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허억, 허억.”
먹은 게 없던 덕분에 헛구역질만 해 댔지만 그래도 속이 개운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몸이 제대로 받질 못하네.”
하지만 익숙해지면 마나의 역류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나만의 기술이 생긴 기분이 들어 뭔가 기분이 묘하면서도 조금 들떠 버렸다.
이름은 뭐로 정하지?
‘너는 작명에는 센스가 없다. 남한테 부탁하거나 그냥 무난한 거로 해라.’
갑자기 예전 스승님이 내게 해 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동굴에 살던 동안에는 이런 적이 자주 있었는데, 밖으로 나오며 고쳐진 줄 알았건만.
“다시 동굴로 돌아오니까 그런 건가.”
이 동굴에서 나는 혼자 살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스승님과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으니까.
“흠, 마나로 몸을 채우니까 그냥 마인화 정도로 생각해 둘까.”
뭔가 마왕이 되는 느낌이지만 나름 입에 착 감기고 강해지는 기분이라 마음에 들었다.
대충 몸을 추스른 후, 바깥으로 향했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니 여러 가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각나기 시작했고, 굳이 동굴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하루에서 이틀 정도만 있을 생각이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마인화의 수련은 계속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떠올랐다.
마인화에 도움을 주는 건 물론이고, 마인화가 없이도 마나의 역류를 제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지팡이.
“생각해 보니 지팡이 없이 오래도 있었네.”
예전에 사용하던 지팡이는 어떻게 됐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마교단장들과의 전투 도중 잃어버렸는데.
“다시 찾을 수는 없겠지.”
당시 스승님이 소개해 주신 지팡이 제작의 장인에게 직접 오더해서 만든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는데.
“지팡이를 만드는 사람부터 찾아봐야겠네.”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니 마법사가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보니 지팡이 장인들도 찾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원하는 수준의 지팡이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조금 들었다. 대마도사인 알로이스가 들고 있던 거목과도 같은 지팡이를 만든 장인을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지팡이는 예전 장인들이 만들던 기술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으니까.
마법이 발전하지 못했어도 지팡이 제작에 있어서는 장인들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럼 일단 펠른으로 돌아가야겠네.”
아무래도 그쪽에서 정보를 얻는 게 훨씬 편할 테니까. 혁명군이니 장인들에 대해 아는 것도 많겠지.
동굴에서 필요한 것들을 적당히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온다.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보며 손목시계를 보니 21시.
몸도 찌뿌둥하겠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좀 걸을 생각이었는데 밤공기 덕에 상쾌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생각보다 엄청 금방 돌아왔네.”
아침에 일어나서 훈련을 끝마치고 씻었는지 복도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던 레온이 나를 보며 허탈하게 말했다.
“필요한 게 있어서.”
“필요한 거?”
“지팡이 만드는 장인 알아?
“아, 그러고 보니 너는 지팡이가 없구나.”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온 루이나와 눈으로 인사한다. 루이나는 뭔가 떠오른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음? 방에 지팡이 하나 있던데?”
“그거 숑이 쓰던 거야. 버리기엔 아까워서 가지고 있긴 했지……. 잠깐, 내 방에 들어갔어?”
“…….”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루이나를 노려보자 그녀는 후다닥 도망가 버린다. 쫓을까 고민하다가도 괜히 힘 빼기 싫어 포기하고 고민 중인 레온을 쳐다본다.
“우리한테 마법사가 없다 보니 지팡이 장인은 잘 모르는데.”
“하아, 그래?”
“그것보다 가방 어때? 편하지?”
“음? 어, 좋더라.”
“시계가 더 좋을걸?”
뒤에서 등장한 에레오나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에레오나의 말에 레온 역시 나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무언의 압박.
가방을 선물한 레온과 손목시계를 선물한 에레오나.
뭐가 더 좋은지 말하라는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왔다.
“그런데 옷 좀 사 주면 안 되냐? 나 매일 같은 것만 입어.”
“허.”
“참나.”
레온과 에레오나가 허탈하게 웃더니 역으로 나를 향해 쏘아붙인다.
“그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누덕누덕한 그런 분위기가 라엘 특유의 취향인 줄 알았는데.”
“위장을 위한 거 아니야? 우리 애들도 종종 몸에 진흙 바를 때 있어. 거리에 나도는 거지로 위장한 거지?”
“이것들이…….”
보면 이것들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 사이가 좋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제니아가 네 옷 청구서라면서 영수증을 보내 왔는데…….”
기억났다는 레온의 말에 나는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와, 그걸 진짜로 청구했어? 돈 많이 벌면서.”
“사치는 좋지 않아. 혁명군은 재정적으로 늘 부족하니까.”
“혼자서 유명 가수랑 옷이나 쇼핑하고 다니고. 철이 없네.”
“이러고 다니는데 나한테 사치를 부린다고 하는 거냐?”
로브를 펼쳐 내 꼴을 보이자 결국 레온과 에레오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수건을 목에 걸치며 레온이 에레오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는 지팡이 장인 있어?”
“지팡이 만들게?”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묻는 에레오나에게 그렇다고 답하자 잠시 고민하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도검 장인이라면 아는 사람이 몇 있지만, 지팡이는 잘 모르겠네.”
“그렇겠지. 너희한테 지팡이는 회초리나 몽둥이 정도니까.”
“이걸 무식하다고 돌려서 까네.”
“아는 사람을 알긴 하는데 짜증 나서 말 안 할래.”
에레오나의 말에 나는 목덜미를 긁적인다.
