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 입구에 서 있던 거대한 바위가 밀리며 마을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후우!”
급하게 손을 뻗어서 마나로 붙잡아 두긴 했지만, 방금 마인화를 쓴 영향으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마수는 앞으로 치고 나와 입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화염 저항이 있는 녀석인가?”
선봉에 선 것은 루이나와 에레오나.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내가 앞에서 시선을 끌 테니까, 공격은 부탁할게.”
“저 정도 크기의 바위를 던질 정도면 근력이 상당할 거야.”
두 여인은 가볍게 의견을 주고받았고 먼저 앞으로 나선 건 루이나였다.
마수의 주먹과 창이 맞부딪치고 루이나는 생각 이상의 근력에 놀란 눈을 하였지만, 그 뒤를 바로 파고든 에레오나가 마수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하는 소리가 울려온다.
그대로 두 동강을 내겠다는 의도였으나 검은 마수의 단단한 피부에 박혀들 뿐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크흥!
오히려 비웃음을 입가에 담은 녀석의 주먹이 두 사람에게 휘둘러졌고, 애써 몸을 틀어 피했으나 어마어마한 근력의 후폭풍으로 뒤로 붕 떠 버렸다.
크후!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탕 두들기며 거침없이 도발하는 마수. 하지만 함부로 싸워서 될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두 사람도 섣불리 달려들진 못했다.
“지금 보니까 화염 내성 따위가 아니었네.”
타오르는 검은색 털과 피부.
그 화염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단 의미.
“이런 마수는 처음 보는데.”
“제국 너머에 마수들이 사는 경계지에는 상상 이상으로 강한 마수들이 있다고 듣긴 했어.”
루이나와 에레오나를 지원 온 나머지 인원들.
나 역시 흐트러진 바위를 대강 정리한 후 합류했고, 바로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레온이 만류했다.
“마수의 수준이 상당해, 좋은 훈련 거리가 될 거야.”
“그러다가 한 번 잘못 맞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게 우리의 한계겠지. 매일 너한테 의존하는 건 썩 좋은 방향성은 아니야.”
옆에서 듣던 톨레스와 텐도 고개를 끄덕였기에 결국 나는 팔짱을 끼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마치 차례를 기다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루이나가 선공을 하면 에레오나가 치고 들어온다. 그 뒤를 레온, 톨레스, 미오가 뒤따랐고 위험한 상황에선 내 옆에 있는 텐이 저격으로 서포트했다.
힘과 내구력이 워낙 뛰어나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결국 마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후우, 장난 아니네.”
“이런 마수가 얼마나 더 있는 거지?”
“우리 때는 꽤 많았어.”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몇 년 전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곤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때는 제국 내에도 마수가 다수 있었으니까.”
“기사단의 주 업무였지. 종종 감당하기 힘든 녀석들은 나랑 스승님도 같이 껴서 토벌하곤 했어.”
가장 인상적인 녀석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거대한 이무기, 에라오니무스.
정예 기사단이 대부분 투입된 건 물론이고, 나와 스승님이 마나 탈진에 이를 정도로 고된 싸움이었다.
사실 방금 전 녀석 정도는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기사단 단위로 움직이다 보니까 지금 일행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변경백의 수호기사들로는 이런 녀석 한두 마리만 나타나도 힘들 수도 있겠는데.”
중얼거림에 답하듯 라푼젤이 스르륵 나타난다.
-한 번 확인해 줄까?
“그럼 고맙지.”
-으흠.
답지 않게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눈치를 보는 라푼젤. 괜히 귀여움이 느껴져 피식 웃으며 말해 준다.
“네가 최고야.”
-눈치가 빨라서 아주 좋아.
-쓰레기! 저번엔 나한테 그래 놓고!
-나한테도 그랬다.
이거 한마디만 해 주면 좋아서는 빠딱빠딱 움직여 줘서 최근 남용했던 부작용인가.
주변에서도 썩 좋지 못한 시선에 자중해야겠다 생각했다.
* * *
“움직여라! 바로 나선다!”
묵직한 갑옷을 찬 기사들이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대거 빠져나간다.
제도는 지금 비상 상황.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마수들을 눈치챈 지금, 제도에는 최소한의 수비를 위한 병력만을 남겨 두고 각지로 퍼져 나가는 상황.
“이게 무슨 일인지.”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3황자 제라니 데 아르니티와 그를 보좌하는 마도사 페르난도도 껴 있었다.
두 사람은 제국의 주 전력 중 하나인 흑황 기사단과 함께 말을 몰고 있었다.
“볼트론 기사단장, 데오르그 단장은 어디 있지?”
방패를 꿰뚫는 검은 황소의 주인, 볼트론 기사단장은 황자의 의문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새벽별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서 이번에 저희 흑황과 동행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아무도 모르더군요.”
“음?”
“…….”
섣불리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주제임을 파악한 제라니와 페르난도가 슬며시 주변을 살피지만, 볼트론은 껄껄 웃어 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흑황은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라.’
제라니의 입장에서는 썩 믿음직한 단어는 아니었기에 무표정하게 형식적으로 고개만 끄덕였고, 페르난도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볼트론 기사단장님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시네요.”
“그렇지. 제국 제일의 호남이지 않은가.”
누군가는 통쾌한 상남자라고 부르지만, 또 누군가는 그냥 얼빠진 남자라고 일축한다.
물론, 후자들의 대부분은 볼트론의 창 앞에 서면 그 의견을 바꿔야겠지만.
“대마도사께서도 움직이셨지?”
