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수도 아르니의 성벽 옆에 있는 울창한 숲.
제도로 들어갔던 게 벌써 일주일도 더 되었지만,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털썩 하고 주저앉아 챙겨온 보온병을 꺼내 따듯한 차를 마신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떠올리면 가슴이 쿵쿵 뛰는 게 느껴진다.
“후.”
침착하게 마음을 추스르며 어젯밤을 다시 회상한다.
마교단장 퓰리.
눈물과 절망의 여신 아도리아의 권능을 받아 수많은 제국의 신민들을 홀리던 간악한 여인.
스승님이 천마주교를 맡으시는 동안 내가 상대하던 다섯 명의 마교단장 중 하나.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퓰리는 카밀라처럼 긴 흑발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피해자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척 연기를 할 수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광녀.
늘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을 홀리다 못해 본인 역시 아도리아의 손에서 놀아나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광대.
-고민이 많구나?
어제 나와 함께 퓰리를 봤던 라푼젤이 따로 부르진 않았지만 스르륵 나타나 내 어깨에 앉았다.
따스한 한마디에서 그녀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가 느껴져 괜히 한 번 웃어 줬다.
“괜찮아. 그 여자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대충 알겠어.”
-200년 전 사람이지? 그때는 아직 계약 전이라 우리는 도와줄 게 없네.
“그리고 그 덕분에 녀석들은 내가 너희의 계약자인 줄 모르지. 그건 큰 무기야.”
-나를 소중히 여기는 그 태도는 아주 마음에 들어.
라푼젤이 미소를 지으며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순간 표정이 굳는다.
-어제도 느꼈지만 바람 자체가 더러워지는 기분이야.
“그것들은 원래 가는 곳마다 지들 색으로 물들이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야.”
팔짱을 끼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사라지는 라푼젤.
다시 한 모금 차를 마시니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 걸어 나온 한쪽 눈을 가린 흑발의 여인.
“퓰리.”
“깔깔! 어제는 꽁지 빠져라 도망쳐 놓고 오늘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찾아올 걸 알았나 봐?”
“그 아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으니까 닥치고 있어.”
“할 수는 있고? 과하게 마나를 사용하면 소란이 일어서 어제는 싸우지도 못한 주제에!”
“마지막 전투에서 내가 네 다리랑 폐를 찢었던 걸 잊었나 보군.”
스멀스멀 마나를 끌어올린다.
이 쓰레기들이랑은 대화를 하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 추억이야! 그때 진짜 엄청 아팠는데! 뭐였지? 로그니다츠는 하반신이 날아갔고 벤트는 가슴이랑 쇄골 쪽을 아예 분쇄시켜 버렸고 아이란은 양어깨를 박살 냈던가?”
“역겨운 이름들이 하나같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퓰리가 맞구나.”
“당연하지! 그거 알아? 다들 그날 이후로 너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서 제국 전체를 뒤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너랑 네 스승 찾는다고 고생하다 탈진해서 뒤진 사람이 세 자릿수는 될걸?”
꽈악 하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 더러운 입에 스승님을 담지 마라.”
마나를 통해 녀석을 압박했으나 퓰리는 여전히 깔깔거리며 나를 도발해 왔다.
“크리스티나 엘리나! 마나의 신이 선택한 황금빛 마나의 주인이었으나 우리의 왕, 파이엔 님에게 패배한 비루한 년!”
쾅! 하고 땅이 울려온다.
퓰리의 양옆에 있는 나무들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일제히 파괴되며 하나의 공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나의 위협에도 퓰리는 재밌다고 자기 무릎을 쳐 대며 즐거워했다.
“꺄하하! 역시! 역시! 200년의 세월이 지나도 너는 여전히 라엘 텔리즈먼이야! 역사에는 잔인하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죄인으로 기록됐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지!”
말을 빠르고 많이 해서 호흡이 거칠어졌으나 퓰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멍청한 새끼! 방금 너는 나를 절대로 못 죽인다는 걸 알려 준 거나 다름없어! 왜? 왜? 왜! 시발 내가 이 카밀라라는 년한테 기생해서 살고 있다는 걸 넌 그 비상하신 머리로 눈치챘으니까!”
