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러니까 내일 옷이라도 사러 가자.”
“……예.”
“혹시 좋아하는 음식은 있니?”
“초코 쿠키, 좋아해요.”
잔잔한 대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본다. 노아를 눕혀뒀던 침대에 어느새 내가 누워 있다는 걸 깨닫고 일어나니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깨셨군요!”
“…….”
“오래 잤나요?”
“3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어요.”
나도 모르게 잠들 정도로 피곤했는데 그것치곤 금방 일어났다. 물론, 잠든 것 자체가 좀 그렇지만.
“배고프시죠? 스튜 다시 데울게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카밀라가 가져온 그릇을 어색하게 받아들고 식탁에 앉는다. 야채와 고기 건더기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요리를 상당히 잘하시네요?”
“후후, 자취를 하니까요.”
국자를 들고 팔짱을 낀 카밀라가 자신감 있게 웃어 보였다.
긴 검은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던 전과 다르게 머리띠를 사용해 이마를 드러낸 모습. 그녀가 확실히 밝아진 게 느껴졌다.
“저기…….”
쭈뼛쭈뼛 내게 다가온 노아가 넙죽 엎드렸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가만히 녀석을 보다가 가볍게 답했다.
“고마워할 거 없어. 그리고 부담스러우니까 일어나.”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다 도로 들어갔다. 말해도 소년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몸은 좀 어떠니?”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몸에 새겨진 각인을 보는 노아에게 나는 스튜를 한 입 떠먹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녀석들의 신전을 부술 때 그 의식에 사용되는 제단도 같이 부쉈어.”
“아…….”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 양 담담하게 말했지만, 노아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양손으로 자연히 시선이 옮겨졌고 손바닥으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드디어.”
환희와 자유가 섞인 어린 소년의 쉰 목소리에 나도 카밀라도 조용히 소년을 바라봐 주었다.
“감사, 합니다.”
먹먹해진 목소리에선 저 나이 때의 소년에게서 있을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기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똑똑.
감동적인 분위기를 깨는 노크 소리.
노아는 위협받은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숨었고, 나 역시 슬쩍 몸을 뒤로 빼서 문에서 안 보이게 했다.
“누구세요?”
카밀라가 우리를 한번 슬쩍 보곤 문을 열자 들리는 목소리는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의 것.
“안녕하세요, 관리인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 지구에서 1등급 마나 경보가 울렸다고 해서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1등급 마나 경보요?”
분명 보이진 않는데 왜인지 카밀라가 나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예. 근데 저희 지구뿐만 아니라 옆에 세인트 구랑 팔레스 구에서도 울렸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고 끼익 하는 의자 소리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온 나는 다시 스튜를 입에 넣으려 했으나, 카밀라가 선수를 쳤다.
“라엘 님?”
“…….”
“맞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남 마을에서 제도까지 날아왔고 노아에게 심어놓은 표적 마법을 이용해서 장소를 특정 후, 렐의 신전을 급습했다.
신전을 찾기 위해 저공 비행을 했고, 그게 몇 번 제도의 마나 탐지기에 걸린 듯했다.
“제도에 오래 있으면 안 되겠군요.”
“내일 동전을 주시는 것도 제가 제도 밖으로 나갈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튜 그릇을 싹싹 긁어먹으니 카밀라가 웃으며 한 그릇 더 떠서 주었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너는 안 먹니?”
“세 그릇 먹었어요.”
“먹성이 좋네.”
멀뚱히 서서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노아의 시선이 슬슬 부담스러워서 거북할 때쯤 다시 울리는 노크 소리.
혹시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노아를 데리고 이 집으로 들어오던 걸 누가 본 건가?
여러 추측을 하며 나와 노아는 다시 숨었고 카밀라는 방금 전보다 긴장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으나.
“카밀라! 아무래도 근처에 라엘 오빠가 온 것 같아!”
연분홍빛 머리의 유명 가수, 제니아가 방으로 치고 들어왔고 그대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라?”
“……오랜만.”
빵모자에 알 없는 안경이라는 변장 도구가 이전과 똑같은 게 진부하게 느껴졌으나, 생각해 보니 내가 라만 아인으로 변장할 때는 머리를 올리고 안경 쓰니 뭐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뭐야? 여기 있잖아?”
왜인지 과할 정도로 발랄하게 반겨주는 그녀에게 어색함을 느꼈지만, 카밀라가 뒤에서 못 말린다는 듯 웃는 걸 보니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라디오 타워에서 오빠를 봤거든요.”
아, 그거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축하 무대를 빛내 주던 제니아의 노랫소리가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잔잔히 귀를 간질였던 기억이 난다.
“황족들에 기사단, 대마도사까지 있는데도 난리를 치고 가는 건 정말 대단했어요.”
“난리를 쳤다기보다는…….”
“그 깡! 존경합니다!”
엄지를 척 추켜세우는 제니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인지 호들갑스러웠지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끌어올려 주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
숨어 있던 노아를 발견한 제니아가 갸웃거리며 물었으나 카밀라는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제니아가 울먹이며 거실로 나왔다.
과한 배려는 되려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생각한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하지만, 슬쩍슬쩍 노아의 눈치를 살피는 게 인상적이라 카밀라에게 조용히 물었다.
“뭐라고 설명했어요?”
