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10분.
고작 10분을 퍼지들은 성지에 발을 디뎠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 또한 그 이상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탓인데, 이 단순한 행동은 상상 이상으로 큰 충격을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절대로 밟지 못할 그 땅을 밟았다.
넘지 못할 골짜기를 넘었다.
사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땅이었다.
퍼지들의 인식이 바뀌기 충분한 사건이었고 다수의 기사단이 급하게 파견되어 음지를 둘러쌌다.
하지만 그럼에도 밖으로 향하는 퍼지들은 아주 조금씩 늘어났다. 그들이 비록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더라도 말이다.
신문, 뉴스, 라디오 등에서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미친 듯이 기사를 쓰거나 보도를 해 댔고, 그 귀퉁이에는 팔독 기사단의 기사단장 폴트텍 레이먼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 또한 실려 있었다.
“…….”
“왜요.”
해바라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부부에게, 결국 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그들과 시선을 맞췄다.
“이거……. 아니죠?”
주인장이 슬쩍 들이민 신문에는 흑백에다가 어두워서 제대로 찍히진 않았지만, 밤하늘 빗속에 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멀어서 몸집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그건 다행이야.’
“아니죠.”
옆에 있던 운디네도 힘을 사용하느라 모습을 드러내서 사진에 찍혀 있었다. 운디네가 보면 좋아하겠는데?
“진짜요?”
“진짜요.”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람의 골짜기에도 나타났다면서요. 골짜기 얼리고 갔다고.”
“……맞아요.”
“혹시 변장이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운디네한테 시켜서 다행이지 자칫 잘못했다간 하루 종일 쓴소리를 들을 뻔했다.
위험한 행동이었으며, 당장에는 그 행동이 퍼지들을 흥분시켜 위험한 다리를 건너게 하고 있으니까.
기사단과 제국의 마법사들 그리고 신관들이 모여서 얼음을 열심히 녹이고 있지만, 방금도 말했듯 퍼지들은 여전히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비록 성공한 퍼지는 없고, 시도하는 숫자는 점점 줄어도 퍼지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바로 이게 내가 생각한 독립을 위한 피 흘림이었다.
‘에레오나는 자신과 동료들의 피 흘림을 얘기했고, 레온은 고통을 버티는 수동적인 피 흘림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둘 다 독립을 위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보기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독립을 위해선, 이 역겨운 현실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선 피 흘림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피는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본인들이 인식하고 인지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위한 첫발이 이제 떼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스스로 노예가 되던 퍼지들이, 다리를 놓아 주기만 해도 이 현실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걸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당장에는 충분했다.
‘정이 많은 게 탈이야.’
퍼지들의 삶을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조금 도와주게 되었지만, 이 뒤는 혁명군이 알아서 하겠지.
“그 여자분 때문에 지금 물의 신관들도 난리가 났어요.”
“…….”
“처음엔 다들 마법사겠구나 했는데, 그 여자한테서는 마나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기사단이 권능인가 싶어 물의 신관들에게 확인해 봤지만,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신관은 없는 건 물론이고 물을 얼릴 수도 없어요.”
“…….”
“그래서 지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닙니다. 물의 여신께서 직접 강림하신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면서, 그분의 뜻이 무엇이냐며 아도리아의 신도들은 난리 났어요.”
“음, 그렇……. 잠깐, 누구요?”
솔직히 운디네를 사람들에게 드러낸 건 반쯤 시험이었다. 마나도, 권능도 아닌 존재가 등장하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하는.
신으로 의심하는 것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통으로 들어맞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아도리아요? 물의 여신이죠. 신도가 가장 많은 신 중 다섯 손가락에는 들어갈걸요.”
“아도리아가 물의 여신?”
헛웃음이 나오다 못해 모멸감이 느껴졌다. 마교의 잡것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기만해야 속이 후련해지는 걸까.
마교는 단순히 하나의 신만을 섬기는 게 아니다.
수많은 악신들을 섬기고 있으며, 천마주교인 파이엔은 놀랍게도 그 많은 악신들에게 모든 권능을 받은 괴물 중의 괴물.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마교단장들이 있는데, 마교단장 중 아도리아에게 권능을 받은 단장이 있었다.
눈물과 절망의 여신 아도리아.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절망을 미식의 일종으로 음미하는 그녀가 물의 신이랍시고 추앙받게 된 현실이 참으로 역겨웠다.
‘그러면 운디네를 아도리아로 착각하는 건가?’
운디네에겐 미안한 짓을 했구나.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와중, 깜빡하고 있던 걸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니아라는 여가수 말인데요…….”
“예, 부르셨나요?”
어젯밤 들었던 고운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빵모자에 검은 안경을 써서 변장을 하긴 했지만, 연분홍 머리를 흩날리며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 준 제니아가 서 있었다.
그녀를 보고 그렇구나 하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제니아 쪽에서 당황하며 내 옆자리에 앉는다.
“어, 저기……. 놀라지 않으시네요?”
“방금 물어보려고 했던 게 당신도 혁명군이냐는 거였으니까요.”
어떻게 VIP 티켓을 구했는지, 폴트텍의 바로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제니아가 어째서 폴트텍보다 내게 먼저 와서 인사를 했는지도 단번에 해결된다.
“덕분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를 드리려고 한 거긴 했는데 너무 깔끔하셔서 정말 놀랐어요.”
웃으면서 턱을 괴곤 나를 바라보는 제니아. 이른 시간이 아니었으면 술이라도 건넸을 것 같은 분위기.
괜히 어색해서 말을 돌려본다.
