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끄어엉!]
“꼴좋다.”
정령왕의 손에 붙잡힌 우레아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한 정령들.
우연찮게도 우레아를 품에 품고 있는 상태에서 정령계로 와 버린 탓에 조금 미안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쯤하고 얘기나 좀 하자.”
내 발언에 정령왕은 흘끔 쳐다보더니 왕좌에 턱을 괴고 다리를 꼬아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렇게 여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라.”
“신을 데려왔으니까?”
“잘 아는구나.”
서로 상극인 정령들과 신이었기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당했을 때 응당의 대가를 반드시 요구하겠지.
“의도하진 않았어. 정령계에 오는 걸 급하게 결정해서 우레아가 나와 함께 있는 걸 잊었을 뿐이야.”
“단순 실수로 치부하기엔 사안이 크구나.”
[끄라라라라!]
이젠 상당히 꼴사나운 비명을 질러 대는 우레아. 따로 정이 있는 건 아닌지라 아파하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나마 물의 여신이나 불꽃의 신이 아닌 게 다행이긴 하지만, 상위 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마나의 신이 정령계에 넘어왔다는 건 개전을 선언해도 부족함이 없지.”
정령들 중에 마나의 정령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의 여신과 물의 정령들처럼 같은 속성끼리는 그야말로 앙숙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정령왕의 압박이 계속되었으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높은 위치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걸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거 가지고 나한테 꼬투리 잡아서 뭐 하나 족쇄를 걸고 싶어 하는 건 알겠는데, 안 통해.”
“흐응? 내가 널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다른 의미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겠구나.”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내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까딱까딱 고개를 끄덕이며 고압적인 시선을 계속해서 내비친다.
“네가 그런 정령이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어. 게다가 우레아가 상위 신인 건 인정하지만 저건 본체가 아니라 단순 분체야.”
우레아와 연결은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고작 분체 하나 넘어온 게 정령계에 위협이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실망할 것 같은데.”
꿈틀하고 순백색 눈썹이 떨리는 정령왕. 정령계에 대한 무시나 다름없는 발언이기에 다시 되받아치려 입을 열었으나.
“아, 그만해라! 어차피 알고 있었으면서.”
옆에 있던 운디네가 버럭 짜증을 내며 외쳤고 다른 정령들도 한마디씩 거들어 주었다.
“네가 초대해서 라엘이 차원을 넘어온 건데. 넘어오면서 우레아가 있는 걸 정령왕인 네가 몰랐을 리가 없잖니.”
“세월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군.”
“너, 너희들……!”
당황해서는 방금까지 보이던 고압적이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리저리 시선을 굴려 대며 변명을 시작한다.
“협력해 줄 수 있잖느냐! 내가 뭐 라엘한테 죽을 때까지 여기 있으라고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만 더 오래 있으라고 부탁하려던 것뿐이었는데!”
[끄어어어!]
삐질거리며 고개를게임 교육 숙이곤 힐끔힐끔 나를 보는 정령왕과 그 옆에선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우레아.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공통점이 있었는데.
첫인상이 굉장히 무거웠다는 점.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가벼운 녀석들이라는 것.
“그리고 우레아 정도 되는 신이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긴 그렇잖느냐. 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또 있다고…….”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쟤는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대신, 돌아갈 때는 다시 돌려받아야겠어.”
“나도 이 변태를 정령계에 평생 두고 싶지는 않느니라.”
[빌어먹을 놈들!]
뭐 어쩌겠는가.
어린 스승에게 침소니 뭐니 꺼낸 것부터 시작해서 10살 소녀한테 추파나 던져 대고. 넌 더 아파도 싸다.
“자아, 그래서 라엘. 정령계에 와 준 이유는?”
“네가 불렀잖아.”
콧소리와 함께 살짝 들어간 애교에 인상이 팍 찌푸려진다.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하다.
“부르긴 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오진 않았겠지. 그대는 그런 남자니까.”
“…….”
괜히 오래 산 건 아니구나.
“네 용건부터 들어보고.”
한 발 물러나자 정령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튕겼고 그러자 나와 정령들 뒤에 푹신한 소파가 생긴다.
“긴 이야기가 될 거라서, 편히 앉거라.”
“우와! 이거 짱 푹신해!”
“마음에 들어, 고마워, 잘 쓸게.”
“너희들 눕지 마라.”
이것들이랑 곱게 앉을 순 없겠지.
결국 운디네는 누워서 잠들었고 라푼젤은 내게 등을 기댄 채로 하품을 했다. 테토는 엮이기 싫다며 소파 뒤에 섰다.
우레아를 옆으로 치운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신들의 압박이 더 심해졌다.”
“…….”
생각보다 심각한지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둡다.
“내 잘못인가?”
아무래도 인간계에서 정령들의 힘을 자주 빌렸다 보니 신계에서 고깝게 볼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하지만 정령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운디네가 본연의 힘을 써서 폭우를 내린 건 물과 관련된 신들 말고는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이건 진심일까 아니면 나를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일까.
순박한 그녀의 눈동자에선 진심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이전부터 신들이 다른 생각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했느니라. 정령계에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압박이 들어오고 있지.”
