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슬쩍 창문 밖을 보니 밖에는 짙은 어둠이 깔렸다. 제도에는 이맘때가 되면 가로등이 켜지면서 나름의 운치가 있었는데, 땅끝마을은 달과 별뿐이었다.
“뭐, 이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으니까 좋아.”
후릅 하고 코코아를 마시며 밖을 보고 있자니 덜컹하고 문이 열리며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에레오나가 들어온다.
레온과 다퉜을 때보다 훨씬 짜증이나 보이는 게, 자칫 잘못해서 심기를 거스르면 그대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코코아 마실래?”
조심스럽게 잔을 건네자 그녀는 그대로 벌컥벌컥 마셔 버린다. 아직 뜨거울 텐데도 아무렇지 않아 하며 잔을 내게 다시 돌려준다.
“좀 더 줘.”
맛있었구나.
평소였다면 똥 씹은 표정으로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공손히 받아들고 메이드가 준비해 준 코코아 가루 통을 연다.
“쓰레기 같은 것들!”
결국 참지 못하고 발로 벽을 쾅 하고 걷어차는 에레오나.
“밖에서 들릴라…….”
조심스레 말하자 에레오나는 나를 힐끗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날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어버이오이어!
‘죽여 버리고 싶다고.’
팡팡팡 침대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
방 안에 다시금 코코아 향이 퍼지자 에레오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내게 다가와 머그컵을 받아 갔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이번엔 천천히 코코아를 마시기 시작한 에레오나. 점차 진정이 되기 시작한 그녀에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도대체 그놈들이 뭐라고 했는데?”
“…….”
잠시 고민하던 에레오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남자친구인 내가 바로 옆에 있으니 노골적인 제안은 하지 못했겠지만, 분명 속이 구린 무언가를 얘기한 건 분명하다.
“얼른 도둑놈들이나 잡자고.”
우리가 스톤 형제의 저택에서 이 시간까지 있으며 숙소까지 제공받은 이유는 단 하나.
최근 땅끝마을에 나타난 도둑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에레오나의 검 제작비용을 대신하기로 한 것.
땅끝마을에 도둑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스톤 형제를 노릴 게 뻔했기에 최근 경비도 늘렸다고 하지만, 잡지를 못했다고 한다.
에레오나가 화를 가라앉히던 와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조차 거슬렸는지 에레오나의 눈썹이 꿈틀거린 걸 보고 나는 후다닥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서 있는 메이드.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작은 상자를 하나 내게 건넸다.
“이게 뭐죠?”
“주인님들께서 필요하실 것 같다고 하셔서 가져왔습니다.”
“네?”
“그럼,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며 나간 메이드. 나는 에레오나가 보지 못하게 슬쩍 상자를 열었는데 안에 있는 건 피임 도구.
화르륵 하고 불꽃과 함께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진다. 괜히 이런 걸 보였다가 에레오나가 진짜로 날뛰면 끝이다.
“무슨 일이야?”
“별거 아냐.”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자 에레오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걱정스레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주목적인 지팡이는 어떻게 할 거야?”
“음?”
“내가 검 말고 지팡이로 해 달라고 하니까 그럴 순 없다고 하던데.”
괜히 나를 방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에레오나는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지만, 웃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생각보다 썩 뛰어난 장인은 아니었어.”
솔직히 지팡이들을 보고 실망한 기색을 숨기느라 힘들었다. 최소한 극독의 숑이 쓰던 지팡이보다는 뛰어나길 바랐는데 딱 그 수준.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이나 200년 전 내가 사용하던 지팡이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는 너는. 무기는 마음에 들어?”
“솔직히 정말 마음에 들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레오나.
“검에 관해서는 정말 수준급의 장인들이야.”
그 말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그럼 도둑놈 잡고 끝내면 되겠네.”
“오늘 잡자. 이 저택에는 조금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아.”
에레오나가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살짝 열고 바깥바람을 쐬며 뜨거운 머리를 식히는 때에.
펼쳐 놓은 마나의 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벼운 발놀림.
