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불안한 마음은 펠른의 상태를 본 순간 기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폐허였던 펠른의 반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것.
다른 일행들은 두고 우선 나와 함께 날아온 레온 역시 표정에서부터 곤혹감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피어오른 연기를 따라가니 그곳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지만, 모두의 얼굴엔 절망과 슬픔이 깊게 담겨 있었다.
“레온 님! 오셨습니까!”
헐레벌떡 뛰어오는 텐의 모습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뼈가 부러졌는지 오른손은 붕대로 묶어 고정해 뒀고 얼굴에는 검댕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뿐만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거나 기절한 상태.
하늘에서 내려온 레온과 라엘을 보며 기쁨으로 두 사람을 맞이한 게 아니라 눈물과 울컥한 감정만이 반겨 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레온이 인상을 쓰며 묻자 텐이 설명을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와서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고 지하 벙커를 그대로 무너뜨렸다는 것.
다행히도 자벨린 부대원들의 빠른 구조와 에딘의 마법으로 체육관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사망자는 없다고 한다.
멀리서 에딘이 마력 탈수 증상으로 기절한 게 보였다. 아직 제대로 다루기 힘들었을 텐데 꼬맹이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사람들을 구했다.
하지만 텐의 말 중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모였던 사람 중에는?”
내가 그리 중얼거리자 텐은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곳엔 눈을 감고 고요하게 누워 있는 은발의 여인이 있었다.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진 자벨린 부대원들은 각자의 부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인의 근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온이 앞으로 걸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는 여한이 느껴져서일까. 레온은 무릎을 꿇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맥이 뛰지 않는다.
“…….”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레온.
가장 많이 싸웠고 서로를 라이벌로 여겼지만 그만큼 서로를 소중히 여겼던 소꿉친구가 눈을 감았다.
자신의 식구들을 지키려다.
애써, 입을 땐 레온이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되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톰에게 물었다.
“누구였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톰은 입을 뗐다.
“마교단장 듄이라는 남자였다.”
그 이름이 귓가에 울린 것만으로도 나의 가슴이 쿡쿡 찔러 들어오며 몸이 무거워졌다.
결국, 아이란의 말대로 파괴의 심판자가 펠른에 도래했고 그 결과는 이것이었다.
“마교단장?”
레온도 처음 듣는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디찬 공기에 입김이 새어 나오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음을 인지했다.
“제도에서 탈출할 때 우리를 막아섰던 여자의 이름은 아이란, 마교단장이야.”
“뭐?”
“네놈은 뭘 아는 거냐?”
레온은 뜬금없는 내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고, 톰은 지극히 감정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레온, 나를 좀 도와주겠어?”
“설명부터 해.”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던 레온은 천천히 일어나 나를 노려봤다.
“제국군이 아닌 마교단장이라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너 혼자만 알고 있어.”
레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감을 느꼈다. 아마 아이란이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맴돌고 있겠지.
“그리고 그 아이란이라는 여자는 말했지, 너 하나만 부수는 거로는 만족하지 못한다고.”
그 말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자벨린 부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의 무기를 꼬나 쥐고.
“설명하세요.”
전투에는 가능하면 참전하지 않는 하트조차 어울리지 않게 검을 들어 올렸다.
“설마,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네놈 때문이냐?”
양손을 다쳐서 자신의 토마호크를 들지 못함에도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바라보는 톰.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마, 숨기고 있던 나의 정체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의 진실까지. 모든 걸 이들에게 말해야 할 시간이 온 듯했다.
너희가 이렇게 싸우고 있는 이유는, 내가 패배했기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레온, 강림을 할 수 있어?”
“말 돌리지 마!”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레온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내 목덜미를 서늘하게 노려 왔다.
“네가 누구인지, 또 마교단장이란 놈들은 누구인지. 전부 말할 때까진 어디도 갈 수 없어.”
“다 말해 줄게. 이젠, 숨길 생각도 없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건 펠른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마음도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전에,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줘. 에레오나를 위함이야.”
“뭐?”
뜻밖의 이름이 거론되자 레온은 그 진의를 읽겠다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곤 천천히 검을 내리며 답했다.
“어떻게 강림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직 그 수준이 아니야.”
옛 친우이던 펠디어스 엘 라디어트 덕분에 알아낸 강림. 빛의 신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불러내는 고위의 기술.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레온의 어깨 위에 올렸다.
“내가 도울 테니 준비해.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에레오나를 위함이…… 맞는 거야?”
“맹세하지.”
단언에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주변에선 나와 레온에게 뭐라 소리를 질러 댔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얀빛이 레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고, 몸에 힘이 빠진 듯 고개를 푹 숙인 레온은 잠시 후, 눈에서 빛을 뿜어 대며 고개를 들었다.
[오만하구나, 과거의 불청객이여.]
신의 권위가 담긴 목소리에 주변 일행들이 전부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 역시 귀에서 이명이 들려 오며 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나의 신, 우레아를 불러 주십쇼.”
[고작 그따위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른 건가.]
빛의 신은 심기가 진노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고 몸이 깡통처럼 찌그러지는 듯한 묘한 감각을 느꼈지만, 입은 쉬지 않았다.
“당신 정도의 고위 신이 아니라면 우레아가 움직이지 않을 걸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리석긴, 그대의 무지함이 오늘 이들의 명을 단축시켰구나.]
