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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마도사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28화 (28/200)

28화

“흐음.”

라이노르 체르헨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자신의 영지인 베이먼을 나와 제도 아르니에 있는 별장에 머문 지 벌써 2년. 이젠 부인과 자식들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쓸쓸하구나.”

가슴의 공허함. 자신의 굶주림이 단순한 성욕이 아닌 가슴을 따스하게 데우는 가족의 정이라는 걸 알아챈 뒤부터는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현 황제인 젤라이트 데 아르니티가 지병으로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지 2년.

황제의 병세가 위중하니 측근인 자신이 지킨다는 명목으로 제도에 와 있지만, 실제론 조금 달랐다.

신권파의 폴 도르손 공작을 견제하기 위함.

제1황자는 어리석고, 제2황자는 지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제3황자는 무예에 눈을 떠 이해치 못할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

신권파의 귀족들과 대주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황실을 지키기 위해선 그와 황실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아르니티 제국 역사의 한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황실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제 며칠 후에 완공되는 라디오 타워.

제국 내의 라디오와 신문 등 언론 자체를 황실에서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라디오 타워의 주도권을 놓고, 양 파벌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금 고민이 시작되니 띵 하고 골이 울리는 느낌과 함께 밖에서 들려오는 호들갑스러운 발걸음이 귀를 콕콕 찔러 왔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그리 자신에게 질문하며 기다리니 노크 소리와 함께 덜컹하고 열리는 문.

집사장과 평생을 함께한 라이노르였지만, 그조차도 집사장이 이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집사장?”

“주, 주인님! 큰일입니다! 은제 스푼의 색이 바래졌습니다!”

“뭣이?”

탕 하고 책상을 내리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혹시 오늘 계속 두통이 있던 것도? 라는 의문도 함께 들어온다.

집사장이 건넨 은제 스푼은 확실히 색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집사장, 그럼 저택에 독이 반입되었단 말인가?”

라이노르의 물음에 집사장은 표정을 굳히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은…… 어떤 것에 독이 섞여 있는지 정확히 찾아내질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변색된 스푼이 따로 차나 음식에 닿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티스푼을 모아 두는 통이 따로 있는데 그곳에서 이 티스푼 하나만 변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뭣?”

한마디로 언제, 어떤 곳에서 독이 묻었는지 확인이 불가하며 아직까지 이 저택 내에 독이 든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제 판단으로는 지효성 독인 듯합니다. 언제 암살을 시도했는지 모르게요. 우선 서둘러 의사에게 가 보시지요, 예약해 두었습니다.”

“고맙네.”

급하게 외투를 챙겨 입으면서도 라이노르의 머릿속에는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추측이 끊임없이 퍼져 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히 신권파의 수장인 폴 도르손.

제도에 있는 요 2년간 겉으론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 밑에선 얼마나 많은 암투와 혈투가 오갔는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폴 도르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또 묘하긴 묘했다.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란 말이지.’

지금까지 서로의 수족이나 재물, 토지 등 별의별 걸 가지고 다투었지만, 서로의 목숨을 노리진 않았다.

왜냐면 그들에게 필요한 건 상대의 수급이 아닌 정치적 승리였으니까.

생각해 보라.

만약 신권파에서 자신을 암살했다면 그 즉시 신권파와 황권파의 내전이고, 곧 누구도 살아남기 힘든 전쟁의 시작이다.

‘찝찝하군.’

하지만 대주교들이 참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신권파에 힘을 대놓고 실어준다면 사실상 국민들은 대주교를 따를 것이고, 명분으로도 얼마든지 역풍을 불게 할 수도 있었다.

신의 말씀이란 오묘하면서도 때와 상황에 따라 해석과 의미가 달라지니까.

‘대주교들이 드디어 도르손 공작을 구워삶은 건가? 그 능구렁이를?’

대주교들의 입김이 강하긴 해도 폴 도르손 공작은 굳건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요 2년간 자신과 꽤나 격렬한 춤사위를 벌였던 것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우선 병원에 가서 자신의 몸에 혹시라도 퍼져 있을지 모를 독을 확인해야 했다.

* * *

“젠장맞을.”

신권파의 수장, 폴 도르손 공작은 드물게도 수준 낮은 욕설을 낮게 내뱉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제도에서 머물며 사용하는 저택에 버금가는 별채가 아닌, 같은 파벌 귀족의 손님용 방.

잠자리에 민감한 그가 어째서 자신의 대저택을 나와 이렇게 손님방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하면 당연하게도.

“도대체 언제쯤 찾아낼는지.”

대저택에 숨겨진 독의 위치와 정체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낮, 폴 도르손 공작의 저택에 새까맣게 변모된 은제 접시가 발견되었다.

그 즉시 명의에게 몸을 진찰받았으나 다행히도 자신의 몸에 독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고, 어떤 물건이나 식품에 독이 묻어 있는지와 어느 경로로 들어왔는지 철저히 확인을 명했으나.

결국, 그 무엇도 발견되지 않았다.

고작 하루가 지났기에 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폴 도르손은 팔자에도 없는 손님방에서 오늘 밤 몸을 뉘게 된 것이었다.

저택 주인이 죄송하다며 자신의 방을 내어드리겠다 했지만, 남이 쓰던 침상을 쓰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기에 폴 도르손은 손님방을 선택했다.

“라디오 타워의 준공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어쨌든 한시라도 빠르게 증거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야만 라디오 타워의 완공 전에 체르헨 공작에게 암살 혐의로 압박을 넣을 수 있었다.

사실, 폴 도르손의 머릿속 한편에는 체르헨 공작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정사를 그르칠 수도 있는 도박 수를 건다는 건 라이노르 체르헨 공작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자신은 독극물에 의한 암살을 당할 뻔했고, 그에 관한 증거는 만들면 그만이다.

