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최근 내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이 조금 필요한 듯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그냥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니까 혹시 체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도 등에 느껴지는 덜컹거림에 눈을 슬며시 뜨니 처음 보는 마차의 내부.
굳이 생각을 정리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바로 떠올랐기에, 주변을 둘러보자니 내 옆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든 헤니가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엇차.”
슬며시 내 자리에 헤니를 눕히고 담요를 덮어 준다. 작은 간호사에게 감사하며 슬며시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단체로 이동하고 있는 혁명군 단원들이 보였다.
“어?”
“왜.”
마차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톰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러 댔다.
“라엘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톰에게 인상을 쓰며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핀잔을 주고 있자니, 사람들 사이에서 내 눈에 팍하고 꽂혀 들어온 한 여인.
자신의 소꿉친구 옆에서 나를 향해 손만 살짝 들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은발의 검사.
“하하.”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감동적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눈가가 촉촉해졌을 정도로 그녀의 인사는 내 안의 무언가를 울려왔다.
‘이번엔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작지만 따듯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찬란히 빛나던 금발을 쓸어 넘기며 자랑스러운 제자라 말해 주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재생되었다.
일행은 행군을 멈추고, 근처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에딘과 미오가 양팔을 잡고는 이리저리 흔들며 살아있는 거 맞냐고 확인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루이나가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지나쳤으며.
텐 님과 톨레스 님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중간에 잠에서 깬 헤니가 화들짝 놀라며 마차에서 나와 내게 달려들었으며, 테리스 선생이 몸 상태를 체크해 주는 등 일이 있었지만 결국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았다.
“고마워.”
멍하니 불을 쬐고 있는 내게 에레오나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녀 역시 무언가를 찾듯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불꽃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그녀의 감사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녀의 죽음은 내 책임이기도 했기에 감사를 받을 입장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으나.
“라엘.”
천천히 다가온 레온이 에레오나와는 반대 방향인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
레온도, 에레오나도.
주변에 둥글게 둘러앉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화두를 시작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듯한 모습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200년 전, 제국 아르니티를 지키던 대마도사 크리스티나 엘리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싶었다.
내용은 정리되지 않았고 말은 중구난방이었지만 어쨌든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제자. 200년 전의 과오를 되돌리기 위해 싸우고 있는 라엘 텔리즈먼이야.”
이제야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만, 타오르는 불길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며 내 입은 쉬지 않고 말을 뱉어 냈다.
어떤 것은 조금 부풀어져서 얘기했을 수도 있었다. 기억이 애매한 사건은 뭉뚱그려서 설명을 이어 나갔고.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시간 순서를 뒤집어서 얘기했던 것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됐던 것도 얘기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묵묵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지치거나, 피곤할 법도 한 깊은 밤이었음에도 모닥불 소리와 내 목소리만이 어두운 밤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이야기는 확실한 끝맺음을 맺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말을 멈췄고 그게 끝이었다.
야심한 시간.
각자가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분을 삼켰고.
누군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누군가는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런 와중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내 바로 옆에 앉은 레온이었다.
“충격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레온은 그리 말하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금방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숨김없이 우리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 준 건 알겠어. 모두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무언가 해답을 내거나 결정하는 건 힘들 것 같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레온이 자신의 동지들을 훑으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그만 쉬자. 다들 하루 종일 걸었잖아.”
레온의 말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텐트로 향했다.
모두가 자리를 뜨고 나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건 아니지?”
기다리고 있었는지 에레오나가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책임에서 도망치진 않아.”
펠른이 무너지며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에레오나의 희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녀 하나였고 어떻게든 신과의 계약을 통해 살려내긴 했지만,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이 모두 다치고, 상처를 받으며 절망을 하게 된 이유는 마교단장들이 ‘라엘 텔리즈먼’을 쫓아온 것이었으니까.
한마디로 내가 없었다면 이들은 지금 같은 고난의 행군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모든 원흉은 마교단장이다.
나 역시 그걸 모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상처를 입은 이들에겐 당장에 필요한 건 분을 토해 낼 원흉이었다.
그건 인간에겐 일종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에레오나는 내게 무언가 말해 주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처음 깨어났던 마차로 돌아갔다.
[내가 조금 늦었군, 라엘 텔리즈먼.]
잠을 자려 몸을 뉘었지만 잠은 오지 않는 밤.