“그걸 먼저 말했으면 좋았잖아.”
“어떤 반응을 보이나 궁금했거든.”
피식하고 미소를 걸며 에레오나는 말한 사람은 나도 아는 여인이었다.
“소니아 님이라면 아시겠지. 그분도 자신의 지팡이가 있으시니까.”
“아, 그러게. 소니아 님을 까먹고 있었네.”
레온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 소니아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청색횃불 혁명군까지 지팡이 장인 소개받으러 가기엔 거리가 좀 있는데.
“걱정하지 마. 저번에 만났을 때, 마나 통신구를 받아 놨거든.”
저번 타란 마을 사건을 기점으로 이제 다른 혁명군과도 교류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레온의 업무실로 향해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거 네가 쓸 수 있는 거야?”
권능을 다루는 레온이었기에 마나를 이용한 수정구를 이용할 수는 없어서 묻자, 옆에서 에레오나도 레온을 바라본다.
“우리 쪽에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건 너나 에딘밖에 없으니까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지.”
한마디로 소니아 쪽에서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구만.
“흐음.”
수정구를 쥐고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자니 대충 원리가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예전엔 이런 도구는 없었는데, 확실히 마법은 발전하지 못했어도 기술은 발전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마나를 넣으면 저쪽에 신호가 갈 거야.”
“어느 정도를 넣어야 하려나?”
막상 넣으려니 조금 긴장이 되어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당연히 어깨만 으쓱할 뿐 대답해 주진 못한다.
둘은 마나를 다룰 줄 모르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힘껏 마나를 주입하자 잠시 후, 수정구에서 소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악! 그만! 그마아아안!]
그것도 꽤나 히스테릭한 소리를 질러 대며.
[레온! 도대체 뭐니?]
“안녕.”
[라엘 텔리즈먼?]
나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뜬다. 잠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천천히 얼굴이 풀어진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네.]
“걱정해 준 거야?”
[목숨을 살려 준 사람이니까. 감사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어.]
소니아는 천천히 일어나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자신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청색횃불 혁명군의 수장, 소니아 에델라이. 타란 마을에서 한 번, 3황자의 추격에서 한 번. 총 두 번을 구해 준 당신에게 내 모든 마나를 담아 맹세하지.]
“…….”
[적어도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갑자기 치고 들어와서 당황스럽지만 어쨌든 감사를 느끼고 있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그런데 다시 자리에 앉은 소니아는 갑자기 투덜댄다.
[그렇구나. 당신이 했으니까 그런 소리가 울린 거야.]
“소리?”
나뿐만 아니라 레온과 에레오나도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묻자 소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이 수정구는 담은 마력만큼 반대편에서 울리는 소리가 커져.]
“…….”
소니아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뒤통수로 옮겨지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농담이 아니라 우리 주둔지가 떠나가라 울려 댔어. 자칫 잘못했으면 제국군한테 들렸을 정도로.]
“그렇게 과하게 투자하진 않았는데…….”
[주둔지 꼬맹이들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야. 지금 다들 제국군에서 습격해 왔다고 수비 진형을 갖추고 있어.]
내 나름 변명을 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걸 알기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당신이 사용하는 지팡이를 한 번 보여 주겠어?”
[지팡이?]
처음엔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금세 “아.” 하고 눈치를 챘는지 품에서 팔뚝만 한 길이의 푸른색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뭐야, 나무로 만든 게 아니잖아?”
[청염석이랑 미스릴을 섞어서 만든 거야. 상당히 귀한 물건이지.]
우리 시대에서 장인들은 지팡이를 나무로만 만들었는데. 이건 또 신비하다면 신비했다.
[라엘도 지팡이가 필요한 거지?]
“어, 그 지팡이 만든 장인이 혹시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혹시 친하면 연락이라도 같이 넣어 주면 더 좋고. 라고 덧붙이자 소니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 * *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멍하니 말을 몰고 있자니 옆에서 에레오나가 육포를 건네 왔다.
받아든 육포를 곧장 입으로 넣고 질겅거리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입에 육포를 문 에레오나가 물어왔다.
“어떤 지팡이를 만들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생각해 둔 건 있지만 지팡이 제작 기술이 워낙 발전했다 보니 장인을 직접 만나 상담을 좀 받을 생각이었던지라.
“말해도 모르잖아.”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자 에레오나가 던진 육포가 그대로 이마를 쳤다.
이게 생각보다 아팠는데 혹시 혹이 난 게 아닌가 이마를 확인할 정도. 괜히 혁명군 제일의 검이 아니었다.
“그러는 너는?”
이번엔 내 물음에 에레오나는 슬며시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답했다.
“동방에서 쓰는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야.”
“동방의 검?”
에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대강 모양을 설명한다.
“지금처럼 양날이 아닌 외날 검. 두껍지 않고 얇아서 속도를 중시하는 검이지.”
“그런 건 어떻게 아냐?”
나도 모르는 지식을 에레오나가 알고 있을 줄이야.
“내가 사용하는 검술은 원래 동방 쪽에서 사용하던 검술이니까. 그래서 지금 검으로는 그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게 제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인가 에레오나와 검으로 대련을 했던 입장으로서는 거짓말이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마법이 주였던 제국과는 다르게 동방은 검과 창 같은 무술이 주류를 이뤘으니까. 그쪽에선 칼이 마법을 이긴다고 하더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긴 했지만, 그쪽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라며 스승님이 일갈했던 기억이 난다.
“아, 도착했다.”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변경의 땅끝마을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