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거센 바람 탓에 코끝이 얼얼하다. 슬슬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라서 그런지 피부가 딱딱해지는 기분.
손을 비비거나 주머니에 넣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나마 헤니의 목도리에 남아 있는 그녀의 온기가 나를 따듯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니?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라.
라푼젤과 테토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부턴 내가 혼자 해야 돼. 너희는 내려가서 선생이랑 헤니를 지켜줘.”
-…….
-죽지 마라.
테토는 스윽 사라졌지만, 라푼젤은 잠시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더니 한숨을 쉬며 이마에 키스를 한 번 해 주곤 바람이 되었다.
“후우.”
원래는 몸이 좀 괜찮아지면 테리스 선생을 설득해서 할 생각이었는데, 아쉽지만 하는 수 없지.
마나의 역류.
마법사에겐 사형선고와도 다름없는 현상.
흐르는 마나의 일부가 역류를 시작하며 다른 마나들과 충돌하여 신체를 비트는 고통을 준다.
그 탓에 마나의 역류로 죽은 마법사들의 시체는 심한 양의 각혈과 사지의 비틀림이 특징.
여기서 내가 다른 마법사들과 다른 점은 침을 통해 일시적으로 마나의 흐름 자체를 막아 뒀다는 것과 외부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천천히 바깥의 마나를 이용하여 왼쪽 손목에 박혀 있는 침을 뽑았고, 한정된 장소에서 마나가 날뛰기 시작했다.
“크윽!”
힘을 줘 보지만 당연하게도 손목과 손가락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비틀려온다.
자칫 잘못하면 왼손의 모든 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마나를 빨아들인다.
일종의 밀어내기.
다시 활동을 시작한 왼쪽 손목 부분의 마나들을 외부의 마나를 빨아들임과 동시에 바깥으로 배출한다.
대기 중의 마나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나는 흡수와 동시에 불순물을 걸러 내서 순결한 마나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까지 급박하게 해 본 적은 없지만, 왼손이 버티는 동안 최대한 빠르게 흡수, 정화, 배출을 반복한다.
그렇게 10분이 지나 왼손의 마나가 얼추 안정화가 되었다. 물론 좀 늦었기에 손가락은 전부 부러져 버렸지만.
“후웁, 이제 감이 좀 잡혔다.”
고작 왼손 하나 하는 데 생각 이상의 시간이 걸린 건 물론이고, 고통에 눈이 돌아가 버릴 것 같다.
날이 추워도 식은땀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찝찝한 기분이었으나 산 중턱에서 들리는 기사단의 외침에 입을 꾹 다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그리곤 오른손목에 꽂혀 있는 침을 제외한 온몸의 침이 일제히 뽑혀 나갔다.
* * *
전황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타란 성을 지키는 수호기사들은 처음엔 당연하게도 단순히 일방적인 체포의 현장이 될 거라 예상했다.
전투보다는 추격이 예상되어 철제 갑옷이 아닌 가죽 갑옷을 입고 온 기사들도 있을 정도. 험한 산이기에 말을 타고 올 수 없다는 게 흠이었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기사단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거친 바람이 불고, 물이 흩날리며 땅이 질척하게 변하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고, 거대한 마수가 그 중심에서 날뛰는 걸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저건 뭐냐!”
타란 성 수호대장은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었는데, 우선은 저런 마수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수호기사들의 무능함.
보통 수호기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한 일종의 낙오자들이 오는 곳이었다.
물론, 팔독 기사단처럼 수준이 낮은 곳은 들어오라고 해도 거절하기도 하지만 거기는 예외일 뿐.
황제의 명령을 받는 기사단장이 직접 통솔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일정 영지에 국한되어 움직임이 제한되는 수호병.
보통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면 제국의 기사단이 출진하고, 그 근처에 있는 수호기사들에게 일정 병력을 지원받는다.
수호기사들은 좋지 못한 말로 뒤처리 기사단 혹은 자경 기사단이라고도 불렸다.
“끄악!”
“바닥이 빠진다! 조심해!”
그러니 지난달에 바이올렛 기사단과 황자가 왔을 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건 일종의 무능으로 치부되었고, 그건 수호대장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렛 기사단도, 황자도 잡지 못한 죄인을 자신들의 손으로 잡아 처단할.
쿠아아!
포효 소리만으로도 귀가 멍해지고 피부가 저려 온다. 저런 마수가 어떻게 타란 마을 근처에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수호대장은 자신의 장궁을 들었다.
타란 마을의 유명한 대장장이 로버트의 역작.
수년 전, 그에게 의뢰하여 손에 넣은 수호대장의 보물.
그는 이 활에 ‘수호의 여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는데, 검보다 활에 재능이 있던 그에겐 아주 딱 어울리는 활이었다.
화살을 메기자 그대로 화살촉 끝에는 오러가 뿜어져 올라왔다. 단순히 검에 오러를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난이도가 높으며 화살을 쐈을 때 오러가 유지되는 건 일종의 검기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툭 하고 한계까지 끌어당긴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맹렬한 기세로 흑주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흑주신이 기세를 감지하고 고개를 틀었으나 화살은 그대로 어깨에 박혀 들더니 살을 뚫고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크롸아아!
흑주신의 울부짖음과 동시에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여전히 정령들의 방해로 많은 수의 기사들이 달려들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만! 그만해 주세요!”
헤니는 눈 근처가 벌겋게 부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음에도 여전히 울먹이며 기사들에게 애원했다.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해 주세요!”
“헤니 뒤로 와! 너도 다쳐!”
모든 광경을 지켜본 로벤은 헤니를 보호하려 손목을 끌어당기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 잘됐어, 다 잘된 거야!”