“흐음.”
“그래서 그 이유를 확인해 줬으면 좋겠구나. 아무래도 신들이 인간계에서 활동할 때가 많아지다 보니 정령계보다는 많은 정보가 있겠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가설이 하나 있었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기엔 아직 확실하지도 않았고 괜한 불안감만 심어 줄 수도 있었다.
“당장에 물어볼 수 있는 놈이 하나 있잖아.”
슬쩍 우레아를 바라봤으나 역으로 정령왕이 고개를 저었다.
“신들 중에 가장 한량인 놈이 뭘 알겠느냐.”
우레아는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 입만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았어. 확인해 볼게.”
내 답에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정령왕.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는 꼬마 소녀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진다.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건?”
“두 개야.”
호오 호오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령왕.
“하나는 마수왕에 대한 정보. 네가 아는 대로 전부 알려 주면 좋겠어.”
“마수왕에 관심이 있느냐? 인간이 어째서?”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하지만 오히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정령왕은 다시 물어왔다.
“정령들 입장에서는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인간들한테는 크게 문제없을 터인데?”
“…….”
“마수왕이라는 건 자아가 있는 자연재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정령계로 드나들 수 있는 거고. 하지만 마수들의 땅에서만 태어나고 인간계보다는 정령계로 진출하려는 게 특징이지.”
뭐라?
“마수왕이 나타났다 듣긴 했다. 또 한동안 고생하겠군.”
어깨가 쑤신다는 듯 톡톡 두들기며 말하는 정령왕.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움찔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정령왕의 몸에서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이래서…….’
예전에 한 번, 운디네가 정령왕한테 장가가는 거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령왕이 진짜, 진심으로 너를 좋아한다면서 깔깔거리고 웃어 댔던 기억. 아니, 애초에 나는 정령계에서 깽판 친 것밖에 없는데.
어쨌든.
그걸 극구 거절하며 심지어는 운디네를 역소환 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오랜만이군, 라엘.”
방금까지의 정령왕과는 다르게 온몸이 그림자처럼 어두운 남자.
“그래, 오랜만이다.”
정령왕은 유일한 빛의 정령이다.
또 유일한 어둠의 정령이기도 하다.
빛과 어둠은 늘 공존하니까.
그렇기에 두 정령은 실은 하나이며, 하나이지만 실은 둘이다. 이 복잡한 관계성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니까 넘어가되.
중요한 건.
“여전히 탐스러운 입술이군.”
“너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내뱉는 순간 바로 죽빵 날아간다.”
나를 좋아하는 쪽은 어둠의 정령이라는 거…….
“그래, 정을 나눌 상황은 아닌 듯하군. 마수왕이 다시 나타났다고?”
“맞아. 게다가 빛 쪽의 말과는 반대로 인간계를 습격하고 있어.”
“흐음.”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더니 굳게 닫혔던 입을 연다.
“사실 빛은 모르겠지만, 약 백 년 전 마수왕은 한 번 부활했던 적이 있다.”
“그래?”
아무래도 어둠의 정령이다 보니 마수에 관련된 건 빛 쪽보다는 훨씬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령계로 침략을 하기 위해 마수들을 모아 댔지만……. 녀석은 정령계로 오지 못하고 죽었다.”
“…….”
“3년이면 정령계로 넘어오기 시작하는데,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것도 다섯 명의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섯 인간……?”
불길한 기분이 밀려들어 온다.
어둠의 정령왕은 묵묵하게 그들에 대해 설명했다.
“악신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하나하나 무위가 놀랍도록 대단하더군. 반신의 경지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건……. 마교단장이라는 녀석들이야.”
“음? 누군지 알고 있나?”
주먹이 쥐어지며 입술을 깨문다.
애써 심호흡을 통해 진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200년의 시간을 지나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지.”
“그대는 꽤나 어려운 길을 걷고 있군.”
정령왕은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차를 권했다. 따듯한 무언가를 마시니 그나마 속이 달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수왕이 태어나는 주기는 일정하진 않으나 보통 500년 정도 시간을 둔다.”
“인간이 모를 법하군.”
“음, 게다가 그건 재앙이지만 인류가 아닌 정령을 향한 것이다. 인간이 아는 게 이상하겠군.”
괜히 위로하는 듯한 정령왕의 말투. 어색하지만 분명한 배려.
“그런 녀석이 고작 100년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인간계를 침략하는 특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지.”
“한마디로…….”
“그 다섯 인간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거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정령왕의 확답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베고 있던 운디네가 일어나고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푼젤도 기지개를 핀다.
결국엔 그 녀석들이다.
징글징글한 놈들.
“세상살이 참 편해졌어. 무슨 일만 있으면 일단 그 다섯 놈부터 확인하면 되니까.”
이러다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면 일단 마교단장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겠다.
“아주 쉬는 법이 없어, 성실한 자식들.”
괜히 가볍게 말해 보지만 투기가 불타오르는 걸 참을 수 없어 괜히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거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펠른이 습격당하고 얼마 되지 않았건만.
다시 한번 녀석들을 만날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