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흐음, 이거 괜찮으신데요?”
“너무 화려한데요.”
옷을 가져다 대는 제니아에게 한숨을 내쉬며 슬며시 민다. 아무리 그래도 분홍색은 아니지 않은가.
“제 머리 색이랑 세트로 어울리잖아요.”
빵모자를 쓰고 있으나 뒤로 삐죽 나와 있는 꽁지를 손가락으로 꼬며 말하지만, 본인도 진심은 아니었는지 웃으며 무난한 청재킷을 건넸다.
“남자친구분이 워낙 잘생기셔서 뭐든 다 어울리셔요!”
이런 상술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크게 다를 거 없구나.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아는…….”
“오빠죠.”
“나보다 나이 많았어요?”
“27살입니다.”
“오빠 맞네요.”
사실 나이 얘기는 그닥 하고 싶지 않기는 하지만, 어쨌든 점원은 그러시구나 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점점 표정이 굳는다.
“어……! 혹시 제니아 님 아니세요?”
“하하. 예, 맞아요.”
“저 진짜 팬이에요! 요번 공연은 티켓팅을 못해서 못 갔는데 대박!”
호들갑 떠는 점원을 뒤로한 채 옷을 갈아입고 오니 나름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해 주세요. 아셨죠? 그리고 저 오빠랑도 별 사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무조건 입 꾹 닫고 있을게요. 다음 공연 티켓이라니 진짜 감사해요!”
나름 그녀만이 쓸 수 있는 뇌물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가가자, 제니아가 나를 보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본판이 괜찮으니 옷도 뭘 입어도 무난하네요.”
“그럼 갑시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언제 혁명군 측에서 다음 임무를 요구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뒤가 구린 건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옷가게 밖으로 나와 다시 물의 신전으로 걷는다. 걷는 도중 뭔가 불편했는지 제니아가 흠하고 소리를 내더니 나를 부른다.
“27살이신 줄 몰랐어요.”
“그런 말 종종 들어요.”
동안은 동안이지 않은가.
227살치고는…….
“저는 25살이거든요. 그냥 말 편하게 하세요.”
계속 존대하는 걸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던 듯해서 나도 그냥 편하게 말하라고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죠. 오빠만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
뭔가 오빠라는 말을 듣는 게 오랜만이라서 조금 목 뒤가 간지러웠으나, 그래도 말을 편하게 하니 제니아의 표정이 조금 편해진 게 보였다.
“그래서 오늘 또 가서 어떻게 하려고요?”
“있어 봐,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
-저기 있어.
어깨에 올라타고 있는 라푼젤이 하품을 하며 헤엄치듯 다리를 움직인다.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킨다니 다른 정령들이 알면 깜짝 놀랄 거야.
“고마워.”
-오늘 차려입은 게 마음에 들어서 봐주는 거야.
물의 신전 앞에는 한 여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눈가에 짙게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은 사연이 담겨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할 수 있는 한 선량한 미소로 다가가자 그녀는 처음엔 당황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물의 여신님을 섬기는 분이신가요?”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예?”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여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라푼젤에게 들은 바로는 오늘 아침부터 계속 와 있었는데, 신도들은 전부 그녀를 무시하거나 모른 척했다고 한다.
그러니 신도가 아니라도 오늘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내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사실 저희 아들이 어제부터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요.”
주변 눈치를 슬쩍슬쩍 보면서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한 뒤로 들어오지를 않더라고요. 친구들이랑 노는 줄 알았는데 연락을 돌려봐도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나이는 어떻게 되는 데요?”
“13살이요. 경비대에 이야기는 했는데 단순 가출일 수도 있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흐음?”
옆에서 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서 일단은 아이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물의 여신 복음이 있더라고요. 거기 보니까 어제 저희 아이가 나간 날짜에 집회가 있다는 메모가 있어서 확인하려고 여기로 왔어요.”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 집회도 없다고 한다?”
“예! 맞아요!”
정확하게 상황을 읽자 여인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발 부탁드려요. 저희 아들 좀 찾아 주세요.”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요?”
“흑황 기사단 소속 기사여서 지금 음지 쪽에 파견 나가 있어요. 일단 편지는 보내 놨지만, 과연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얘기를 듣고 잠시 머뭇거린 제니아가 슬며시 나를 당겨서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괜찮아요? 흑황 기사단이랑 괜히 잘못 엮이면 골치 아파져요.”
기사단에서도 네임벨류로 치면 탑급에 들어가는 기사단이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난 오히려 그게 이 사건을 푸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괜찮다고 답해 준 후, 부인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라만 아인이라고 합니다. 아드님 찾는 데 최대한 협력해드리겠습니다.”
“메이 아데스에요. 저희 아들은 멜 아데스고요.”
“저는 제니아라고 해요.”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움찔하고 떤 메이가 조심스레 얼굴을 확인하더니 설마 하고 놀란 숨을 들이켠다.
“쉿! 쉿! 하하, 생각보다 저를 아는 분들이 많네요.”