“그런데 유명하신 가수분께서 왜 혁명군에 가담하신 겁니까?”
“저도 원래는 퍼지였어요. 그런데 노래 실력이랑 외모를 알아본 기획사에서 저를 스카우트했고, 과거를 숨기고 활동 중이죠.”
“흐음.”
“특이한 케이스이긴 해요. 저희 밴드분들이나 같은 소속 가수들도 제가 퍼지라는 걸 몰라요.”
확실히 어제 들었던 그녀의 노랫소리는 상당히 감미로웠다. 궁중악단이던 제프리가 봤다면 바로 청혼을 했을 정도.
“어쨌든 여신이라는 분 덕분에 암살도 자연스럽게 묻혔고, 다음 임무로 생각 중이던 마약 하우스도 사라져 버렸네요.”
제니아의 말에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다음 임무도 같이 처리해 버렸나.
“주인장도 다음 임무는 모르는 건가요?”
“사실 그다음 것도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인력시장도 요번 폭우에 완전히 파괴돼서 한동안은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
인력시장도 라푼젤과 나의 전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조촐하게 간이로 만들어 진행이 되고 있기는 했다.
인력시장을 없앤 건 그냥 기분이 나빠서였을 뿐, 실제로 그걸 폐지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그럼 시간이 남는 거군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딜 가냐고 묻는 주인장에게 시간이 남으니 개인적인 볼일을 좀 보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섰다.
‘마침 잘됐군.’
방금 여신 아도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현재 아르니티에 있는 신전과 신들에 관해 조사를 하고 싶었다.
주인장에게 부탁하면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직접 눈과 피부 그리고 공기로 그들을 보고 싶었다.
“어디 가시게요?”
일단 성지로 돌아가려던 나를 다시 뒤에서 부르는 제니아.
귀찮다는 생각이 대놓고 표정에서 드러난 걸까. 그녀는 조금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안 바쁘세요?”
나름 완곡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공연이 끝나기도 했고. 그 공연에서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휴가받았어요.”
“아, 그래요. 좋으시겠네요.”
“같이 휴가받은 사람끼리 시간이나 때울까요?”
“저는 바쁜데요.”
담담하게 얘기하자 제니아는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저도 따라다니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레온이 라엘 님이 무슨 짓을 벌이실지 모르니까 잘 보고 있으라 했거든요.”
한마디로 자유시간이 생긴 나를 감시하겠다는 얘기군.
조금 기분이 그렇다가도 딱히 들키면 안 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성지 길잡이가 필요하기도 했고, 돌아다니면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이 있으면 얻어먹을 수 있는 돈줄이기도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이드 하나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하자.’
“그래서 어디로 가실 건데요?”
“성지에 있는 물의 신전으로 갈 생각입니다.”
“잘됐네요. 저도 한번 거기 상황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 뒤는 간단한 잡담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샌가 말람의 골짜기에 도착했다.
원래처럼 팔독 기사단이 다리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옆 골짜기에는 다른 기사들이 넓게 퍼져서 지키고 있었다.
푸른 닭부터 시작해서 자줏빛 꽃, 검은 황소 등 꽤나 많은 종류의 기사단 문양이 보였는데,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만 ‘방패를 뚫는 거대한 검은 황소’는 나도 아는 문양이었다.
‘흑황 기사단은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확실히 유서 깊은 엘리트 기사단이긴 하다. 주로 선봉에서 적의 전열을 짓밟던 황소와 같은 과격함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요번 사건 때문에 다리를 지키는 보안도 강화되어 신분증을 꽤나 세밀하게 체크했지만, 유명 가수인 제니아와 함께한 덕분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택시 타고 가시죠.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어요.”
그녀의 말에 따라 택시를 기다리고 있자니 깊은 울림을 가진 종소리가 성지 전역에 울렸다.
음지에는 잘 들리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성지에는 이렇게 또렷하게 들리는구나 싶던 순간, 기사단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고 제니아 역시 무릎을 꿇었다.
“뭐해요, 얼른 꿇어요.”
“난 신을 믿지 않는데요.”
“그래도 꿇어요. 괜히 밉보이니까.”
“하아.”
한숨을 쉬며 근처 난간에 앉았다. 주변에선 나를 흘끔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게 뭔가.
10분이 지나 다시 종이 울렸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성지는 진짜 별로네요.”
듣기로는 9시, 13시, 15시, 18시에 종이 울리면 자신의 신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데. 참 거지 같았다.
“그래요? 저는 이거 나름 좋아해요. 신을 잊을 시간이 없으니까요.”
“당신도 이들이 믿는 신을 믿나요?”
“음? 그럼요.”
단아하게 웃으며 목에 걸고 있는 펼쳐진 책 모양의 로자리오를 보여 준다.
“지식과 지혜의 신을 섬기는 위즈교를 믿어요.”
내가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제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음, 사실 음지에 살 때는 안 믿었는데요. 성지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하려면 종교는 꼭 있어야 한다더라고요.”
“흐음.”
“그나마 신교 소속이 아니라서 교리나 제한이 까다롭지 않고 순한 위즈교를 골랐죠.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최악의 상황에선 무신론자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신을 찾듯이 그녀 역시 갑작스레 변한 환경과 부담 속에서 신을 버팀목으로 삼았던 듯싶다.
“뭐, 위즈교는 전도를 권하지도 않고 저희끼리의 안식, 평화, 지식을 탐구하는 것뿐이니까 라엘 님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요.”
덤덤히 답하며 앞으로 나서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나를 향해 외쳤다.
“거기 아니에요.”
“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