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끄하하하하하!”
황금의 신전.
온통 황금으로 덧칠해진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공간에서 한 남자가 배가 찢어져라 웃어 대고 있었다.
주변에는 주요 부위만 얇은 천으로 가린 수려한 남녀들이 그를 섬기고 있었으며, 고급스러운 포도주와 고기가 대량으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허나, 남자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대로 술을 따른 시녀에게 잔을 던지곤 화를 냈다.
“이따위 술을 가져와?”
“죄, 죄송합니다!”
“후우, 잡것이 괜히 거슬리게 하는구나. 큭, 크큭.”
보통 때였다면 시녀의 목숨은 하찮은 벌레처럼 사라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음에도 남자는 흥겨움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라엘 텔리즈먼. 그 머저리의 실의에 빠진 표정이 이리도 달콤할 줄이야.”
그 어떠한 미주보다도 달콤했으며, 매혹적이었고, 아름다웠으며, 중독적이다.
녀석이 간과한 사실은 딱 하나.
노아가 단죄의 권능을 사용하였기에 여신 렐에 대해서만 주의했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있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세크메트! 아주 칭찬하마! 네년이 오늘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야.”
남자의 부름에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세크메트라는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거짓과 기만의 신 흑두사를 섬기는 여인이며, 남자가 다음번 마교단장으로 키우고 있는 쓸모 있는 도구.
흑두사의 거짓과 기만의 권능으로 사라졌던 하남 마을을 다시 세웠고, 시체와 그들의 영혼을 이용하여 라엘을 농락했다.
그 어떠한 마교단장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자신이 해낸 것.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소년. 아이의 입고리엔 통쾌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탐욕의 신자, 페라모. 지금 돌아왔습니다.”
소년의 원래 이름은 노아였으나 지금은 또 다른 영혼이 들러붙어 아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을 뻗었고.
튀어나온 거대한 황금색의 손이 페라모의 머리를 쥐며 그대로 빛을 발했다.
“어째서! 어째서!”
“지금 네깟 놈이 끼어도 될 자리라고 생각하느냐?”
한차례 광명이 일고 그대로 쓰러진 소년은 애써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여기는?”
“소년, 노아여.”
남자는 양팔을 벌리고 페라모에서 노아가 된 소년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어떠한가? 그대를 위하여 친히 본좌가 준비했던 무대는 어떠했는가?”
그 한마디에.
깨어난 자신이 보았던 광경이 다시 떠오른 노아.
눈을 뜨니, 수녀님과 아이들이 다정하게도 맞이해 주었다. 수녀님은 눈을 떠서 다행이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돌아왔다고 즐거워했다.
꿈만 같던 그 상황이 실은 이 모든 광경을 부숴 버린 자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란 걸 알아채는 것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전, 수녀님은 아이들을 감싸다 수많은 창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아이들은 그런 수녀님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유도 모른 채로 그대로 잔혹하게 눈을 감았다.
오직 자신만이 그들의 손에 붙잡혀 그 광경을 전부 눈에 담았다. 눈물을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자신을 원망하며.
수녀님과 아이들이 웃어 주는 광경이 있지만, 노아는 뿌리치고 일어나 보육원에서 도망쳤다.
그곳은 달콤했지만 거짓되었고.
자신은 어리석지만 새겨진 상처는 아리도록 고통스러웠기에.
그 뒤로 다른 정신에게 또다시 육체를 빼앗겨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흐음? 대답을 해야지?”
쿵 하고 황금색의 거대한 손이 노아를 그대로 짓누른다. 입에서 각혈을 토해 낸 노아는 눈동자를 굴려 모든 일의 원흉을 노려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죽여, 버리겠어.”
노아의 한마디에 다른 이들은 모두 숨죽여 남자의 눈치를 봤으나 오히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좋다! 좋구나! 그래! 그래! 그 정도의 절망이 있어야 파이엔 님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육체이지.”
