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결국엔 또 마교단장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봐야겠네.”
답답한 감정에 공감해 주듯 정령들도 침묵하며 분위기를 살피던 와중 운디네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말했다.
“솔직히 말할 게 라엘, 나는 그 녀석들이랑 네가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냥,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운디네의 말에 라푼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테토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운디네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최근 마교단장들과 연관된 일만 하면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어 버리는 나를 보고 싶지 않은 것.
정령이면서 정은 많아서 거진 울먹이는 그녀의 표정에 걱정 말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다른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운디네도 내가 어떤 결정을 할지 알았기에 단호한 내 모습에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나도 추악한 녀석들이나 쫓지 않았으면 좋겠긴 하지만……. 그 녀석들이 벌이는 일이 너무 많긴 해.”
“요번 마수왕 사태는 상관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긴 하군.”
“에잇! 그럴 거면 그냥 빨리 다 처리해 버리자!”
내 선택에 애써 이유를 부여해 주는 라푼젤과 테토. 그리고 우울해하지 말자는 듯 주먹을 쥐고 외치는 운디네.
우리를 보며 무언가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 정령왕.
나는 기세를 살려 말했다.
“플레임을 만나고 싶어.”
“……뭐?”
“이게 두 번째 조건이야.”
다른 정령들한테는 오기 전에 미리 가볍게 언질을 줬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정령왕은 마수왕 때보다 훨씬 놀란 표정.
“진심인가?”
“그럼, 진심이지.”
“플레임이 이성을 잃기 시작하면 나조차 막아 내기 힘들다.”
“나도 잘 알아.”
처음 정령계에 찾아왔을 당시, 결국 내게 패배를 선사한 정령이었으니까.
“믿어 줘, 그때랑은 다를 거야.”
“그런 눈동자로 부탁하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군. 너희도 다 동의한 건가?”
정령왕의 시선이 다른 세 정령에게로 향했고, 그들은 처음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그렇다 답했다.
“정말 위험해지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거 하나한테 너무 쫄아 있는 모습도 보기 그렇지 않겠니?”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이쪽의 전력이 훨씬 우위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나 운디네가 이쪽에 있다 보니 플레임이 아무리 강한 정령이라고 해도 우리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전투는 하지 않을 거야.”
단언.
내 진위를 파악하겠다는 듯 정령왕의 시선이 속을 꿰뚫을 기세로 강렬하게 쏘아진다.
하지만 이내, 그 시선은 운디네에게.
운디네에서 라푼젤로 옮겨지며 마지막엔 테토에게 향한다.
나 한 사람만을 믿으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플레임이라는 정령이 인간들에게 가진 감정을 알고 있기에 인간인 나를 믿어 달라는 건 무리이다.
그렇기에 나와 함께하는 정령들의 눈을 믿어 주길 바랐다.
“그 아이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상처를 입힌 인간뿐이겠지…….”
여운이 남는 한마디를 남긴 채로, 정령왕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고.
어둠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금 빛의 정령왕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바로 안내해 주마.”
자리에서 일어난 정령왕이 뚜벅뚜벅 안내를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정령궁의 지하.
딱 보기에도 두꺼운 벽과 문은 바깥에서는 내부의 상황을 전혀 확인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감옥이야?”
운디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정령왕은 애매하게 답해왔다.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부는 플레임의 심상 세계지.”
“심상 세계?”
“폭주를 스스로 막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세계에 자신을 가뒀느니라.”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었나?”
정령왕의 설명이 부족했던 탓인지 테토가 되물었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다른 감옥으로 쟤를 어떻게 막느냐.”
“들어갈 수는 있는 거야?”
문에 손을 살며시 대며 묻자 정령왕이 내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정신세계니까 라엘도 정신체로 들어가야 한다.”
“나름 비슷한 걸 한 번 해 본 적은 있어.”
저번에 우레아를 만나러 갔을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조심하거라, 저기서 죽는다고 해도 진짜로 죽는 건 아니지만, 정신이 파괴되면 산송장이 되는 거나 다름없느니라.”
“……그걸 노리는 건 아니지?”
“…….”
“대답해라?”
“아냐. 정령왕 그렇게 나쁘지 않아.”
어색한 정령왕의 답에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고, 곧이어 천천히 의식이 손을 타고 문을 넘어가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큽!”
목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치열한 열기.
심상 세계임을 감안하면 숨을 쉬지 않아도 문제는 없어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숨을 쉴 때마다 화상을 입어야 했을 것이다.
온통 불꽃뿐이었다.
타들어 가는 대지와 하늘.
악한 자가 죽으면 간다는 지옥이라는 장소가 절로 연상되는 풍경에 압도되어 버릇처럼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앞으로 향해 보지만, 불꽃이 족쇄가 되어 붙잡힌다.
‘심상 세계니까.’
자신의 심상 세계이기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걸 모를 수 없겠지.
마치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점점 과격한 열기가 파도처럼 내게로 밀려왔는데, 그 이유가 멀리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라엘 텔리즈먼.”
양 눈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
한 마디만으로도 내 몸이 제대로 서 있는 건지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사고를 마비시킨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내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플레임.”
“또다시 정령계를 파괴하기 위해 찾아온 건가.”
지독하리만치 어지러운 열기와 압박감 속에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너랑 계약하러 왔어.”
“흠!”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는 인영은 굉장히 불쾌한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나는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령왕과의 계약에 의거. 마지막 네 번째 정령은 너야, 플레임.”
“그때도 내게 그런 말을 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잊었나 보군.”
잊을 리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죽을 뻔했지.”
“운디네가 막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다.”
“운디네가 너 보고 싶어 하더라.”