“…….”
“그래서 네 스승 년이랑 네가 우리한테 진 거야. 쥐고 있는 건 존나게 많은 주제에 그걸 버릴 줄을 모르니까! 고작 어제 만난 년 하나 때문에 평생의 원수한테 손찌검 하나 못 하는 거 봐라!”
“그래서 할 말은 끝났냐?”
“후, 하! 아니, 이제 시작이지. 사실 이게 본론이야.”
입에 묻은 게거품을 닦으며 방금까지의 광기 어린 표정이 사라진다.
“어떻게 아직도 그 몸으로 살아 있는 거냐?”
“…….”
“우리처럼 영혼을 끄집어내서 다른 몸에 심어 놓은 게 아니야. 너는 예전에 만났던 그때 그 몸이야. 마나도, 힘도, 실력도 전부 그대로……. 그래, 나를 찢어발겼던 라엘 텔리즈먼이야.”
품평하는 듯 훑는 그 눈에 나는 맛있는 디저트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신체의 노화는 아직 진행 중인 것 같은데……. 200년의 세월을 너는 어떻게 버텼고 어떻게 우리에게서 도망친 거지?”
“알고 싶냐?”
코웃음 치는 나를 향해 역으로 비웃음을 띄우며 품에서 단봉 정도 길이의 얇은 무언가를 꺼낸 퓰리는 그걸 그대로 땅에 박았다.
땅에 박히자 넓게 펼쳐지는 걸 보자마자 떠오른 건 안테나.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나들이 점차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신기해! 신기하단 말이야! 고작 200년 만에 인간은 마나를 완전히 제어하는 법을 깨달았어! 그리고 이게 바로 너 같은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들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야!”
“개소리도 작작해라. 너희가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가지고만 있어도 체포하는 사회를 만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것도 맞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때도 이것 때문에 폐를 찢어 버렸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마나의 적성이 있으며 남들보다 품고 있는 마나의 용량이 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시 우리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 줬지만, 지금 그런 아이가 태어나면 숨기기에 바빴다.
걸리는 순간 아이는 체포되어 평생을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레펠리아 수용소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그냥 죽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면 됐다.
그곳은 어린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따듯한 환경은 아니었으니까.
“참 신기하단 말이야. 이런 기계가 튀어나오는 게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황실에 어떤 정신 나갈 정도로 똑똑한 놈의 발명품이라고 하더라?”
“여유롭다?”
핀잔을 주자 역으로 재밌다는 듯 다시금 웃어 재끼는 퓰리.
“당연한 거 아니야? 예전의 나랑 같다고 생각하지 마. 200년간 아도리아 님을 섬기며 내 힘이 얼마나 강해졌다고 생각해?”
“역시, 물의 신전의 진짜 대주교는 너였구나.”
“정답! 대정답! 그놈은 그냥 세워 둔 거야. 그래서인지 카밀라가 따지고 들 때 그놈이 당황하던 꼬라지 봤어?”
어쩐지 처음에 이상하리만치 당황하던 대주교의 반응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래 놓고 내가 연기하는 줄 알고 장단에 맞춰서 눈치나 보는 게 아주 볼만했어. 연극 보는 줄 알았다니까!”
“그만 웃어.”
“깔깔! 어제부터 재밌는 일투성이야! 너 말이야. 200년을 살았지만 성장은 그다지 하지 못했잖아. 딱 보면 티가 나.”
“…….”
“그에 비해 나는 200년 동안 아도리아 님께 더욱 가까워졌어. 우리는 이제 인간이라 부를 수 없어! 반신이지!”
툭툭 안테나를 건드리며 뱀처럼 입을 쭈욱 찢어 웃는 퓰리.
“게다가 마법사인 너한테 최악의 카운터인 이 안테나까지 있어. 사실은 너랑 제대로 붙어서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해 주는 것도 재밌겠지만, 일방적으로 짓밟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너 혼자서 되겠냐. 예전처럼 다른 놈들도 다 불러.”