남자는 소년에게로 다가와 그 머리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영혼의 통로를 여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아, 이제 잡것들의 영혼이 너를 괴롭히진 않을 것이다. 다만, 몸을 정갈하게 하여라. 네 몸은 네놈의 것이 아니니.”
“그게, 무슨…….”
콰직 하고 남자가 노아의 머리를 짓밟는다.
“함부로 입을 떼지 말거라. 죽여 버릴 뻔했지 않은가.”
근처에 벌레가 지나가면 잡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것처럼, 앞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자신을 죽일 뻔했다는 걸 노아는 분명히 느꼈다.
“데려가.”
그대로 노아를 끌고 가는 하인들.
“하아,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날이구나.”
라엘 텔리즈먼의 절망에 찬 표정과 노아라는 소년의 비극까지. 너무도 달콤하여 흥분이 가시질 않아 남자는 무희들을 불러들였다.
“어디 한번 재롱을 부려 봐라. 너희 중 다섯. 오늘 내 침소에 들리라.”
자신과 밤을 지새우는 걸 영광인 듯 교만하게 말하는 남자와 고개를 숙이며 기쁘게 그를 따르는 무희들.
무희들은 정말 열성적으로 춤을 추었고 남자는 하나하나 여인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다섯 번째 여인을 고른 순간.
횃불만이 타오르던 황금의 신전에 볕이 드리운다.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을 신전의 좌에 앉아서 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무덤덤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로그니다츠 세이야스.”
무너진 신전의 천장에서 그대로 내려오는 로브를 입은 남자.
그를 바라보며 로그니다츠는 주먹을 강하게 쥐고 분을 토해 내듯 소리 질렀다.
“라엘 텔리즈먼!”
* * *
심장이 뜨거웠다.
과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마치 연극의 급박한 배경음악처럼 내 귓가를 맴돈다.
다만, 심장과는 정반대로 머리는 차가웠으며 앞에 있는 황금색 머리칼의 남자를 어떻게 죽일지에 대한 계획이 마치 블록 놀이처럼 차근차근 쌓여 갔다.
“거만한 면상이 딱 봐도 너구나.”
“200년 만의 재회구나, 빌어먹을 마법사 놈!”
여신 렐의 탐욕의 권능 황금의 손이 그대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마나의 칼날이 그대로 손목부터 잘라 버린다.
“이렇게 직접 와 주다니! 네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대지에서 솟아올라오는 황금의 손.
탐욕스럽게도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여 내 마법을 차단하려는 듯했지만, 헛웃음이 지어졌다.
“퓰리의 다음은 너다.”
마교단장들은 정말 반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장을 해냈다. 악신들의 힘을 완전히 다루며 200년간 쌓인 힘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탐욕의 권능으로 마나를 흡수하여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만들려는 듯했지만, 역으로 더 과한 마나로 찍어 누른다.
마나의 역류가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분위기 탓인지 감정적으로 되어서인지 머릿속에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
“크읍!”
한도 이상의 마나가 탐욕의 권능을 통해 흡수되자 로그니다츠는 인상을 찌푸리며 권능을 해제했다.
“그래, 아예 찢어발겨 주마.”
황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작은 망치가 들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치가 아닌 판사봉.
여신 렐의 신격을 형체화한 신기.
탐욕과 단죄의 여신 렐.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공명정대하지 못한 재판관.
탐욕스럽게 모든 뇌물을 받아들이며 그렇지 아니한 자를 단죄하는 부정한 여신.
“사형이다!”
허공에 판사봉을 휘두르자 탕!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질량이 근처를 짓누르며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아무리 나라도 신의 권능이 형체화된 신기를 상대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200년을 살아온 마교단장들은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대마도사 알로이스 뫼르엔 델폰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버텨 낸다고?”
온몸이 뭉개지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도 분명하게 녀석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저놈을 죽여라!”