남성과 작은 아이.
발걸음부터가 숙련된 고수라는 게 바로 느껴지는 실력자. 2층의 창문을 타고 저택에 들어오려 한다.
“에레오나, 일어나.”
내 말에 에레오나는 곧바로 벽에 기대어 둔 검을 챙기더니 나와 함께 복도로 나왔고.
마침 2층 창문을 넘어오는 도둑들이 보였다.
“운이 없네.”
내가 웃으며 포박용 그물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에레오나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
검은 인영의 남자 역시 검을 뽑아 들고 응수했는데, 예상외로 에레오나와 몇 합이나 겨루었다.
설마 도둑 주제에 에레오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 에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고 저쪽도 무언가 생각한 바가 있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만.”
에레오나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 이상함을 느낀 나는 푸른빛을 띄워 상대에게 보냈고.
“톨레스 님?”
“두 분!”
흰머리가 지긋한 검객 톨레스 트레이먼과 탁한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 미오.
“라엘?”
당황했으나 3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하게 두 사람을 우리 방으로 숨겼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스톤 형제가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도둑을 잡은 겁니까?”
“아뇨, 음. 그러니까…….”
에레오나가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톨레스와 미오의 등장으로 사고가 얼었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에레오나를 뒤로 밀며 내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조금 그, 사랑이 깊었나 보네요.”
내 말을 두 사람은 금세 알아먹었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힘이 좋으십니다.”
“허허.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둑을 잡아야 할 손님들의 예의 없는 행동에도 그들은 오히려 바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부추기곤 위층으로 올라갔다.
에레오나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나도 흘깃 노려봤으나, 어깨를 으쓱하며 넘기곤 방으로 들어갔다.
톨레스와 미오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랐습니다, 톨레스 님.”
“라엘 님, 에레오나 님. 참으로 기이하게도 만나 버렸군요.”
“오랜만이에요!”
허탈하게 수염을 매만지는 톨레스와 반갑다며 웃어 주는 미오.
“어째서 이곳에 계신 겁니까? 베이먼 영지에서 퍼지들을 탈출시키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루이나와 에딘이 타란 성에서 퍼지들을 탈출시키고 있었다면, 두 사람은 베이먼 영지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베이먼 영지는 땅끝마을과 거리가 가까운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사실은, 상황이 썩 좋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
그 뒤, 톨레스가 설명해 준 이야기는 느슨했던 긴장감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베이먼 영지에 기사단이 왔다는 것.
그것도 1년 전, 사자 혁명군을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새벽별 기사단의 단장 데오르그.
“데오르그 단장이 베이먼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저희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거나,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수용소에 있던 탓에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그의 수완에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렇게 데오르그의 압박이 거세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펠른에 사자를 보내어 베이먼 영지가 위험하다 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새벽별 기사단이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톨레스가 노련하게 눈치챈 것.
자신들을 잡을 수 있음에도 잡지 않았고, 본거지이자 레온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느슨하게 풀어 뒀다는 걸 눈치챈 톨레스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고 이곳 땅끝마을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 저택에는 왜 숨어드신 겁니까?”
“실은 땅끝마을에도 우리 단원이 숨어 있었습니다.”
레온이 말해 주지 않은 걸 보면 톨레스의 독단적인 지시였던 듯하다.
“그런데 그 여인과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정보를 위해 이 저택의 시녀로 숨어들었다는 정보까지는 받았지만, 그 이후 연락이 끊겼죠.”
“그래서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곳에 들르신 거군요.”
“동료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크흠 하고 기침하는 톨레스와 나랑 에레오나의 눈치를 살살 보는 미오.
“그런데 두 분은 여기 왜 계신 건가요?”
조심스레 묻는 미오에게 우리 역시 간단한 사정을 설명해 줬다.
“지팡이. 확실히 이 저택의 형제가 빼어난 대장장이라고 듣긴 했습니다.”
“지금은 망치를 놓은 지 꽤 된 것 같지만요.”
어쨌든 이러면 또 골치가 아파진다.
