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시 방으로 돌아온 에레오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파견을 나왔던 동지가 안타까운 사건으로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톨레스는 숨을 고르며 잠시 묵념으로 그녀를 기렸다.
“조용히 처리하고 나왔지만, 혹시 모르니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아.”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에레오나가 머리를 정리하며 제안했고 다들 동의했다.
검을 얻지 못한 게 된 건 아쉽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이런 대장장이에게 얻은 검은 쓰고 싶지 않다며 에레오나의 표정도 홀가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톨레스와 미오가 침입한 경로를 통해 움직였다. 경비가 많았지만 멤버가 멤버다 보니 능숙하게 벽을 넘고 탈출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어둡던 저택의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더니 암살을 당했다며 사용인들을 깨우는 비상종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
“뭐야, 벌써 발견됐어?”
에레오나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으나 이미 우리는 뒷산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동지들은 이미 떠났네. 우리만 출발하면 돼.”
그렇게 톨레스가 준비해 놓은 탈출 경로를 따라 뒷산을 넘어와, 사람들이 다 떠나 폐허가 된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가 만나기로 한 장소죠?”
“분위기가 이상하군요.”
“다들 어디 갔어?”
“…….”
톨레스와 미오가 주변을 둘러보려 했으나 에레오나가 두 사람의 어깨를 잡으며 멈춰 세운 후, 나를 불렀다.
“라엘.”
“응, 묘하네.”
감각을 활성화시켜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그러면 한순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에 조심스러웠다.
그 순간, 주변 나무와 무너진 건물 잔해들 뒤에 숨어 있단 기사들이 나타난다. 마도총이 아닌 석궁을 겨누고 있는 모습.
석궁의 화살촉 끝에는 기사들의 오러가 진득이 실려 있었다.
솟아오르는 별동별의 문양.
톨레스와 미오를 쫓던 새벽별 기사단.
그리고 그들 중심에서 무심하게 걸어 나오는 보랏빛 머리의 한 남자.
쭉 찢어진 얇은 눈으로 그는 품평을 하듯이 우리를 하나하나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벨린의 에레오나, 검객 톨레스. 흠, 거물들이 다 모여 있었군.”
“우리 동포들은 어디 있지?”
“음…….”
슬며시 자신의 검을 뽑아 든 데오르그. 여전히 검에는 눅진한 피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이 대답이었고 톨레스의 분노가 전신에 휘몰아쳤다.
그러다 뚝 하고 나에게서 시선이 멈춘 기사단장 데오르그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여진다.
“잠깐만, 너는…….”
“나를 알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묻자 더욱 확신에 찬 눈으로 검을 뽑아 든다.
“라디오 타워를 테러한 마법사!”
목소리를 듣고 바로 눈치를 챘는지 데오르그는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바로 쏜다! 생포는 필요 없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날아드는 화살들. 전부 오러가 실려 있는 위협적인 공격임이 틀림없었지만,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보호막을 쳐도 오러와 더불어 그 수가 많아서인지 뚫고 들어오지만, 이미 예상해 뒀던 피해.
아무리 오러가 담긴 화살이라 할지라도 수십 겹의 보호 마법을 전부 부술 순 없었다.
“변수투성이군.”
아무래도 뛰어난 검객인 톨레스에 대한 대비로 기사단이라도 접근전을 하지 않으려 석궁을 준비한 것 같았지만, 나라는 존재의 변수 탓에 막혀버렸다.
“별의 기사단은 검을 뽑아라! 진형을 잡고 확실하게 몰아붙여라!”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든 기사들.
그들 역시 석궁보다는 검으로 상대를 하고 싶었다는 듯 발걸음이 가볍게 진형을 이룬다.
“한 몸 같아.”
새벽별 기사단의 움직임을 본 미오는 조용히 감탄했다. 확실히 그들에게 검과 갑옷만 없었다면 무대에 선 무용수처럼 동작들이 정확히 일치했다.
만약 3황자와 바이올렛 기사단처럼 마법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해 왔었다면 그때보다 훨씬 고전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기세에서부터 느껴졌다.
톨레스와 에레오나도 검을 치켜들고 대비하지만, 사실상 기사단을 상대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크지 않았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정말 미안하지만 내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래,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촐싹거리는 기분을 애써 감춘 채로 천천히 온몸에 마나를 채워 넣었다.