혁명군이나 그를 지켜준 테리스 선생은 죽어 마땅했으나, 이 작은 아이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게다가 나이 차이는 조금 있지만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로벤의 입장에선 헤니는 살았으면 했다.
짜악.
하지만 따끔하고 뜨거운 감촉이 뺨을 치고 올라왔다.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떨구자 헤니는 어느샌가 눈물을 닦고 생에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 때문이잖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 소리.
로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이와 비슷한 비명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그저 다치고 힘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준 것뿐인데!”
‘그저 망치질을 했을 뿐이야! 대장장이로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선생님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우리 아버지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헤니는 그대로 로벤을 밀친 후, 기절한 테리스 선생을 과격하게 체포하는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로벤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지도 못했다.
뺨을 얻어맞았으나 이상하게도 가슴의 통증이 사무치게도 아려 왔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아버지와 소소한 고민을 하던 무렵, 새벽별 기사단의 기사단장 데오르그가 찾아왔고.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저렇게 절규했고, 애원했으며 결국엔 좌절하고 포기했다.
아버지의 양팔이 잘려나간 것과 피 분수가 터져 나오는 걸 보며 분노했으나, 결국엔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가 똑같다고?”
그 냉혈한 절망, 데오르그 단장과 같은 일을 했다고?
“끄아아아아!”
로벤은 머리를 감싸 쥐며 내달렸다.
함께 온 다른 마을 청년들이 왜 그러냐며 말렸으나. 결국 로벤은 그들의 손길을 쳐 내고 산 밑으로 달렸다.
“꺄앗!”
“이년도 이 선생이란 작자의 제자다. 같이 연행한다.”
기사의 두꺼운 손에 팔목이 잡힌 헤니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은 선생에게로 가 있었다.
“제발! 따라갈 테니까 선생님을 거칠게 다루지 말아 줘요! 아직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피도 계속 흐르고 상처가 찢어져서 위험해요!”
자신이 얼마나 아파도 헤니는 선생을 짐짝 취급하며 어깨에 들쳐멘 기사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기사가 얼마나 대충 그를 다루는지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이 푸욱 하고 반대편 살결을 꿰뚫고 나왔다.
“크헉!”
순간적인 고통으로 테리스 선생이 눈을 뜨며 버둥거렸으나 그를 들쳐메고 있던 기사가 철제 장갑을 낀 손으로 안면에 주먹을 때려 넣자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선생님!”
그나마 다행인 건, 운디네가 전투가 아닌 지혈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그것도 정말 고작이었다.
재앙의 정령인 그녀에게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는 힘 따위 없었다.
-아으!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다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정령왕이 걸어 놓은 족쇄가 문제였다.
특히나 한 번 사고를 친 운디네는 다른 두 정령보다 더욱 심하게 능력의 제약을 두었다.
-라에에엘!
의미 없이 계약자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롸아아!
맹렬한 기세를 뿜어 대던 흑주신조차 결국엔 한쪽 발의 균형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수호대장이 집요하게 한쪽 다리만을 노렸기에 화살이 다발로 박혀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면 오히려 지금껏 버틴 게 용했다.
흑주신의 입장에선 사실 바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새끼들을 입에 물고 혼자서 도망쳤다면 말을 타지 않은 수호기사들은 넋 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흑주신은 남아서 그들을 지키려 애썼다.
온몸을 불사른 토속신이 이제는 최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숨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렇게 3초.
다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며 현 상황도 잊고 숨을 골랐는데,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은 느낄 수 있었다.
“마나가, 사라졌어?”
대기 중의 미세한 마나들이 사라졌다.
기사들에게 오러를 다룰 때에 가장 싫은 점을 꼽으라면 바로 대기 중의 마나.
오러란 체내의 마나 성질을 변화시켜 ‘오러’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 낸다.
극독의 숑이 자신의 마나를 독으로 변환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였지만, 숑과 비교하자면 오러는 한참은 아랫단.
마법사가 보기엔 마나의 성질 변환의 가장 낮은 수준이 바로 오러였지만, 기사들에게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되고 무엇보다 단단해진다.
연약한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기사들에겐 그것이 최강의 무기가 되어 주니까.
어쨌든 외부로 그것을 뿜어내면 대기 중의 마나가 오러에 닿으면서 점점 불순물이 섞여든다.
물론 일류 기사에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것이 오러를 장시간 다룰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으며 절대로 정결한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대기 중의 모든 마나가 사라졌다.
한마디로 기사들의 오러는 더욱 풍성하고 순결해졌다.
잡티 하나 없는 오러.
모든 기사가 꿈꾸나 말 그대로 꿈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수호기사들에게 펼쳐진 것이었다.
“이게 내가 만든 오러라고?”
“아름다워.”
각자 자신들의 오러를 보며 황홀해하던 순간.
압도적인 무언가가 산 정상에서 뿜어져 나왔다.
황홀하게 쳐다보던 순결한 오러는 태풍 앞의 촛불처럼 한없이 가볍게 꺼트려졌다.
경험 많은 기사들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마나’라는 걸 피부로 느꼈다.
이제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
오러를 뿜어내자 수많은 마나들이 그것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부식시키고 더럽히며 오러 자체를 부숴 버렸다.
“저, 저길 봐.”
어떤 기사의 중얼거림이 울려오고 하나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비단을 덮어놓은 듯 무지개색의 빛으로 수 놓여 있었다.
오로라로 보이는 광경은 놀랍게도 산을 중심으로 타란 마을, 멀리 보이는 타란 성까지 퍼져 있었고.
수호대장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했다.
불현듯 바이올렛 기사단과 제라니 황자 그리고 마을 근처의 재앙이 휩쓸고 간 장소가 떠올랐다.
“다들 후퇴……!”
불안함을 느낀 수호대장이 우선은 후퇴를 명령하려던 순간, 하늘에선 흰 눈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