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팩 차기에서 마법을 쓸 생각을 해요?”
“아! 케이크 먹고 싶었는데!”
“역시 마법사의 표본이십니다.”
뒤따르는 아이들의 거센 비난에 등쌀을 밀려 구석으로 쫓겨난다. 그런데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237번을 차겠는가.
“너희는 정말로 내가 237번 이상을 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계속 밀려나며 내가 묻자 미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에딘도 슬며시 눈을 피한다.
이 자식들이 하고 외치려던 순간, 헤니의 한마디.
“육체 강화가 가능하시니까 되지 않을까 했어요.”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다.
미미하게 강화한다면 티는 내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헤니가 똑똑하네.”
“괜히 의사 선생 밑에서 구르는 게 아니구만.”
“헤헤.”
“…….”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어서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온다. 흑일이가 로브 자락을 물고 늘어져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즐기고 있나 봐?”
“애들한테 한 소리 듣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이냐?”
접시에 음식을 들고 다가온 레온이 무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거 생각나네.”
벽에 기대어 중얼거리자 고기를 씹는 레온이 내 뒷말을 기다렸다.
“레펠리아 수용소 부수고 왔을 때, 환영회 해 줬잖아.”
그때는 다들 딱딱하게 굳어서 내 곁으로 제대로 다가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애들 쓴소리에 도망이나 다니는 꼴이라니.
하지만 레온은 주제가 불편했는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는…….”
“알아, 나한테 정을 붙이게 하려는 계획이었잖아.”
내 말에 레온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정하진 않았다.
당시의 나는 레온에게 ‘무기’가 되어 주는 정도였으니까.
무기의 위력을 눈치챈 레온이 내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내게 정을 붙이게 할 속셈으로 환영회를 벌인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조용히 레온이 중얼거렸다.
내게 말하려 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던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의 파티는 정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구속하려 했던 지극히 타산적인 계략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레온과 눈이 마주친다.
찰랑이는 미려한 금발과 마찬가지로 노란빛의 눈동자.
남자로서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호박색의 보석을 보는 것만 같은 눈동자.
“달라.”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진심임이 강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동료들을 구해 주고, 상상하지도 못할 행보를 이어 가고 있지.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계산적인 면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기분으로 레온은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두서도 없고 높낮이도 불안정했지만, 그것이 지금 그의 기분이었으며 그가 느끼는 것이었다.
원래, 사람의 감정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지 못하니까.
“이젠, 너를 없어선 안 될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어.”
에레오나도 눈치채고 있으며, 텐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앞의 작은 사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혁명군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레온 본인을 위한 것인지는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니네 애들 목숨을 구해 준 게 몇 번인데 당연히 그렇겠지.”
지금 그가 말하는 감정은 분명하게 진실된 것이었기에 나 역시 장난스레 웃으며 답해 줬다.
“하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레온은 방금까지의 자신이 싫다는 듯 몸서리치면서도 내 표정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잠시.
역시 어색했는지 후다닥 접시의 음식을 먹어치우더니 더 담기 위해서 테이블로 가려고 했지만, 저 멀리서 아직도 팩 차기 중인 렉터가 큰소리로 외쳤다.
“리더! 마지막으로 도전 한 번 어떠십니까! 에레오나 님의 237번을 깨뜨릴 분은 리더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레온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조금 당황한 레온이었지만 렉터의 옆에서 의기양양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에레오나를 보더니 접시를 내려두고 겉옷을 벗는다.
“이건 못 참지.”
“참, 이렇게 보면 애들 같기도 하고.”
내 말이 들렸는지 레온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냐고 따지는 듯한 눈초리에 어깨를 으쓱하고 모른 척한다.
둘이 라이벌 구도를 가지는 건 좋지만, 사실 신체 능력 면에서는 에레오나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다.
물론, 팩 차기 같은 건 요령이 좋으면 꼬맹이도 몇 번이든 할 수 있겠지만 레온과 에레오나의 스타트 라인은 분명하게 다르지 않겠는가.
“…….”
주요한 건 에레오나의 비웃음이 내게도 한 번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인정한다, 아주 훌륭한 도발이었다.
“진짜 못 참겠네.”
슬며시 레온의 육체에 강화 마법을 걸어 준다.
괜히 덕지덕지 붙였다가는 눈치를 챌 가능성이 있으니 동체 시력과 각력 쪽에만.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레온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당당하게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말도 안 돼!”
“무려! 300번으로 레온 님이 에레오나 님을 꺾고 최종 승자가 되십니다!”
에레오나의 비명 소리와 함께 렉터가 승자를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케이크를 빼앗긴 것에 우울해하는 자벨린 부대원들.
웃으면서 승리를 만끽하는 레온과 차마 볼 수 없다며 고개를 돌리는 에레오나.
조금만 나눠 달라고 달라붙는 루이나와 꼬맹이들.
어느새 곁으로 와서 박수로 축하해 주는 중년층.
이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머릿속에서는 옛 생각이 떠올랐다.
신년 파티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조촐하게 스승님과 둘이서 함께 보냈던 시절도 있었고 황궁에서 했던 화려한 연회도 있었다.
실은, 그때가 늘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스승님과 함께하던 때에는 스승님의 괴멸적인 음식 솜씨로 엉망이 된 만찬을 적을 해치우는 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먹었던 때도 있었고.