심장을 기준으로 출발한 마나가 천천히 몸속에 퍼져 나간다. 문득,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온몸에서 푸른 입자가 뿜어져 나온다. 숨을 한 번 내뱉어도 그 안에서 순결한 마나가 섞여 나오는 게 정말 마나의 신 우레아라도 된 기분.
“라엘?”
에레오나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를 바라봤지만, 한 번 웃어 주고 무거운 손을 뻗었다.
지금껏 폭포를 막아 두었던 바위를 치운 것처럼 상쾌한 해방감이 밤공기와 함께 과격하게 내 머리를 때려 왔다.
마인화.
온몸이 마나로 가득 차서 마나의 역류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어느 때보다 빠릿빠릿하게 마나가 회전하고 있었다.
“그래, 얼른 나가자.”
시작은 가볍게 마력탄.
순식간에 우리의 앞에 무수한 개수의 마력탄이 만들어졌다.
기사 중 몇몇은 갑작스러운 광경에 헛숨을 들이키거나 탄식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으나, 그들은 급하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몇백 발의 탄환이 내리꽂히는 충격.
기사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으나 개중에는 서로의 오러를 합쳐 가까스로 막아 낸 자들도 있었다.
고작 한 번의 공격이었음에도 기사단은 반쯤 패배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에레오나와 톨레스 그리고 미오도 당황해서는 기사단과 나를 번갈아 볼 뿐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
그리고 모든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데오르그는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전열을 잡고 방진을 짜라! 전투는 포기한다.”
보통 머리가 굳은 지휘관이라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울 각오를 했을 텐데, 데오르그는 확실히 손익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전력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판단.
그러니 눈앞에서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는 결정을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라엘 님, 변경백의 수호기사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온다.
톨레스의 걱정 어린 충고에 나는 슬쩍 눈을 흘기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슬며시 마인화를 푼다. 다시금 구토감이 밀려왔지만 애써 입을 막아 참으며 다리를 움직인다.
지금 당장 기사단을 죽이는 건 사실 생각만큼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드는 게 문제일 뿐.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실력 있는 기사들이 방어에만 치중한 상태에서 뛰어난 지휘관이 붙어 있다.
아무리 나라도 그들을 순식간에 처리할 요술은 없었다.
도망치는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는 데오르그.
녀석의 머릿속에는 지금 다음에 나를 만났을 경우를 대처하는 수십 가지 방법이 떠오르고 있다는 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괜히 중지 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뭔가 재수 없네.”
“네가 똑똑한 척할 때면 우리도 그래.”
“난 똑똑한 척하는 게 아니라 똑똑한 거야.”
“재수 없긴.”
마음이 조금 놓였는지 에레오나와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달린다. 옆에 있던 미오가 자꾸만 뒤를 흘긋흘긋 확인하며 입을 뗀다.
“그런데 변경백의 군대가 오면 추격을 다시 시작하지 않을까요? 저희는 말도 없어서 도망치기 힘든데.”
“아니, 쫓지는 않을 거야.”
“네?”
“새벽별 기사단도 아무것도 못 하고 우리를 놔줬어. 수호기사들이 숫자가 많다 해도 추격하면 개죽음이라는 걸 알기에 데오르그가 막을 거야.”
“허허, 기사단장이 우리를 지키는 꼴이군요.”
“뭐, 명확히 하면 수호기사들을 살리는 거긴 하지만요.”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을 하염없이 달려나갔다.
* * *
다시 펠른에 도착한 우리는 대충 씻은 후, 한차례 쉰 다음 회의실에 모였다.
레온은 베이먼 영지의 동지들이 톨레스와 미오를 제외하고 모두 눈을 감았다는 것과 또다시 데오르그 장군에게 패배했다는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지팡이를 얻지는 못했네.”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레온의 옆에서 중얼거리는 루이나. 순간 무식하다고 한마디 해 줄까 싶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엔 숨기려 노력해도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괜히 한마디 해 버렸다.
“그들을 위한 눈물은 이미 흘렸잖아. 털어 내. 너희가 그러면 살아 돌아온 톨레스 님과 미오가 더 힘들어져.”
