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후우.”
걷는 연습을 한 지 일주일.
이제 슬슬 원래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굳어 있던 몸은 한 번 풀리기 시작하자 착실하게 하루하루 나아졌다.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도중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는 강아지들.
흑일, 흑이, 흑삼.
흑주신의 새끼들로 지금은 혁명군에서 기르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돌보겠다고 했지만, 3일 정도 지나니 다른 녀석들이 뜯어 말려 댔다.
무슨 전투견 훈련하는 거냐고.
‘강아지처럼 생겨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얘네 마수인데.’
이름도 마음에 안 든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내가 이미 지어 줬고 얘들도 마음에 드는지 부르면 오는데 뭐 어쩌겠는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아주머니들이 챙겨주는 육포와 식량들을 받아들고 방으로 돌아온다.
내일이면 떠나기에 채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자니 방에 들어오는 에레오나.
“진짜로 내일 갈 거야?”
“뭐 평생 안 온다냐. 내 볼일 보고 다시 여기로 올 거야.”
“흠,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어?”
꼬치꼬치 캐묻는 그녀에게 스윽 고개를 돌리곤 답한다.
“아주 오래된 악연을 끊으러 가는 거지.”
“…….”
내 대답에 침묵하던 에레오나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그래, 잘 다녀오고.”
에레오나가 나가자 레온이 교차로 들어온다. 같은 공간에 있기가 싫어서 기다렸던 건지 아니면 타이밍이 공교롭게도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있다가 돌아올 거야?”
“밖에서 들었구나?”
“뭐, 들려서.”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몰라. 사실 따로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지만?”
“미끼는 뿌려 놨어. 무시할 수는 없을 거야.”
“마나는 안정화됐어?”
확실히 요번에 또 싸우다가 저번처럼 역류가 일어난다면 말짱 꽝이었기에.
“조절은 하고 있지. 너무 많은 마나를 다룰 수는 없겠지만 경계선은 대충 알게 됐어.”
뭔가 나를 걱정한다기보다는 다른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묻지 못하는 분위기라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뭘 묻고 싶은 거야?”
직설적인 화법 탓인지 레온은 “늘 그렇다니까.”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제라니 황자가 제도로 다시 돌아갔어.”
조금 뜻밖의 정보.
“황자에게 큰 부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제도 내부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는데, 정작 뭘 하고 있는지까진 알 수 없었어.”
“그래서?”
“어째서 황자를 살려 뒀어?”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레온의 질문.
방 내부의 적막이 무겁게도 깔리며 레온의 눈동자는 내게 피할 구멍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도 노려본다.
“내가 살려 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역류가 일어날 정도로 마나를 격하게 사용했어. 레펠리아 수용소를 무너뜨렸을 때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재앙이었겠지.”
“…….”
자신만의 합리적인 추론을 풀어놓는 레온.
“그런 상황에서 제3황자가 자신의 재량으로 살아 남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제라니 황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꽤나 뛰어난 무인이었어.”
“…….”
“게다가 요마여우라는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에 면역이 나름 갖춰진 상태였어.”
이건 바이올렛 기사단의 마법을 튕기는 갑옷을 본 레온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놓친 거라고?”
“……그렇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기 시작한 레온. 머릿속에선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이 오가는 듯했다.
괜히 머리만 아프게 한 걸까. 그냥 내가 먼저 답을 내놓았다.
“일부러 놓아줬어.”
“역시.”
뜸을 들인 후, 레온은 침대의 끝부분을 손으로 한 번 스윽 쓸어본다.
“사실 황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정말 위험했을 거야. 혁명군에게 황자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순간 말 그대로 제국 전체가 우리를 향해 칼을 들이밀겠지.”
“그렇지.”
물론, 내가 그런 이유로 황자를 살려 둔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황자의 추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지금 걱정하는 거냐?”
“…….”
설마 레온이 나를 걱정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니, 레온은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다 등을 돌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빠르게 복귀해 주길 바랄게.”
의미심장하게 뒷말을 흘리는 레온. 뭔가 기분이 묘해져 녀석이 나간 후에도 문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열린다.
“에딘?”
“라엘 님! 제 수련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떠나십니까!”
아, 맞다.
생각해 보니까 그게 있었네.
“아니!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라엘 님이 살아 돌아오신 이후에도 재활치료를 하신다고 해서 살을 뜯어내는 심정으로 인내를 했는데!”
“…….”
“차라리 저도 데려가 주십쇼!”
“그건 안 돼.”
앞으로 상대할 녀석들은 꽤나 위험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13살의 꼬마가 버틸 수준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다.”
“히잉.”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분위기. 이 녀석이 정말로 첫 만남에서 나한테 욕을 박고 깔보고 무시하던 놈이 맞나 싶었다.
괜히 안쓰러워져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만 성에 차지 않는 표정.
“그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숙제를 하나 주마.”
“숙제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끼고 있는 마나를 안정화시키는 장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 장갑을 끼지 말고 지금 네 몸 안에서 들끓고 있는 마나를 한 점으로 모아 봐. 흠, 심장 부근이 아마 가장 쉬울 거야.”
“예? 그런 건 불가능해요!”
화들짝 놀라는 녀석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가 무서워서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 장갑을 끼고 있으면 평생 네 몸의 마나에게 지고 살 수밖에 없어.”
