니 황자가 생각하던 순간.
“……!”
크라켄의 점액을 밟아 몸이 기울며 넘어졌다.
“황자님!”
저 멀리서 페르난도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라니 황자의 눈은 자신을 덮쳐 오는 거대한 빨판이 달린 적색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끝났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왜인지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렇기에 황자는 겸허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고,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그러자 자신의 안에 남은 미련을 발견했다.
‘나는…….’
제국의 신민을 지키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단지 황족의 핏줄이라는 것만으로 존경해 주고, 박수를 보내며, 환하게 웃어 주는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라니 데 아르니티. 제국을 짊어지는 세 번째 황자, 네 눈으로 봐. 정말로 너희가 말하는 퍼지와 성지인들이 달라?’
적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던지고 간 의문.
결국,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자조하는 순간.
“벌써 포기한 거야?”
방금 머릿속에서 울려오던 목소리가 이번엔 귀를 후비고 들어왔다.
답지 않게 이마에 흐르는 피와 잔뜩 더럽혀진 로브.
그리고 처음 보는 백색의 지팡이.
“너는…….”
자신의 앞에 서서 크라켄의 다리를 막아선 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며 제라니 황자는 눈을 크게 떴고.
“얼른 일어나, 그 손으로 제국을 지켜야지.”
남자는 애써 웃으며 제라니 황자를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