“허세 부리긴! 너처럼 맛있는 먹잇감을 딴 놈들한테 줄 리가 없잖아! 게다가 파이엔 님이 돌아오셨을 때 네 머리를 가져가면 다른 단장들보다 얼마나 사랑해 주실까! 그 재수 없는 아이란 년보다 나를 안아 주시겠지!”
퓰리의 소리침과 동시에 거대한 나무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날아들어 주변 일대를 완전히 부숴 버렸다. 물론, 자랑하던 안테나는 허망하리만치 너덜너덜하게 부러져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퓰리는 아무 상처도 없었지만,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너 어떻게 마법을 쓰는 거야?”
마나는 사라졌을 텐데라는 뒷말이 나오기 전에 나는 비웃음을 걸며 답해 줬다.
“안테나 범위가 여기서 성벽 정도 되더라. 그러면 단순히 범위 밖에서 마나를 운용하면 되는 거야.”
레펠리아 수용소를 무너뜨린 것과 같은 방법이다.
마나가 사라져도 이미 날아오고 있는 물체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들려던 퓰리의 움직임이 멈춘다.
“드디어 눈치챘구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며 입이 쩌억 벌려진 추한 모습.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는 게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들었다.
“무지했던 덕분에 기고만장할 수 있었지. 그 찰나의 순간은 충분히 즐겼나?”
어제는 제도에 있느라 마나를 극한까지 제한했던 탓에 내 힘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마나를 없애는 안테나 덕분에 내 힘의 총량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어둡던 시야가 또렷해지는 기분이겠지.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의 마나가 그녀의 눈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너 뭐야! 뭐야! 뭐야아아아! 뭐냐고오오오오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발악하는 퓰리의 입을 낚아채서 그대로 땅에 때려 박는다.
읍 읍 거리는 게 참으로 어울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위치에서 서로를 보는 것 같지 않아?”
버둥거리며 손톱으로 땅을 긁기 시작한 퓰리.
예전에는 울음소리로 상대의 정신을 파괴하던 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권능을 다루는 법이 훨씬 능숙해졌는지 그녀가 만드는 미세한 소리에도 뇌가 강하게 울려 왔다.
발악하며 옷이 스치는 소리.
땅을 긁는 소리.
과격한 숨소리까지도.
모든 것이 나를 옥죄이고 압박하며 공격하고 있었으나 여유롭게 웃어 주었다.
“라푼젤, 차단해 줘.”
-바람이 더러워졌어.
내게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라푼젤이 차단해 준다. 그럼에도 압박감은 남아 있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귀가 아닌 피부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확실히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네. 반신이라고 칭할 만해.”
땅에 입이 박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퓰리였기에 답을 하지는 못했다.
“어때? 옛날 생각이 조금 나? 카밀라의 몸이라서 예전처럼 어디 하나 뜯어낼 수는 없는 게 안타깝다.”
“읍! 읍!”
“마음 같아서는 그 몸에서 빼 두고 싶지만, 그랬다간 카밀라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역으로……. 그 안에 가둬 두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
“으읍! 읍!”
“카밀라가 나이 들어서 곱게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너는 아무것도 못 할 거야.”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퓰리였으나 나는 그녀의 머리에 반대쪽 손을 올리며 웃어 줬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 줄게.”
이 정도 여유를 보여 주는 것으로 격차를 느끼게 해 주자는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말이 퓰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너였구나아아! 파이엔 님을 죽인 게 너였어어! 저주한다! 씹어 죽일 자식! 마교단장들이 네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죽어! 죽어! 죽어어어!”
발악하며 외치던 퓰리는 기절하듯 눈을 감았고 나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놓았다.
“파이엔을 죽인 사람이 나라고?”
그랬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아니다. 애초에 동굴에서만 살다가 나온 지 한 달 하고 조금 지난 정도밖에 안 됐는데 파이엔을 죽일 수 있을 리가.
그렇다면 내가 동굴에 있던 200년 사이 누군가가 파이엔을 죽였다는 이야기였는데, 스승님도 이기지 못한 파이엔을 도대체 누가?
왜인지 의문이 늘어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뒤에서 끄응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여긴?”
주변을 둘러보던 카밀라는 나를 보고 엉망이 된 자신의 몸을 보더니 꺄악 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