운디네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들어 올리던 손을 잠깐 멈춘 플레임. 하지만 정말 잠깐일 뿐, 그의 손에선 거대한 불꽃들이 뿜어져 나왔다.
“운디네는 이 자리에 없다. 그때 끊지 못했던 목숨을 다시 거둘 시간이 되었군.”
“너희 정령들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오기 때문에 모르는 게 하나 있어.”
플레임의 불꽃이 내가 만들어낸 불꽃에 먹히며 그대로 땅에 퍼져 나간다.
깜짝 놀란 플레임을 향해 입으로 들어오는 열기를 애써 무시한 채 다시 한번 웃어 준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이기에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거야.”
신들도, 정령들도 가지지 못한 인간만의 강함.
무한하지 않기에 누구보다 치열했고, 한정적이기에 강렬하게 자신의 삶을 불태운다.
“너한테 죽을 뻔했던 때랑은 많이 다를 거야.”
“재밌군.”
“싸우려고 온 건 아닌데. 이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히만 있을 순 없어.”
플레임이 다시금 불꽃을 끌어모아 날려 온다. 이번 태양이 연상되는 구체는 분명한 적의와 살의가 담겨 있었으나.
“휘말려서 타죽지 않게 조심해, 불의 정령 씨.”
이쪽 역시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분해시킨다. 녀석이 불꽃 그 자체인 건 인정하지만 인류는 늘 불을 이용해 왔다.
“마나가 여유롭지는 않을 텐데.”
“그러면 내가 진 거로 해도 괜찮은데.”
“대화를 할 생각은 없다.”
단호한 답.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인간을 향한 적의가 이렇게까지 짙게 깔려 있을 줄이야.
운디네와 라푼젤은 인간을 좋아하는 정령들이다.
두 사람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내 입장에선 고마울 뿐.
테토는 인간에게 무관심한 정령이다.
그들이 살든, 죽든 크게 관심은 없지만, 그들의 서사.
이야기만큼은 흥미를 가지며 존중을 표한다.
그렇다면 플레임은.
인간을 극도로 증오하는 정령.
“실망했겠지.”
플레임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나 역시 입을 멈추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으면 죽여 보든가.
“길고 긴 삶을 살아오면서 인간을 향한 좌절이, 슬픔이, 또한 두려움이 갈수록 커졌을 거야.”
“웃기는 소리!”
“멈추고 싶었겠지. 인류는 불꽃을 이용하여 점점 진화했지만 그건 너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어.”
“닥쳐라!”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에 이번만큼은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피하며 땅에 손을 대자 그 열기가 팍 하고 올라오며 찌릿한 통증을 동반했다.
“너를 이용해서 가정을 태우고, 고문을 하고, 처형하는 걸 참지 못했을 거고 후회도 했겠지.”
불을 이용하여 농부의 결실이 담긴 밭을 태운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가정이 고작 방화범에 의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살이 타들어 가는 화상을 통한 고문.
마녀를 죽이는 데 이용되었다는 화형.
유일한 불꽃의 정령이었던 플레임은 후회와 후회로 점철되어 있었다.
왜냐면.
“왜냐면, 너는 누구보다 인류를 사랑한 정령이었으니까.”
“닥쳐라아아!”
대지가 흔들리며 사라지기 시작한다.
플레임의 심상 세계가 점차 변하더니 발판이 사라지고 열기가 사라진다.
심상 세계이기에.
플레임은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내 두 눈에는 분노에 점철된 정령의 과거가 펼쳐졌다.
아직 작았던 그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
늘 그들만을 바라봤고, 그들만 생각했으며, 그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물의 정령들은 비가 되어, 냇물이 되어, 바다가 되어 그들의 목을 축이며 먹거리를 주고 청결하게 만든다.
바람의 정령들은 자유분방하게도 그들의 곁에서 코를 간질이는 살랑 바람이 되어 주기도, 농작물을 한 번 훑어 주기도 한다.
땅의 정령은 그들의 쉼터가 되어 준다.
풍요롭게도 인간을 감싸 안아 주며 그들의 양식이 되어 주는 모든 수확물은 대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불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유일한 불꽃의 정령은 그렇기에 고민했고, 생각에 잠겼으며 결국 다짐했다.
자신이 직접 그들을 찾아가자고.
번개의 몸을 빌려 산불이 되었고 짐승을 태우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플레임은 유일한 불의 정령이면서 유일하게 인간에게 직접 다가간 정령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많은 정령들이 그를 비난했다.
정령은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
억지로 인간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쓰임이 되어 준 플레임을 향한 질타는 그를 혼자로 만들었으나, 플레임은 개의치 않았다.
‘인간들이 불꽃의 쓰임을 알아챘으니까.’
이제 불은 그 무엇보다 인류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불을 통해 인류는 번성하고 성장했으며 진화했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된다.
밝게 웃으며 고기를 구워 먹던 원주민들이 이제는 사람을 묶어 두고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무지하기에 잔혹했다.
죄를 지은 자들을 가장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인 화형을 통해 죽인다.
불꽃을 숭배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재물이랍시고 수백의 사람들을 산 채로 태우며.
싫어하는 사람의 집과 밭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도구를 만드는 데 불꽃을 이용했다.
불꽃의 정령은 이제,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의도치 않았으나 그에게 죽어 나간 사람들의 비명과 괴로움 그리고 고통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었고.
그건 불의 정령이 인간의 추한 면을 눈에 담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진정이 되었는지 심상 세계의 풍경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다시금 타오르는 대지 위에 불타오르는 인영이 서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그렇게 사용하는 거야!”
기억에 잠긴 플레임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다는 듯 외치고 있었으며.
불꽃의 눈물은 넘쳐흐르던 그 사랑을 대변하듯 열기에 휩싸여 사그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