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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마도사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86화 (86/200)

86화

“왜냐. 어째서 너희는 그렇게도 잔혹하게 나를 이용한 거냐.”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플레임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해답을 내게 바라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답은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가…….”

희망의 빛이 꺼지듯 천천히 숙여지는 플레임에게 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네가 직접 찾아야지.”

“무슨…….”

내가 여기서 생각을 말한다고 해도, 정답을 준다고 해도 플레임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같은 답이라도 자신이 직접 찾아야만 정답이 되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많은 상처를 받은 건 알고 있어. 그 상처를 내가 헤아려 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겨 낼 수 있는 계기가, 짊어지기 힘들 때는 쉼터가, 괴로울 때는 까짓거 그날 하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고통을 딛고 일어나라는 말이냐.”

“깨달으라는 거야.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너는 아직 잘 모르니까. 그 뒤에 이겨 내든, 다시 여기 틀어박히든 그건 신경 쓰지 않아.”

그럼에도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네놈을 따라가 봐야 너도 똑같이 나를 이용하려는 거면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틀린 말은 아니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플레임이 필요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니까.

“맞아, 나랑 함께한다면 정말 여러 일이 있을 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밉보인 사람이 꽤 많거든.”

“…….”

“사람을 살릴 때도 있고, 사람을 죽여야 할 때도 있을 거야. 부정하진 않아.”

앞의 상처투성이인 정령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 진심이자 내가 생각하는 그가 자신의 상처를 벗어나는 방법.

“그러면서 한 번 깨달아 봐. 인간이란 존재에 대하여.”

좋은 면만 보일 수도 있었다.

추워하는 사람들에게 플레임을 다뤄서 따듯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고기를 구워서 음식을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다.

플레임이 진짜 자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직면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도화지가 타들어 가듯이 주변 배경 전체가 녹아들기 시작했고, 나 역시 눈을 감았다.

“후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정령왕과 세 정령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아닌 바깥의 공기를 마시니 상쾌함은 물론이고 시원함까지 느껴졌다.

평범하게 숨을 쉰다는 건 이렇게나 축복이었다.

“라엘!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됐니?”

“플레임과 대화는 잘됐나?”

굳이 정령들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자 두껍고 낡은 문이 육중하게도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플레임…….”

“정령왕인가, 오랜만이다.”

방금까지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던 신형이 아닌, 붉은 머리가 눈 밑까지 내려오는 소년의 형상.

“다시 나아갈 수 있겠느냐?”

다정한 정령왕의 물음에 플레임은 입을 다물며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녀석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자 플레임은 또다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아 주었고.

그렇게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나만 확실하게 하지. 나는 네 말에 감화되어서 나온 게 아니야.”

“응?”

“정령왕을 비롯한 다른 정령들이 너를 믿으니까. 한번 믿어 본 것뿐이야.”

툴툴거리는 작은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알겠다고 답해 줬다.

“이걸로 처음 얘기했던 계약 조건은 지켜졌구나?”

슬쩍 옆으로 다가온 정령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그래, 이걸로 처음 정령계에 왔을 때 그녀와 했던 ‘네 정령과의 계약’이 완료되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정령왕에게 답했다.

“대마도사 크리스티나 엘리나의 제자, 마도사 라엘 텔리즈먼. 지금부터 정령계의 위험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이게 내가 위력적인 네 정령들과 계약하기 위해 치른 대가.

“수호의 기사로서 살아가마.”

동굴에 살던 내가 파이엔과 마교단장들을 확실하게 쳐부수기 위해서 새로 얻은 힘의 대가는, 정령계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 주는 것.

“그래, 이제 내가 부르면 무조건 와야 한다!”

“아니, 그건 아니야. 긴급 상황인지 얘네한테 한 번 묻고 확인할 거야.”

“그게 뭐냐! 내 기사님이 되어 주기로 했지 않느냐! 그럼 계속 같이 있어야지!”

방방 날뛰는 정령왕.

어차피 이럴 거 알고 있었으면서 괜히 투정 한 번 부리는 걸 알고 있기에 간단히 무시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면 이제 바로 갈 거냐?”

투덜거림을 멈추고 왕좌에 불량하게 앉은 정령왕이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내게 쏘아 댔지만, 단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마수왕 때문에 인간계는 지금 난리도 아니야.”

“첫 상대는 마수인가? 아주 훌륭하군. 몸풀기로 딱이야.”

바깥세상에 나온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조금 흥분한 플레임이 자신의 주먹을 맞대며 쾅쾅 소리를 냈고, 운디네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시끄러! 방구석 폐인이 사람들 만났다고 좋아라 하긴!”

“무, 뭐? 오랜만에 만났다고 말 그따위로 할 거냐!”

“라엘은 왜 이런 애랑 계약을 해 가지고 소란스럽게 만드냐!”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운디네와 플레임을 내버려 두고 챙겨야 할 게 하나 있었다.

“우레아는 지금 어디 있어?”

괜히 깜빡하고 놓고 갔다가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미리 말해뒀고, 정령왕이 손을 튕기자 앵무새가 살 법한 새장과 그 안에 갇혀 있는 꽃 한 송이가 튀어나왔다.