“아.”
내 말에 루이나는 탄성을 내뱉는다.
“계속해서 슬퍼하다 보면 결국 그 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혁명을 원한다면, 모두를 이끌고 있다면 네가 봐야 할 건 사자(死者)가 아닌 지금 옆에 있는 동료들이야.”
레온의 뒤에 서 있던 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금발의 리더 역시 주먹을 꼬옥 쥐며 나를 바라본다.
더 이상 잡티 없는 얼굴에 근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라는 듯 지팡이에 관한 걸 물어 온다.
“그래서 지팡이는 어떻게 할 거야?”
“어차피 그 형제가 만든 것 중에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없었어.”
검은 모르겠지만 지팡이에 관해서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장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렇기에 마나와 감응이 좋은 보석이나 광석들을 사용했던 것이겠지.
“나도 다른 대장장이를 찾아야 하나 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그에 관해서는 해 줄 말이 있었다.
“테리스 선생이 상당히 뛰어난 대장장이를 하나 알고 있더라고.”
펠른에 돌아와서 대장장이를 찾고 있다는 내 말에 테리스 선생이 강하게 추천한 남자.
제국의 기사단에게 발주를 받을 정도로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직계 제자. 게다가 나에겐 빚이 있으며 펠른의 동료 중 하나에게 마음이 있는 남자.
* * *
덜커덩 덜커덩.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거센 바람 탓에 무언가가 계속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신경이 거슬려서 몸서리치게 짜증이 샘솟았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치우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자는 벌써 수일이나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두 팔을 잃은 아버지는 식사를 어떻게 하고 계실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나갈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서.
아직도 눈을 감으면 눈물을 흘리며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던 연붉은 머리의 소녀가 떠오른다.
소녀에게 맞았던 뺨에는 이젠 따끔한 통증보다는 병에 걸린 것처럼 썩어들어 가는 고통이 저주처럼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하게 될까.
배는 고팠지만 무언가 입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아마, 여기서 이렇게 아사를 하게 되지 않을까?
자살할 용기가 없어 방에 처박힌 남자는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통통 튀면서도 부드러운 노크 소리.
아버지는 양손을 잃어서 이런 소리를 내지 못한다. 좀 더 둔탁하고 거칠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는 노크 따위 하지 않지만.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천천히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건 꿈에서도 나오는 연붉은 머리의 소녀와 그녀의 보호자인 늘 불만스럽단 표정을 짓는 의사.
“많이 야위셨네요, 로벤 씨.”
“헤……헤니.”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인 모를 이유로 죽어 버린 걸까? 생각해 보면 얼마나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먹은 거지? 인간은 얼마나 굶을 수 있더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로벤의 머릿속은 과한 정보들이 머리를 헤집듯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의 작지만 따스한 손이 뺨에 닿았을 때, 모든 저주들이 사라지듯 로벤은 소녀만을 바라봤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많이 아프셨죠?”
“아냐……. 아니야.”
그 말은 너의 것이 아니야.
네가 할 말이 아니야.
앞이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소녀의 따스한 저 얼굴을 더 담고 싶은데도.
“많은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로벤 씨가 너무 미웠고, 싫었죠. 만약 그때 선생님이 깨어나지 못하셨다면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담담하게 소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깨어나셨고, 저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계속 이어진다면 그때 그 이야기도 언젠가 먼 과거가, 추억이 되겠지요.”
슬며시 눈을 돌려 의사 선생을 바라보는 헤니. 배시시 웃으며 소녀는 천천히 로벤을 안아 주었다.
“그러니까 용서해 줄게요. 괜찮아요, 로벤 씨.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잃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여전히 두 손이 남아 있고 두 다리가 있으며 집이 있고 망치가 있으며 대장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버지도, 사랑하는 소녀도, 그녀의 보호자도 남아 있다.
무엇하나 잃은 건 없었지만 모든 걸 잃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죄…… 죄송…….”
물론, 해야 할 말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꼬옥 안아 주는 소녀의 품에서 남자는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저 울면서 계속해서 사죄했다. 하고, 하고 또 했다.
“다 끝났어?”
“눈치를 챙겨라, 멍청아.”
누더기 같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문밖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던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