내 머릿속에 울려오는 경박한 목소리.
“우레아.”
나와 계약을 통해 잠시 내 육체에 강림했던 우레아였다.
[자, 그럼. 잔금을 치러 주실까?]
생각 이상으로 뻔뻔하게 나와서일까, 나도 모르게 당연히 줘야 한다고 말할 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무, 뭐? 여검사를 살려 줬으니까 엘리나의 마나는 내 것이야!]
동네 개도 이것보단 더 설득력 있게 짖어 댈 텐데.
“지모신한테 쫄아서 중간에 튀어 놓고 어딜 발을 걸쳐. 줄 거 없으니까 꺼져.”
[너, 너! 불경하게 이게 무슨 짓거리야! 처음만 해도 나한테 우레아 님 하면서 고개 숙여 놓고!]
“당신한테 받을 게 있었으니까, 이젠 없거든.”
나는 슬며시 오른손에 남아 있는 미약한 황금빛의 마나를 꺼내 들었다.
에레오나를 살리기 위해 사용했지만 그 전에 우레아의 황금빛 마나가 소량 남아 있었기에 전부 사용하진 않을 수 있었다.
“결국 당신은 나를 배신하고 도망쳤어. 스승님의 마나가 없었으면 에레오나는 죽었을 거야.”
[…….]
뉘었던 몸을 벌떡 일으켜 마차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그래 놓고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굴어 대긴. 당신네 신들은 부끄러움을 알 필요가 있어.”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면 후회할 텐데?]
“해 봐.”
[뭐?]
방금까지 모닥불에서 느꼈던 감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뻔뻔하게도 하늘 위에서 관망만 하는 자칭 신이라는 작자들에게 열이 뻗쳐올랐다.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어디 한번 해 봐.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라엘 텔리즈먼!]
“내 이름 작작 불러. 화내는 것 말고 깔 패가 없으면 적당히 하고 꺼지라는 소리야.”
[네가 다루는 마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라는 걸 잊었나 봐?]
“창조주도 아니면서 창조주인 척하지 마. 너희도, 정령들도 그리고 우리도. 그냥 그곳에 있었던 거야. 셋 중 누군가가 창조한 무언가가 아니야.”
[그건 오만이야. 세계의 일부도 보지 못했으면서 진실을 깨달은 현자인 척하는구나.]
허세를 부리는 우레아에게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실은 정말로 지모신이든 아니면 다른 신이든 우리를 창조했을 수도 있겠지. 진실의 편린조차 보지 못한 내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어.”
꽈악 주먹이 쥐어졌다.
일종의 확신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당신들은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존재가 아니라는 거야.”
[…….]
우레아가 입을 다문다.
잠시의 적막. 혹시라도 그가 무언가를 행할까 천천히 몸속의 마나를 끌어모으고 있었지만, 내뱉은 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
“뭐?”
[빛의 신이랑 싸우던 것도 내가 나타나서 말려 준 거잖아.]
“내가 왜…….”
[그 여자 살리는 데 소량이긴 해도 내 권능도 일부 사용됐잖아. 게다가 내가 강림해 있는 상태였기에 네 스승의 마나를 쓸 수 있었던 거야.]
이번엔 내 쪽에서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우레아가 없는 지금, 내가 황금색의 마나를 다룰 수 없는 걸 보면 답이 명확했다.
“후우, 말해 봐.”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쫄아서 도망쳤든 어쨌든 우레아가 없었다면 에레오나를 살리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내 권능을 받을 사람을 찾아줘, 여자로.]
“…….”
질린다는 내 표정이 보였던 걸까, 우레아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 진짜! 이러기야? 안 들어줄 거면 남은 마나라도 내놓던가!]
‘투정 부리기냐.’
한숨이 잦아지는 하루구나.
“알았어, 찾아볼게. 하지만 시간을 내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좋아!]
어쩌다 우연히 만나는 정도라면 상관없겠지.
“그런데 네 권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어?”
[그거라면 문제없지.]
파직 파직하는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서 피어나는 푸른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작은 꽃 한 송이.
[이걸 늘 가지고 있어. 그러면 네 주변의 사람들을 내가 느낄 수 있고, 권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어.]
“흐음?”
꽃을 쥐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 부끄러우니까.]
순간 꽃을 꺾을 뻔한 걸 정말 간신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