황궁에서 열렸던 연회는 그 격식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죄여옴과 더불어 지루함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땀내가 아직도 남아 있는 훈련장에 모여서 허름한 차림으로 조금은 부족한 음식을 먹는다. 술은 싸구려인데도 부족하여 한 사람당 제한된 양을 마실 수밖에 없다.
“나쁘지 않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 시절의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 내게 남아 있듯 이 시간도 결국엔 내게 남아 무언가가 되어 주겠지.
“뭐 하냐.”
감성적이 되어 우수에 찬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던 내 감정선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목소리.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에레오나는 불법 행위를 목격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본다.
“방금 톰이 술에 취해서 시를 읊던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어.”
“너 오늘 좀 친다?”
이게 어디서 도발하는 법을 배워 왔는지 꽤나 사람 신경 긁어 주신다.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슬쩍 몸을 튼다.
“잘 해결하고 왔어?”
처음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정확히는 에레오나가 한심한 눈으로 나를 향해 다시 되물어 주었을 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악연을 끊고 오겠다며.”
“아.”
그러고 보니 출발하기 전에 악연을 끊고 오겠다고 에레오나에게 말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끊지 못했어.”
로그니다츠를 죽이지 못했다.
아직도 그 녀석이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의 마나가 요동치지만, 그렇게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흐음.”
뭔가 생각하듯 콧소리를 내며 에레오나는 벽에 몸을 기댄다.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봤지만, 에레오나는 눈은 천장에서 빛나는 전구를 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짊어져야 할 것이야.”
패배한 내가 확실한 끝맺음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200년 후의 후손들에게 더 이상 그 짐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도 우리의 것을 함께 짊어지잖아.”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과 답이 오간다.
에레오나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아르니티 제국의 멸망과 퍼지의 자유를 소망한다.
자벨린 부대라는 독자적인 소규모 부대를 통해 목숨을 걸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결이 다른 내 일에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걸까.
잠시 고민한 나는 오소소 하고 뒷골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마다 자신이 정답에 다가왔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물감처럼 퍼져 나가는 이 느낌이 나는 정말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정답을 내밀었다.
“취했냐?”
“…….”
한순간 나 자신이 오물이 된 줄 알았다. 에레오나의 시선은 그만큼 역겨운 무언가를 보는 눈빛과 혐오감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스톤 형제를 보던 그것과 흡사했다.
“라엘, 이것 좀 먹어.”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레온이 접시에 케이크를 들고 와 주었다. 에레오나는 그걸 보곤 짜증이 나서 고개를 틀었지만, 레온은 일부러 에레오나 보라고 가져온 게 확연히 보이는 훈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격 참 더럽네.”
가벼운 감상평과 함께 나는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에 오고 단 걸 먹었던 기억이 손에 꼽는데 케이크를 한 입 넣자 황홀함이 입에 퍼져 나갔다.
200년이 지나서야 먹는 것의 즐거움을 배운 나였기에 아무리 질이 좋지 않은 케이크라고 해도 그 달콤함이 가히 중독적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입 먹고 손짓으로 헤니를 불렀고 케이크가 놓인 접시를 건네 아이들과 먹으라고 보내 주었다.
맛은 있지만 내가 먹는 것보다 아이들이 먹는 게 더 맛있게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애들은 벌써 다 줬는데.”
“뭐?”
뻘쭘한 레온의 말에 확인하니 입가에 생크림을 묻히고 웃어 재끼는 미오와 홀린 듯 케이크를 먹어 대는 에딘이 보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먹을걸.
“도와줬으니까 챙겨준 건데. 너 먹을 거 좋아하잖아.”
몸은 비쩍 말라서는 이라고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인 레온. 나도 무언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 여인의 목소리.
“도와줬다고?”
팩 차기에서 레온에게 패배한 에레오나가 고개를 들며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본다.
범인을 잡은 경비대처럼 눈을 부라리는 에레오나를 피해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도망치려던 우리였지만, 에레오나에게 손목이 딱 붙잡혔다.
“어쩐지 너 이상하게 발이 가벼워 보이더라.”
내가 눈으로 레온을 욕하고 레온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무언으로 사과하던 때에 포르쉔 국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분, 기념사진 한 장 찍으시지요.”
나이스 타이밍이라 속으로 외치며 나와 레온은 에레오나의 손을 뿌리쳤고, 녀석도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우선은 우리의 뒤를 따랐다.
낡은 사진기를 들고 있는 포르쉔과 그 앞으로 모이는 모두.
레온과 에레오나는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가장 앞자리에 섰고, 나는 자연히 뒤로 빠지려 했지만 두 사람이 나를 잡고 양옆에 세웠다.
“뭔데.”
“얘 옆에서 사진 찍고 싶지 않아.”
“쟤 옆에서 사진 찍기 싫어.”
내 말에 동시에 답한 두 사람.
이 정도면 천생연분 아닌가 싶었으나 뒷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살벌한 눈길이 양옆에서 쏘아졌다.
“잠깐, 발 밟지 마.”
“일부러 밟은 거야.”
사진기를 향해 옅게 웃으며 말하는 에레오나.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슬며시 눈을 돌렸고.
사진기의 초라한 플래시가 하루의 끝을 알렸다.
그리고 다음 날, 1874년 1월 1일.
제국에선 라디오 타워를 테러한 혁명군의 처형 일정을 온 국민에게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