단언에 에딘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양손을 감싸고 있는 장갑을 바라보곤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이내 콧바람을 흥 하고 뿜어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3황자 제라니 데 아르니티가 다시 제도로 복귀하고 그를 향한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고작 혁명군 따위에게 바이올렛 기사단과 마도사를 데려가 놓고 꼴사납게 패배하여 비 맞은 개처럼 집에 돌아온 걸 이용하여 신권파에서 음해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3황자가 워낙 권력이나 정치 쪽에는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영향력도 크지 않아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끝이 날 줄 알았으나.
“멍청한 것.”
지병으로 몸져누운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고 있는 제1황자 젤롬 데 아르니티는, 식사 자리에서 대놓고 제라니를 향한 욕설을 내뱉었다.
근처에 수많은 시중과 시녀들이 늘어서 있는 자리였음에도 젤롬은 오만한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네놈이 할 줄 아는 게 무식한 칼질뿐이면 그것이라도 잘할 것이지. 황족의 피가 흐른다면 그에 맞는 성과를 보여라.”
“예, 형님.”
“쯧, 동생이란 놈들은 꼭 초를 치는구나.”
순간적으로 제라니가 쥐고 있던 식기가 구부러졌으나, 젤롬이 알아채지 못하게 식탁 밑으로 치웠다.
“둘째 형님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그래, 꼴에 감싸기는.”
굳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인에게 이런 모욕을 줘야 하는가 하고 당장이라도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옆에 앉아 있는 황녀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최근 기분이 좋아서 여기까지 하겠다만 다음에도 이따위로 일을 처리하면 제도에는 발붙일 생각도 하지 마라.”
“예, 형님.”
젤롬이 자리를 뜨고 제라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들 역시 썩 마음에 드는 자리는 아니었기에 돌아가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마도사 페르난도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저번 원정 이후,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은 제도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이프가 날아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최근 1황자님의 기분이 좋으시다 듣긴 했습니다.”
“라디오 타워의 일이 귀족들에겐 치명타였으니까. 당분간은 꼴 보기 싫은 놈들이 고개 숙이고 다닌다고 좋아라 하시겠지.”
라디오 타워의 보안을 책임지던 두 명의 대귀족 라이노르 체르헨 공작과 폴 도르손 공작이 범인을 놓치면서 드높게 치솟던 그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 들었고, 1황자는 그 덕에 최근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황실의 명예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라는 뒷말을 애써 삼키며 제라니는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펠리스 신학 연구소.
그것도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지하 연구실.
입구에서부터 온갖 최첨단 장비로 도배된 지하실을 보며 황자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으나, 마법사인 페르난도는 대놓고 불만이 드러났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투성이군요.”
“마법사들 대부분이 기계를 싫어한다고 듣긴 했어.”
“저는 특히 싫어합니다. 순수 마법주의자라. 넷째 사형은 좀 생각이 다른 것 같지만요.”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보는 페르난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런데 왜 황실이 아니라 신학 연구소에 이런 시설이 있는 걸까요?”
“신학 연구하는 사람들은 전부 마법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페르난도의 물음에 답한 건 제삼의 목소리.
언제 씻은 건지 삐죽삐죽 솟아있는 머리와 다크서클. 걸치고 있는 흰색 가운에 퍼져 있는 알록달록한 얼룩들.
“박사.”
“황자님 오셨습니까.”
말은 나름 정중했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황자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비커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례하긴.”
투덜거리는 페르난도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을 텐데도 박사는 여전히 그들을 보지 않는다. 마치 박사와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느낌.
이게 실력만으로 제국에서 새로운 직책인 ‘박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제국을 몇 단계나 진보시킨 천재 중의 천재.
아직 30대라는 젊은 나이인 걸 감안하면 앞으로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었다.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들고 있던 비커에서 치이익 하는 연기가 솟아오르자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 박사가 이제야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삑.
황자가 입을 때기도 전, 박사가 손에 들린 무언가를 누르자 황자는 인상을 찌푸렸고 페르난도는 대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나가……?”
“사라졌습니다!”
마나가 사라졌다는 것이 불안했는지 황자와 페르난도는 떨떠름하게 박사를 노려봤다.
“제 연구실에 마법사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쳇.”
졸지에 아무 힘 없는 민간인이 되어 버린 페르난도는 투덜거렸으나, 오히려 황자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왜 찾아왔냐고 물었지? 마법사를 죽여야 한다.”
“호오?”
상당히 인상 깊은 주제였는지 박사가 눈을 빛내 왔다. 지금까지 죽어 있었는데 방금 살아난 것만 같은 변화.
“그것도, 재앙 수준의 마법을 홀로 일으키는 마법사를.”
이것이 제라니 황자가 다시 제도로 돌아온 이유였다.
마법을 분산시키는 마갑을 만든 게 박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에게 그 괴물 같은 마법사를 죽일 무기를 얻으러 온 것.
마치 양손이 맞닿아 박수 소리가 나듯 박사는 아주 마음에 든다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라디오 타워를 부숴버린 그놈을 말하시는 거군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사실 그놈을 죽일 도구를 계속 만들고 있었습니다!”
“벌써 말인가?”
뜻밖의 대답에 황자가 역으로 당황했으나 박사는 흥분하여 말을 이어 갔다.
“라디오 타워의 마나 경보장치를 설치한 게 저입니다. 순식간에 17층 전체를 울려 버린 녀석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죠.”
박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황자와 페르난도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