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탕 하는 울림과 함께 이끼가 진 벽돌 바닥에 떨어진 의사봉.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혈이 뿜어져 나오며 손목만 남은 자신의 오른손을 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다시 한번 푸른색 마나의 검을 찔러 넣었다.
“검술? 검술이라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녀석은 자신의 오른손이 잘렸다는 사실보다 내가 검술을 사용한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여전히 강화된 몸에 푸른빛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로 휘둘러져 로그니다츠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크억!”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난 로그니다츠. 복부의 상처를 감싸려 했으나 오른손이 베여 있음을 기억한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새것을 못 받아들인다고 하더라. 확실히 검술을 배우는 건 힘들었어.”
하지만 제도에 오기 전 한 달 동안 톨레스에게 검술을, 루이나에게 창술을 배웠다.
“오직 너희만 죽이겠단 일념 하나로 배운 거야, 감격스럽지?”
솔직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정도의 상황도,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놈들 앞에만 서면 속을 긁고 싶어서 죽겠는데.
검술이든 창술이든 기초밖에 안 되지만, 마나로 강화되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육체는 간단한 일격조차 섬광과 같은 비기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빌어먹을 자시이익! 두 세기의 시간을 지나서까지 나를 방해하느냐!”
“두 세기가 지났음에도 너희는 여전히 추악하구나.”
다시 한번 도약과 동시에 녀석의 코앞에 도착했다. 이미 휘둘러진 검은 깔끔하게 로그니다츠의 하반신을 베어 넘겼다.
“크악!”
“이제 그때 기억이 좀 들어?”
상체만으로 바닥을 기며 악으로 내 발목을 잡는 모습이 벌레가 기어오려는 기분이라, 먼지를 털 듯 녀석의 손을 뿌리친다.
“죽, 죽이겠다! 라엘 텔리즈먼! 네놈을 꼭 죽이겠어!”
“200년을 살아온 단장의 유언치고는.”
그대로 검을 추켜올려 무덤덤하게 내리쳤다.
“진부하네.”
* * *
“허억! 허억!”
로그니다츠 세이야스는 눈을 뜨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정말 오랜만에 경험한 죽음. 치명상이었던 하반신과 마지막 목을 베어 넘긴 일격 탓인지 서늘한 감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로그니다츠 님.”
검은 베일을 쓴 여인.
세크메트는 로그니다츠 세이야스의 새로운 몸을 걱정스레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이건 무슨 몸이지?”
“퓰리 님이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해 뒀습니다. 공작의 아들로 21살에 이름은…….”
“거기까진 필요 없다.”
어차피 이 몸의 주인 행세를 할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정보는 기억할 필요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당장 다시 신전으로 돌아간다. 녀석은 아직 거기 있을 것이야!”
금방이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기세의 로그니다츠였지만, 세크메트는 무릎을 꿇으며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지금 가시면……!”
세크메트의 말에 로그니다츠는 무서운 기세로 그녀를 노려봤다. 사실 다음 단장이든 뭐든 당장에 단죄의 권능으로 압박하여 죽이려 했으나, 권능이 성히 나오지 않았다.
“젠장할.”
몸을 옮기면 영혼과 몸의 파장을 맞추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현 상황을 인지한 로그니다츠는 결국 자신이 일어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
최고의 하루였다.
라엘 텔리즈먼을 농락했으며 파이엔을 위한 최고의 육체도 준비해 뒀다.
“노아. 그 애새끼한테 무슨 수작을 걸어 둔 거야.”
세크메트에게 하는 말이 아닌 단순한 혼잣말.
로그니다츠는 분노 탓에 온몸이 들끓는 상황에서 상황을 분석했다. 자신은 단순히 운이 없었다고 변명하듯.
“멍청한 놈! 몸을 뺏었으면 제대로 확인을 해야지 좋다고 입 벌리고 와서는……!”
이 모든 분노가 노아의 몸을 가지고 자신에게 왔던 페라모라는 이름의 신자를 향해서 쏟아졌지만,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는가.
“더 고통스럽게! 더 잔인하게 죽여야 했건만!”
결국 페라모를 쉽게 죽여 버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넘어가는 수준에서 로그니다츠는 겨우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어리석고 멍청한 녀석들 탓에 이렇게 되어 버렸고 라엘 텔리즈먼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다.
“끄아아아! 라엘 텔리즈머어언!”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자신에게 죽음을 내리던 마도사의 무표정이 떠올라 발작하듯 소리 지르는 로그니다츠였다.
* * *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의 신전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기절한 노아를 업고 밖으로 나오니 제도의 한복판.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신전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걷고 있자니 자연스레 들려오는 말소리.
“여기에 원래 이런 건물이 있었나?”
“어제까지만 해도 달의 신의 신전이었어. 그런데 작은 곳이라 크게 관심을 못 받았지.”
“달의 신전 문양이 아닌데?”
아무래도 하남 마을을 통해 나를 속였던 녀석의 권능을 통해서 여신 렐의 신전을 숨기고 있었던 건지, 사람들은 처음 보는 황금빛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는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행선지를 바로 정할 수는 없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금방 갈피를 잡고 움직였다. 노아의 미약한 숨소리가 등을 통해 전해졌다.
피부가 너무 차가워서 적은 마나를 통해 몸을 따듯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러자 불규칙하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해 갔다.