살이 다 비치는 사제복을 입은 로그니다츠의 친위대가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지만.
폭풍과 함께 짓이겨지는 친위대.
그리고 바람에 힘입어 나 역시 구덩이 밖으로 나와 로그니다츠를 마주 봤다.
“잡것들 가지고는 시간 벌이도 못 해.”
“지독하게도 끈질기구나!”
과격하게 일그러지는 표정과 함께 다시금 판사봉을 들어 올리는 로그니다츠.
판결을 내리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도라면 분명,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더 위력적인 공격이 휩쓸 것이다.
그렇게 의사봉이 두 번째로 내리쳐진다.
판사의 의사봉이 두 번째로 내리쳐질 때는 보통 선포한 사항에 잘못이 없음을 확인한다는 의미.
다시 한번 엄청난 압력이 내리쳐진다. 보이지 않는 건물이 위에서 떨어져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에 절로 고개가 떨어진다.
보호막을 두르더라도 단죄의 권능이 상성에서 우위를 점하기에 그대로 깨져 버린다.
‘결국 몸으로 버텨야 한다.’
그렇다면 한계까지 육체를 강화한다.
온몸의 혈관이 툭툭 튀어나오며 붉은색 빛을 띤다.
마나가 순환하며 마치 반딧불이처럼 적빛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에 질세라 로그니다츠 역시 자신의 의사봉을 더 깊게 짓눌렀다.
“크으아!”
얼마나 격렬했는지 마교단장인 로그니다츠가 저런 꼴사나운 소리까지 지를 정도였고, 구덩이는 더욱 깊이 파여 결국엔 제도 지하수로까지 닿아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더불어 발판이 사라지고 부유감이 느껴진다. 그대로 떨어져 코와 입에 물이 사정없이 치고 들어왔지만, 바로 옆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후우.”
숨을 고르며 뚫린 구멍을 보니 로그니다츠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것 같았다.
10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구멍이 깔끔하게 뚫려 있었고, 지하수로를 통해 그 잔해들이 흘러갔다.
“징한 놈! 아직도 살아 있구나!”
마찬가지로 수로로 내려온 로그니다츠 세이야스. 녀석은 내 맞은편의 통로에 서며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나를 노려봤고, 괜히 한 번 비웃으며 다리를 가리켰다.
“하반신은 괜찮아? 내가 상체랑 하체 분리시켜 놨던 거로 기억하는데.”
“같잖은 도발이구나! 네놈의 마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통할 성싶으냐!”
“기만자 주제에 허세 떨지 마.”
렐의 의사봉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 덜덜 떨리는 것만 봐도 녀석이 얼마나 무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의 무기를 사용하는 건 아무리 반신의 경지에 오른 마교단장이라 할지라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인 맹세의 선포, 못 하지?”
첫 번째 의제의 선포와 두 번째 결정의 선포까지는 나도 겨우 버틸 수 있었고 로그니다츠 역시 무리를 한다면 가능했다.
하지만 마지막.
의사봉의 마지막 선언인 맹세의 선포만큼은 녀석도 큰 출혈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네놈……. 내가 이걸 내리치면 제도 전체가 사라진다는 걸 알고는 하는 소리냐?”
세 번째는 마지막.
제고의 여지가 없는 재판의 종막.
그렇기에 마지막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거대했으며 위험했다.
“그러면 누가 출혈이 심할까? 마교단장인 네놈들이 제도에 뿌리내렸다는 건 이미 눈치챘어. 나야 너희를 길동무로 죽으면 만족이야.”
“라엘 텔리즈먼……!”
로그니다츠의 분노로 일그러진 눈동자가 피로 얼룩진다. 무리하게 힘을 사용해서 내상이 심각하다는 뜻.
그걸 보고 입가에 비웃음을 걸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파이엔도 어차피 웬 놈한테 뒤졌다며.”
“감히 그분을 모욕하느냐아!”
그대로 로그니다츠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의사봉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