[라엘! 드디어 돌아가는 거구나!]

“꽤나 괴롭혀 줬으니까 이제 정령계에는 얼씬도 하기 싫을 거다.”

[젠장, 다시는 안 온다!]

후후 하고 재밌는 장난감을 버리듯 내게 우레아를 건네주는 정령왕.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한동안 잘해 줘야겠다.

“그럼 돌아가는 문 좀 열어 줘.”

“…….”

“돌아가는 문 열어 달라고.”

“…….”

“야.”

휘파람도 못 불면서 휘파람 부는 척하면서 천장 무늬를 세고 있는 정령왕.

팔짱을 끼며 짜증을 냈으나 정령왕은 여전히 어색한 시선 처리와 함께 모른 척을 해 댄다. 내 옆의 다른 정령들도 한마디씩 하려던 순간.

우리 뒤에 있던 문이 열리며 한 정령이 조심스럽게 정령왕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거대한 케이스를 건넨다.

정령왕의 키보다 큰 케이스에 시선이 쏠리자 이제야 웃으며 케이스를 열고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는 그녀.

“와아.”

운디네가 감탄을 내뱉을 정도.

나 역시 멍하니 그녀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고 녀석은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뿌듯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정령계를 지키는 최초의 수호기사여.”

순백색 하얀 몸체에 황금색과 푸른색 무늬로 둘러싸인 지팡이. 지팡이 위에는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운 청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대의 어, 음……. 앞으로의 노고를 치하하여.”

허술하긴.

하지만 그게 정령왕다워서 되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령계에만 있는 성백 나무와 물의 정령들이 제공해 준 보석으로 만든 아주 귀하고 귀한 이 지팡이를 수여하마.”

“……감사합니다.”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괜히 더욱 뻘쭘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받아 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좋은데?”

뛰어난 지팡이다.

그것도 상당히.

마나의 순환과 저장률도 좋고 몸체도 튼튼한 게 솔직히 좀 많이 놀랐다.

“그지? 좋지? 그거 만든다고 정령들이 진짜 엄청 고생했느니라!”

방금까지 애써 분위기를 잡던 정령왕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의문이 있긴 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도구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는 정말 순전히 나만을 위해서 특별 제작한 것.

“그대가 처음 정령계에 온 이후부터 계속 준비했지! 시행착오 몇 번을 거쳤는지 모른다.”

“흐음.”

그럼 내가 플레임과 계약을 하기까지 창고에 박아 두고 있던 건가?

한번 허공에 휘둘러 보거나 마나를 불어넣어 보고 해 보며 느낀 건, 뛰어난 장인의 실력으로 만든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워낙 훌륭한 소재와 세월을 들인 노력이 부족한 실력을 메꿔 탄생한 지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족감에 저도 모르게 지어진 환한 미소와 함께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 사실 지팡이를 구할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거든.”

플레임뿐만 아니라 이런 선물까지 받아갈 줄이야. 정령계에 오기 싫어서 시간 벌던 게 조금 미안해졌다.

“우우!”

감동을 받은 정령왕의 눈가에 작은 방울이 맺힌다.

“이렇게 솔직하게 고마워해 주다니! 그 고생하길 잘했구나!”

와앙 하며 달라붙어 눈물을 흘리는 정령왕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눈물 콧물 범벅인 상태로 고개만 살짝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지팡이 이름은 프레이란다.”

“기도? 어째서?”

조금 특이한 이름이다 싶어 되묻자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쟤 이름이잖아.”

“선물에 자기 이름을 박아 넣다니. 나였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받는다, 얘.”

“시, 시끄러워!”

아, 그런 거였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고 이상하게 이유를 알고 나서 지팡이가 조금 더 무겁고 거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다음에도 꼭 와 다오, 라엘!”

“그래, 시간 되면 올게.”

요번 방문으로 저번과는 다르게 정령계를 향한 내 인식이 바뀐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자주 오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

슬슬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몸속 마나가 한차례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다시금 잠잠해졌다.

“무슨 일이야?”

운디네가 혹시 지팡이에 무슨 짓 해 놓은 거 아니냐며 정령왕에게 따지고 들려 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인간계에서 신호가 왔어.”

레온과 에레오나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계에서 지금 급박한 상황이거나 혹은 일주일이 지났다고 내게 돌아오라는 신호를 준 것.

“타이밍 괜찮네.”

슬쩍 정령들을 한 번 바라본다.

인간계로 넘어가면 다시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믿음직한 하나의 동료들이 되었다.

게다가 쥐고 있는 지팡이 또한 자신감을 크게 상승시켜 주고 있었다.

“프레이, 돌아갈게.”

“어? 어? 그래! 그래야지!”

이름을 불러 주니 해맑게 웃으며 차원을 열어 주는 정령왕.

이렇게까지 순박한 아이였나 싶었으나 원래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 정신이 퇴화한다고 테토가 옆에서 조용히 알려 줬다.

그렇게 인간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고.

그 틈새로 용의 얼굴을 가진 거대한 마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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