이 아이는 200년 전, 마교단장들을 죽이지 못한 나의 실패로 인한 결과 중 하나.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 자신들의 과실을 세계에 맺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등에 업은 아이의 연약함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싸움의 무게가 느껴졌다.
노아를 업고 내가 향한 곳은 작은 빌라였다. 중간중간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는데, 노아가 또래보다 작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덩치가 컸으면 생각보다 그림이 훨씬 이상해서 검문을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누구세요?”
노크하자 문이 열리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라엘 님?”
“오랜만입니다, 카밀라.”
마교단장 퓰리에게 몸을 지배당했던 첫 번째 피해자인 카밀라.
“무슨 일이세요? 뒤의 아이는?”
당황해서 묻는 카밀라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 말하려 했으나, 그녀가 먼저 눈치 있게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세상에! 몸에 상처들 좀 봐!”
“저는 괜찮으니 아이부터 부탁드립니다.”
로그니다츠와의 일전 탓에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있긴 했지만, 더 심각한 건 마나의 역류.
제3황자와 바이올렛 기사단 때보다 많은 마나를 사용했다.
그때는 마나의 역류를 몸이 버티지 못했었는데, 이게 약간의 요행인 게 마나를 통해 몸과 뼈를 억지로 잡아 두어 몸의 비틀림을 버텨 내고 있었다.
노아를 카밀라의 침대에 눕힌 후, 나는 바로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카밀라는 수건과 간단한 상비약들을 가져와서는 치료해 주려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방 좀 빌리겠습니다.”
그 뒤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제도 한가운데였기에 이전처럼 과한 마나를 발산할 순 없었다.
몸을 강화해 두었기에 완전히 망가져서 기능을 못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틀어진 마나를 바로 잡는 데에는 내상이 깊었다.
“힐…….”
애써 뒤틀린 마나를 바로잡고 입 밖으로 한 마디 내뱉자마자 피 뭉텅이가 바닥에 쏟아졌다.
고통보다는 카밀라에 대한 미안함이 먼저 밀려왔으나, 그녀는 나를 걱정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힐을 통해 결국 내상까지 완전히 치료했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와 잠을 쫓는 마법까지 사용한 후, 카밀라에게 감사와 함께 현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하남 마을과 보육원. 그리고 또 다른 마교단장 로그니다츠 세이야스와 노아.
또르륵 눈물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노아에게 시선을 두는 카밀라.
“저보다 더 심한 피해자가 있었군요.”
그녀 역시 괴로운 기억 속에 파묻혔던 적이 있었던 탓인지, 카밀라는 노아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다.
“사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처음엔 혁명군에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노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미오나 에딘, 헤니처럼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합류를 원하지 않았기에.
소년의 상황을 전부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그녀뿐이기에 이곳을 선택했다. 실은 친절하며 같은 고통이 있는 그녀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카밀라는 인자한 웃음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봉사 활동을 다니고 있어요.”
“예?”
뜻밖의 주제에 나도 모르게 답해 버렸다.
“퓰리가 제 몸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이 그런다고 씻겨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그러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아도리아의 열렬한 신도였던 그녀가 이제는 로자리오도 끼고 있지 않았다.
“이기적이게도 이런 행동을 통해 위로받는 저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견뎌 낼 수 없었어요.”
“카밀라.”
그건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더 강해서 퓰리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리 생각하는 카밀라는 200년 전 패배의 책임을 지며 싸우는 나와 닮아 있었기에.
“저는 아마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되겠죠. 낙인처럼 찍힌 죄는 절대로 지울 수 없지만,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
“그러니까 저와 같은 상처를 가진 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어요.”
그녀의 다짐 어린 말에 나는 감사를 표하며 부탁했다.
“부디, 저 아이를 맡아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기에 카밀레에게 데려온 것이고.
“물론이죠.”
카밀라는 자신감에 찬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재정적인 부분은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카밀라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으음? 일을 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시지 않으세요?”
“모아 놓은 재물이 좀 있습니다.”
“재물이요? 혹시 옛날 동전 같은 거 쌓아 두고 계세요?”
“…….”
솔직히 정곡을 찔려서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카밀라가 웃으며 답했다.
“200년 전 동전이면 가치가 있긴 하지만, 현찰로 바꾸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한 번에 많이 풀면 그 가치가 떨어지기도 하고요.”
“정말 가치가 있군요?”
스승님이 동굴에 쌓아 둔 재물이 정말로 쓰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은 나쁜 놈들이라도 털거나 레온 혹은 가수인 제니아한테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몇 개 가져와 보세요. 동전은 발행 연도나 제작 장소, 보존 상태에 따라 가격 차가 크다고 들어서 감정사한테 확인은 해야 될 것 같아요.”
“그 고물들이 정말로 돈이 된다니.”
스승님이 물욕이 있던 사람은 아니라 최소한의 비자금 정도만 숨겨놨던 터라, 큰돈은 아니었다.
내일이라도 바로 확인하자고 말하는 동시에 고소한 냄새가 코와 위장을 자극했다.
“아차, 스튜를 끓이고 있었는데.”
황급히 주방으로 향한 카밀라.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노아가 누워 있는 침대에 천천히 등을 기대자, 힐을 사용한 피로감이 결국 수면을 쫓는 마법을 이기고 덮쳐와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