“…….”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그냥 가명이나 대라고 눈으로 따졌으나, 제니아는 어색한 웃음만 흘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슬슬 물의 신전 측에서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게 보였기에 근처 찻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간단한 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으니 메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도와주신다는 건 너무나 감사드리지만 솔직히 어째서 도와주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혹시 돈을 원하시는 걸까요? 차라리 지금 말씀해 주시면 원하시는 만큼 지불해 드릴게요.”
“아, 그런 게 아니라.”
소니아가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려 바로 끼어들었다.
“나름의 책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
따지고 보면 운디네가 물의 여신으로 착각당해서 물의 신전 측에서 기묘한 움직임을 취하게 된 것이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외부에서의 압력이 그만큼 세게 들어갔다는 방증이리라.
“자세하게는 말씀을 못 드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메이 님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메이 입장에서는 아들을 찾는 데 도움만 줄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에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제 저희는 물의 신전을 잠깐 견학했는데, 거기서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이상한 점이요?”
마나를 통해 오감을 증폭시켰다는 이야기를 빼고, 피 냄새와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는 걸 얘기해 주자 메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말씀은…….”
“아무래도 물의 신전 측에서 비밀리에 무슨 의식을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인 건 분명한 것 같네요.”
혹시라도 자신의 아이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불안감에 덜덜 떠는 메이의 손을 조용히 잡아 주는 제니아.
그녀가 진정되길 잠시 기다리던 중 마침 따듯한 차가 나와 불안함을 따스하게 적셔 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자신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묻는 제니아에게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중요한 건 그 집회의 강제성입니다. 아드님이 원래 물의 여신의 신도는 아니었죠?”
“저희는 태양신님을 섬깁니다. 아이도 모태신앙이었고요.”
“그럼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것 같은데 그 방법을 알아내야겠네요.”
더불어 눈물을 모으는 목적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해 보였다. 테토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신도들이 피나 살점이 아닌 눈물을 모으고 있다.
아도리아가 눈물과 절망의 여신인 걸 고려하면 직접적인 매개체이기도 해서 자칫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뭐 도심 한가운데서 강림 같은 미친 짓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눈물을 모으고 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 가능한 한 빠르게 움직여야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 한 여인.
길고 찰랑거리는 흑발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미모의 여인. 목에는 항아리 모양의 로자리오가 걸려 있었는데, 물의 여신을 섬기는 신자라는 뜻이었다.
“저기, 방금까지 물의 신전 앞에 서 있으시던 분들이시죠?”
“……예.”
제니아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답하자 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카밀라라고 해요. 물의 여신님을 섬기는 신자이죠.”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다. 그만큼 제니아와 메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음?’
하지만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친숙함? 아니면 익숙함? 이게 마나가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직감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제니아와 메리는 그녀를 경계했으나 예상과는 반대로 카밀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부탁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 * *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으며 카밀라는 그녀를 위해 주문한 다즐링 차를 홀짝였다.
“조금 진정이 되세요?”
제니아가 손수건을 건네주며 묻자 카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하다 답했다.
“그런데 도와 달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조금 진정된 기미가 보이는 그녀에게 묻자 카밀라는 다시 한번 차를 홀짝여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지금 물의 신전은 정체 모를 의식을 진행 중이에요.”
“…….”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는 지하의 예배당에서 신자들을 모아 두고 그들의 눈물을 모으고 있어요.”
“눈물을 모은다고요?”
제니아와 메리가 당황하는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본다. 나는 테토 덕분에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간단히 놀란 표정을 지어준다.
“요번 말람의 골짜기가 얼어붙은 사건에 대해서 타 종교와 기자들은 물론이고 황실 측에서도 압박이 들어왔어요. 그 탓에 대주교께서는 아도리아 님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특수한 예배를 여신 거죠.”
“눈물을 모으는 이유는 뭔가요?”
“저희 인간들이 아도리아 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정결하고 순결하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게 바로 저희의 눈물이라고 설파하셔서, 지금 신전 지하에서는 하루 종일 신도들이 눈물을 모으고 있어요. 그 때문에 탈진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고, 자해를 해서 강제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어서 목숨이 위험한 사람도 있어요.”
“흐음.”
“하지만 그건 뭔가 이상해요!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대주교께서 여신님의 권능을 통해 신자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요?”
“처음 보는 신자들의 숫자가 하루 만에 대거 늘었고, 기꺼이 그 예배당에 갇혀서 눈물을 흘리는 게 이상해요. 열성적인 신도들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걸 새로 온 신도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침착하게 하나하나 물어 나가니 필요한 정보들을 쏙쏙 알려 준다. 찝찝할 정도로.
‘흐음.’
내 입장에선 지금으로서는 크게 예상을 빗나간 건 없지만 제니아와 메리는 크게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당장 경비대에 신고해요! 신도인 카밀라 님이 계시면 경비대도 믿어 줄 거예요.”
하지만 카밀라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해 봤어요. 하지만 경비대에서는 그냥 무시했어요. 아무래도 저희 대주교님께서 발이 넓으시다 보니 경비대의 윗선에도 이미 얘기가 끝나 있는 것 같아요.”
다시금 울먹이는 카밀라.
그 순간 바람이 내 귓가를 간질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