카밀라와 다르게 제니아는 나의 정체나 마교단장들에 대한 건 모르니까.
“제 사촌 동생인데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이제부터 여기에 같이 살게 됐다고 말했어요.”
“…….”
찡긋하고 눈웃음을 치는 카밀라의 모습에서 이상한 믿음이 심어졌다.
“그런데 애 옷이 좀……. 혹시 카밀라 취향인가?”
“아니야!”
딱 달라붙는 재질인 데다 나시처럼 양옆이 뚫려서 양어깨에 옆구리가 훤히 보였다.
“애 옷 좀 사러 가야겠다, 누구 씨처럼.”
“크흠.”
자기가 산 옷은 어디다 버려 두고 그런 누더기 로브나 입고 있냐는 듯한 눈초리에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펠른에 있는 내 방에 개어 두긴 했는데, 로브만큼 편하질 않아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몸에 이건 또 뭐야?”
“…….”
몸에 새겨진 각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보는 제니아. 노아는 보이기 싫다는 듯 내 뒤로 숨었지만 제니아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흠, 어린 시절의 치기.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해석이 참 편하네.”
“하하…….”
설마 저렇게 봐 줄 줄은 몰랐는데 이게 연예인의 그릇인가 했고, 카밀라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둘이 많이 친해진 것 같네요?”
“그 사건 이후 같이 경비대에 몇 번 조사를 받았는데 그러면서 밥도 같이 먹고 카페도 가다 보니…….”
“함께 고난을 극복한 동지로서의 유대감도 한몫했죠.”
카밀라와 제니아가 설마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들어 보니 당시 피해자이던 꼬마 멜과 어머니인 메이도 가끔 본다고 한다.
시간상으론 두 달 정도 지난 것뿐인데 체감상으로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물의 신전 사건.
배도 부르고 몸도 나쁘지 않아져 천천히 일어나 로브를 고쳐 둘렀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어디 가요?”
“…….”
두 여인과 한 소년의 눈동자가 내게로 꽂혀 든다. 나 역시 따스한 이 공간이 싫지는 않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카밀라, 아까 말한 장소에서 내일 뵙시다. 노아도 데려와 주시길 바랍니다. 같이 갈 곳이 있어요.”
“예, 알았어요.”
대답을 들은 후,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가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다.
“걱정할 거 없다.”
“……네.”
무슨 의미였는지 소년도 알아챘는지 주먹을 쥐고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그대로 하늘을 날아 제도 밖으로 향했고.
“어이쿠.”
밑에선 마나 탐지기가 울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라.
* * *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바위가 굴러간다.
처음 눈을 떴던 동굴. 당시엔 이 앞에서 공사를 한다고 했었는데, 중지됐는지 공사 장비들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뭐, 다행이지.’
바위가 굴러가니 익숙한 동굴 내부가 보인다. 밖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내부의 공기가 탁해진 느낌.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고 빛을 밝힌다.
여기저기 마법을 연습했던 흔적들이 옛 기억을 하나둘 떠오르게 해 준다.
“그때는 진짜 파이엔 죽여 버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다시 나오면 마교를 몰아내고 제국을 구하는 건 순식간이라고 자신만만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방해가 많았다.
그건 외적인 것도 물론 있었지만. 내적인 부분도 있었다.
오늘은 200년 전 제국 동전을 챙기기 위함도 있었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도 있었다.
훈련장과 도서관 그리고 생활하던 공간을 지나 가장 깊은 장소. 펼쳐 놓은 결계를 확인하고 걸음을 더 옮기자 보이는 건 작은 비석.
비석에는 ‘세계 제일의 마법사 이곳에 잠들다’라는 센스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지만, 마법만 배우고 연마해 온 나한테 글재주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합장을 하며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몸을 돌려 훈련장으로 향했다.
동굴에서 가장 험하게 이용된 장소.
곳곳에 땀은 물론이고 눈물과 심지어는 피까지 묻어 있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조금 기괴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중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언제까지 마나의 역류 탓에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지 못할 순 없었고, 오늘은 그걸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만으로도 상당히 고전했다.
중요한 건, 내 예상이지만 아마 로그니다츠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 육체는 확실히 죽였지만 퓰리처럼 봉인한 게 아니다. 노아에게 여러 영혼을 씌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면 본인들도 문제는 없을 거다.’
예상이 아닌 확신.
당시엔 노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기에 깊게 쫓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마교단장은 4명.
특히나 그중에서도 파괴의 신 가이스를 섬기는 마교단장 듄은 진짜배기 중의 진짜배기.
200년 전 마교단장들과의 전투에서도 결국 듄에게 졌기에 패배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존재.
하남 마을 전체를 환영으로 만들고 그 시체를 조종하여 나를 속인 누군가.
마교단장들 중 그 정도 환상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정욕과 음기의 여신 메로아루아를 섬기는 아이란이 비슷한 힘을 가지고는 있지만, 근본부터가 달랐다.
‘내가 모르는 신이다.’
게다가 그 힘이 마교단장들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기에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났다.
마교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그 덩치가 거대해졌으며, 내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정령이나 무술을 배운 것처럼 그들 역시 새로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계속해서 나 자신을 질타했다. 패배할 수는 없다. 생각 이상으로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았다.
녀석들을 살려 두는 건 이미 한 번 했던 실수다.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각오에 찬 다짐과 함께 마나를 갈무리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