이 저택에 많은 메이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단원이 우리를 봤으면 당연히 접촉을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
“하녀들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온 건데, 오늘 하루 저택에 계셨던 두 분이 못 봤다면 확인할 길이 없군요.”
톨레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천장에 눈을 뒀다.
“저 두 형제라면 뭔가를 알겠지.”
에레오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쓴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장 쳐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순 없어. 여기 경비들 숫자가 상당해서. 자칫 소란을 일으켰다간 변경백의 수호기사들이 들이닥칠 거야.”
내 말에 톨레스도 덧붙인다.
“맞습니다. 게다가 새벽별 기사단도 벌써 땅끝마을 근처까지 와 있을 겁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죠.”
“끄응, 어떡하죠?”
미오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에레오나는 결국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 볼게.”
* * *
똑똑 하는 소리에 깜빡 잠들었던 스톤 형제 중 동생인 커터 스톤이 눈을 떴다.
주변을 보니 이미 한참을 즐겼던 메이드들은 자리에 없고, 자신과 형만이 각자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같은 방에서 서로 즐기고 파트너를 바꾸는 것. 두 형제의 특이 성벽이 만들어 낸 괴팍한 행위의 결과물이 지금 상태였다.
커터 스톤은 잔뜩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에레오나라는 여인을 본 이후로 다른 메이드를 안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운 은발을 탐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더해졌다.
그렇게 문을 열었고.
커터 스톤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형제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저택의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은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던 것.
“안녕하세요.”
에레오나는 고개를 숙여 머리로 표정을 가리며 인사했다.
“밤이 너무 늦었지만, 아직 깨 있으실 것 같아 잠시 방문 드렸어요.”
“들어, 들어오시죠.”
맥 스톤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눈을 비비다 에레오나를 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제안해 주셨던 거 있잖아요. 일주일만 집에서 메이드로 일하면 지팡이도 만들어 주신다고.”
그 말에 두 사람은 딱따구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둘은 여색에 홀린 짐승이 되어 침이나 흘려 댈 뿐이었다.
“수락하러 왔어요.”
“좋죠!”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애인분 생각하셔야죠.”
이렇게 상황이 좋아질 줄이야.
원래의 계획은 도둑을 잡느라 시간을 쓰는 동안 수를 부려서 남자친구인 비쩍 마른 마법사한테서 그녀를 빼앗으려 했다.
만약 도둑을 잡으면 검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명목으로 붙잡아 두려 했다.
연인이 뜨겁게 불탈수록 두 형제의 이상성욕도 뜨겁게 불타올랐으니까.
그런데 넝쿨째로 호박이 들어올 줄이야.
둘이 천천히 에레오나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런데 다른 메이드들도 이런 일을 하나요?”
“아아! 물론! 우리 집의 메이드는 다 우리 거야.”
당돌한 커터 스톤의 대답에 에레오나는 다시 한마디를 더 내뱉는다.
“그럼 거절한 메이드는요?”
여기서 거절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두 형제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다 들어온 떡을 놓칠 생각이 없던 형제는 거칠게 에레오나의 어깨를 낚아챘다.
“우리 저택에서 우리를 거절해? 그럼 뒤져야지!”
“그렇구나.”
순간, 에레오나를 낚아챘던 두 사람의 팔이 돌아간다.
뿌드득 뿌드득.
기이한 뼈 소리와 함께 둘은 비명을 질러 댔지만, 이게 웬걸.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정말 2층에서 3층으로 사일런스 마법을 쓸 수 있구나.”
그렇군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레오나.
마법임을 눈치챈 두 사람은 곧장 문으로 달려나갔지만, 에레오나의 발차기와 주먹이 둘의 안면에 정타로 꽂혀 들어간다.
분명 넘어지면서 뒤에 있던 의자가 부서졌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이 상황이 되려 공포를 자극했다.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에레오나는 분노에 차서 되려 차가워진 눈동자로 짐승들을 노려봤다.
“돼지들 잡기에 딱 좋은 검이야.”
그녀의 은발이 비치며 검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