마침 옆에 착 달라붙은 페르난도에게 묻자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스승님뿐만 아니라 마도사 전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마도사가 죽고.
7명의 마도사 중 남은 건 다섯.
다섯 번째 제자이던 페르난도 레빌로스는 졸지에 두 명의 사형을 잃어버린 꼴.
“그런데 왜 얼굴에 근심이 깔려 있지?”
“…….”
제라니 황자가 괜히 웃어 주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고 페르난도는 그의 배려에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혁명군의 그 마법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흠.”
“언제 어디서 또 저희 마도사들이 죽어 나갈지 모릅니다. 솔직히 막내를 제외하곤 썩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은 스승님의 밑에서 인정을 받고 배움을 받은 사이니까요.”
“이해하네.”
“게다가,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페르난도 레빌로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은 아마, 대마도사님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서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확신에 가깝지만, 페르난도는 대륙 마도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스승이 밀린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렇겠지.”
제라니 황자 역시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실은 걱정뿐입니다. 이번 마수들의 범람을 노려서 그 마법사가 제도를 침공하면 사실상 무혈입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황실과 황제를 지키는 친위대와 퍼지들을 관리하는 팔독 기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기사들이 마수들을 제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제1황자 젤롬 데 아르니티의 결단력은 뛰어나다면 뛰어났지만, 제국의 방비가 너무 허술해졌음을 페르난도는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라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혁명군은 어떨지 몰라도 그 마법사는 적어도 이번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예? 어떻게 확신을 하십니까?”
“설명하긴 조금 복잡하군.”
두루뭉술한 제라니의 답에 페르난도는 눈을 하늘로 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수수께끼라도 받은 기분인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순박한 시골 청년과도 같아 보였다.
“그가 움직인다면 오히려…….”
큰 결심을 하고 페르난도에게 말하려던 순간, 앞장서고 있던 볼트론이 손을 들어 올렸고 기수들은 말을 세웠다.
평야에서 이동 중이었기에 볼트론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오는 마수 무리.
제도에서 벗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저 정도 숫자가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서쪽.
제국의 서쪽 끝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기에, 물에서 활동하는 마수들이 뭍으로 나와 생각보다 빠르게 진군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군요.”
“이러면 잘라이텐 변경백은 죽었다고 봐야겠군.”
황자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볼트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남자를 불렀다.
“라마크 아데스 대장.”
“부르셨습니까.”
“너의 3부대는 황자님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한다.”
“존명.”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만…….”
과한 호위라고 생각했지만, 옆의 페르난도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황자님은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끄음.”
제국 최강의 기사단을 거론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흑황과 함께 말을 몰고 달려보고 싶었던 제라니의 입장에선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라마크가 그의 옆에 랜스를 쥐고 섰다.
“그럼 잘 부탁하네.”
“목숨을 바쳐 황자님의 호위하겠습니다.”
딱딱한 대답.
아직 지평선에서 달려오고 있는 마수들이라 시간이 조금 있었기에, 제라니는 분위기를 풀고자 라마크에게 간단한 질문을 건넸다.
“결혼은 했는가?”
그러자 방금까지 딱딱한 기사이던 그의 입가에 물감이 퍼지듯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멜이라고 이제 8살 된 사내아이가 있습니다.”
“호! 아버지가 흑황 기사단의 부대장 중 하나라니 자랑스럽겠군.”
“아직 흑황의 이름값이 거기까지 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조적인 웃음에 제라니 황자는 씩 웃어 보였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고 대화하기 편한 남자였다.
“사실 작년에 물의 신전 사건에 휘말려서 그걸 구하러 갔던 적이 있는데, 그 이후부터는 조금 다르게 봐 주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아아, 대주교의 집단 최면 사건 말이군.”
제라니 황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말람의 골짜기가 묘령의 여성에게 얼어붙은 이후, 물의 신전 측에 여신 아도리아가 아니었냐며 그 뜻의 해명을 요구.
물의 신전과 대주교는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권능을 통해 신자들을 집단으로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하여 여신 아도리아를 강림시키려 했지만, 흑황 기사단의 개입으로 막혔다.
“그 유명한 기사가 자네였군.”
당연하게도 그걸 막은 기사들은 진정한 기사도를 지켰다고 칭송을 받았지만, 라마크 아데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우연하게 그렇게 됐지요.”
“음?”
제라니 황자는 그 표정의 의미를 더 알고 싶었으나 라마크 아데스는 호위라는 명목으로 제라니의 앞에 섰고 그의 부대원들이 감싸듯 다가왔다.
“바다의 마수라, 페르난도는 회나 해산물을 좋아하나?”
“으, 전 못 먹습니다.”
“흐흐, 노력하게. 요번 전투가 끝나면 아주 질리도록 먹어야 할 테니까.”
“문어라면 한 번 먹어 본 적은 있습니다. 맛은 특이했지만, 식감이 재밌더군요.”
“문어라면 나도…….”
처음엔 태양이 다시 뜨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하고 쨍쨍하게 햇볕은 내리쬐고 있다.
그렇다면 지평선 너머의 저 둥근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입이 다물어졌지만, 그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크라켄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다른 마수들을 짓누르며 엄청난 크기로 다가오고 있는 적빛의 마수. 방벽 자체를 부수고 들어왔는지 곳곳에 잔해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대가 문어를 좋아해서 다행이군.”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퍽퍽 하고 자신의 입술을 때리는 페르난도를 보며 웃어 주고 싶었지만, 얼굴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크라켄의 압도적인 위압감은 절로 손에 땀이 맺히게 만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