체르헨 공작을 아무리 물고 늘어져도 결국엔 그는 범인이 아니기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를 받겠지만, 지금은 라디오 타워의 준공이 코앞에 놓인 상황.

‘흔들어 놓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자신을 암살하려 든 그 죄는 몇백 배, 아니 몇천 배로 갚아 주겠다만.

‘이 상황은 잘 이용해 먹겠다.’

도움을 줘서 고맙다고 껄껄 웃어 주고 싶은 심정.

그렇게 착실히 계획을 세워 가는 공작의 귓가에 급박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르손 공작님!”

“공작님! 큰일입니다!”

신권파에 속한 귀족들.

대귀족들이 이렇게 체통 없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건 아주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변할 정도면 큰일인 건 확실한 듯했다.

“무슨 일들이오.”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는 것.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하는 척을 하는 게 바로 리더로서 보여야 할 모습이었기에, 폴 도르손 공작은 역으로 다리를 꼬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귀족들이 가져온 정보는 그 역시도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체르헨 공작의 저택에도 독에 의해 색이 바랜 스푼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탓에 체르헨 공작은 오늘 근처 고급 여관에서 숙박을 한다고 합니다.”

“뭐요?!”

이게, 무슨……?

당혹스러워하는 귀족들과 폴 도르손.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역으로 도르손 공작은 웃음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허, 허허허. 이거 이거 체르헨 공작이 많이 급했나 보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폴 도르손의 승기를 잡은 미소가 입가에 번지자 다른 귀족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그의 말에 주목했다.

“잘 들어 보십쇼. 오늘 제국 아르니티의 두 대귀족이 암살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것도 파벌의 중심인 두 사람이 동시에.

“만약 저희 둘이 정말로 죽음을 당했다면…….”

“그런 끔찍한 소리는 입에도 담지 마십쇼!”

“맞습니다, 공작!”

“어허, 이야기를 들으시오.”

흥분한 이들을 침착히 진정시키고 공작은 말을 이었다.

“정말 그러했다면 그 역풍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제국에, 아니 이 대륙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없다.

단언컨대 없다.

심지어 황제라 할지라도 이 두 사람을 암살한다면 귀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그만큼 두 사람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런데 오늘 체르헨 공작과 내가 암살을 당할 뻔했소. 이제 관점을 조금 바꿔 봅시다. 어째서 암살범은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암살이 성공하고 두 귀족이 같이 사라지게 되면 아르니티 제국에 큰 타격이다.

그렇다면 타국에서 간섭한 것인가 하면, 그렇게 볼 수는 없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는 순간, 바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되어 주니까.

고작 귀족 두 명의 목숨과 자신들의 나라를 바꿔먹는 짓을 하는 무능한 지도자는 현 대륙에 없었다.

이건 혁명군도 같은 틀에서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자유를 위한다는 그들이라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목을 빼 들면 베어 달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만약, 정말 만약에 이 도르손이 명을 달리하고 체르헨 공작은 살아남았다면?”

“예?”

“그렇다면 어떨 것 같소?”

“……!”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깨닫고는 눈을 크게 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분을 내며 소리쳤다.

“체르헨 공작을 필두로 황실파가 형세를 지배하겠지요. 당장에 라디오 타워만 해도.”

“우린 체르헨 공작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죄를 물을 수도 없을 겁니다! 왜냐면 체르헨 공작 역시 암살의 피해자니까!”

“이런 명예를 모르는 상도덕도 없는 자들을 보았는가!”

퍼즐이 딱딱 들어맞자 도르손 공작은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자작극을 벌일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인가, 라이노르 체르헨. 아니면 황실에서 재촉을 한 것인가?”

체르헨 공작의 암살극은 자작극.

자신이 암살당했다면 그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한 구실.

“게다가 이렇게 저희가 전모를 밝혀냈어도 그들에게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어떤 음식이나 물건에 독이 타져 있는지도 모르고, 들어온 경위도 밝혀내지 못했으니까요.”

“크흠.”

“일단 식기에 묻어 있던 독이 어떤 것인지는 지금 한창 조사하고 있을 테니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야겠죠.”

깔끔하게도 당했다.

우연찮게 암살은 피해 냈지만, 그것을 가지고 적을 몰아붙일 수도 없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다.

“체르헨 공작이 이번 라디오 타워에 총력전을 걸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강하게 나올 수밖에.

* * *

“라는 흐름으로 대충 가고 있겠지.”

해바라기 선술집에서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켠 후, 호탕한 웃음과 함께 한 잔 더 가져다 달라 외쳤다.

“하아, 상황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당황스럽다.”

내가 내민 잔에 같이 잔을 부딪친 에레오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주만 깨작거린다.

-아아, 정말 아름다운 은발이구나.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니?

“따로 관리는 안 합니다만…….”

-자연적! 좋아! 그거 좋지! 원래 극의 미는 노력이 아닌 태생적인 재능이거든, 나처럼.

옆에 붙어서 은발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는 라푼젤을 좀 떼어 달라 에레오나가 노려봤지만 웃으면서 시선에 답해 준다.

“조금 참아. 오늘의 1등 공신이잖아.”

“후우.”

라푼젤이 독이 묻은 티스푼과 식기를 각 공작들의 저택에 배치해 준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도대체 어디서 독이 저택으로 들어왔고 어떤 것에 묻어 있는지 한참을 찾고 있겠지만…….

‘그런 건 없단다.’

당연하게도 그런 건 없다.

그냥 독이 스며든 은색 식기들을 각각 저택에 가져다 놓은 것뿐이다.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기분.

“알아서들 열심히 춤춰 주세요.”

재밌게 관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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