천천히 자신의 격을 개방하며 권능을 발산하려던 빛의 신. 그는 진심으로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 내가 내뱉은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당신의 이름을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무어라?]
“이제는 이름조차 빼앗긴 빛의 신이여. 당신께서 악신에게 그 이름을 빼앗겼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제가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만천하를 당신의 이름을 대고 지배하고 있는 그 악신에게서, 제가 되돌려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믿고? 지금 그대는 어떤 과업을 입에 담았는지 알지 못한다.]
“마교가 사람을 속이고, 악신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되돌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제 말은 제가 책임을 집니다.”
[그대도, 그대의 스승도 패배했다. 그대들의 패배가 이 세상을 만들었음을 인지하라. 죄인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
처음엔 고개를 숙이고 나아가려 했다.
빛의 신이 거절하면 말 그대로 끝이었으니까 최대한 비위를 맞추려 했지만.
이렇게 나오면 이쪽도 가만히 묵과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죄인이라면, 당신은 무엇입니까.”
[뭐라?]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린다.
마나를 끌어올려 신의 권능에 저항하여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자,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리게 된 이들이 나와 빛의 신을 바라본다.
[이 무슨……!]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우리의 후대가 모조리 떠받들게 되었습니다. 이건 나의 죄입니다, 이들은 나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걸 부정하진 않는다.
내가 이겼더라면, 우리가 승리했더라면, 적어도 이런 암울한 미래는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인을 자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싸웠고, 투쟁했으며, 목소리를 높여 울부짖으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
“당신들처럼, 방관하며 스스로 죄악을 입지는 않았단 말이다!”
마인화와 함께 나의 마나가 역으로 빛의 신을 옥죄인다. 그는 애써 반항해 보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신이다. 레온 한 사람 지키는 것도 벅차겠지.
[그대들의 세상이다! 인간계는 그대들의 것이란 말이다! 우리 신들에게 지켜 달라고? 종으로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남지 않았는가!]
“뻔뻔하시군요. 악신들과 함께 정령들을 몰아내고 인간계를 지배했던 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빛의 신의 권능이 나를 죽이려 하지만 애초에 진짜 신체도 아니고 미약하게 강림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저희가 악신들과 싸울 때는 그 고고한 머리를 치켜들고는 방관하며 관람하시더니 이름을 뺏기고, 수식언을 강탈당하고, 신자들을 잃으니까 이제는 손가락 빨고 구경은 못 하시겠죠.”
[감히 인간 주제에 우리를 모욕하는가!]
“감히 허세 부리지 마! 우리가 목숨을 불태우며 싸울 때,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했던 겁쟁이가!”
[네노오옴!]
쿠웅 하고 하늘에서 빛이 뿜어져 내렸다.
그 빛은 강렬하여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렸고, 나의 보호 마법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약자한테나 이런 식으로 힘을 부릴 수 있지. 지금은 상대할 수조차 없는 악신들 앞에선 고개나 깔고 있으면서 말이야!”
[빛이 너를 태우리라! 그 입을 짓이겨 주마!]
“빛의 신? 웃기고 있군.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냐? 빛과 태양의 신 라헬!”
태양왕국 라스를 지탱하던 거대한 태양.
빛과 태양의 신 라헬.
그는 지고한 최상위의 신으로, 라스 왕국의 고귀한 핏줄을 잇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권능을 넘겨준다.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도, 태양신을 섬기는 이들은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해바라기 주점의 안주인, 아도리아에게 조종당했던 멜 소년과 그의 어머니 메이.
그리고 하남 마을의 사랑이 많은 수녀, 엔돌 아나.
하지만 그러면서 내가 알아챈 건, 그들이 섬기고 있는 건 진짜 태양신인 라헬이 아니라는 것.
진짜 태양의 신 라헬은 그 이름과 수식언을 빼앗겼고 이제는 그저, 이름 없는 빛의 신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모든 걸 빼앗겨 놓고! 고작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우리 탓을 한다고?”
[네놈은 다른가? 과거에 집착하여 200년이 지난 현대까지 와서 하는 건 고작 감정에 휩쓸린 복수이지 않은가!]
“달라, 다르지! 어딜 감히 비교하려 드는 거야.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이 세상을 되돌리기 위해, 나와, 스승이 맺지 못한 끝을 맺기 위해서! 나는 싸우는 거다!”
[어리석다!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어! 필멸자여, 거대한 태산을 향해 싸움을 거는 것과 그대의 행동은 다르지 않다!]
답답해서 욕설이 뱉어질 뻔했다.
아무래도 신이라는 녀석들은 오랫동안 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굳은 듯했다.
“그러면, 너처럼 가만히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너처럼 방관만 하고 있으면 결국 찾아오는 건 파멸뿐이다! 방관은 또 다른 악에 불과해!”
[세월의 배움이 짧은 자여, 우리 신들은 너처럼 말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았고. 그들은 모두 신이 보기에 티끌만 한 업적조차 이루지 못하고 재가 되었다.]
“삶이 짧기에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간다. 너희처럼 무한한 삶을 살아오기에 모든 걸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단 이야기야.”
[…….]
“내가 보여 주마.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우레아 불러.”
그 순간, 대기 중의 모든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내 눈이 천천히 감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