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눈을 감은 폴트텍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흘긋흘긋 나를 보긴 했지만 그것뿐이고, 다들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 무대 쪽을 보니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니아와 눈이 맞았다.
“손님, 여기는 오시면 안 됩니다.”
옥상 입구 쪽에 서 있던 가드가 의아하게 여기며 물어 와, 아무 말 없이 그의 머리를 낚아챘다.
“무슨……!”
“괜찮아, 삶을 살면서 고작 5분 정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어.”
처음엔 발악하던 가드가 점점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본다. 나에 대해서는 금방 잊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투둑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바로 가자.”
품에서 손마디 정도 되는 지팡이를 꺼내어 바닥에 떨구자 빗자루가 되었다.
-흠? 꽤나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렇지? 나도 주운 거야.”
테토의 말에 피식 웃으며 빗자루 위에 발을 올렸고 점차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숑이 쓰던 물건이라 그런지 독기가 조금 머금어져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날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매개체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마나도 적게 들고 속도도 빠르기에 선택했다.
어두운 하늘의 빗방울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빗물에 눈이 가려지지만, 오히려 덕분에 하늘을 날아도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성지에서 음지의 하늘로 오니 운디네가 조용히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방 왔구나.
우웅 하고 온몸을 찌르듯 울려오는 운디네의 목소리.
손바닥만 하던 크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 곱고 푸른 머리가 발끝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정령왕에게 허락받아 그 힘의 제한이 없었기에 지금의 그녀는 평소에 보던 장난스러운 정령이 아니었다.
“그럼, 개막 축포는 내가 쏴 줄게.”
-고마워.
내 역할은 폴트텍을 암살하면서 끝이 났다.
이제 해줘야 할 건 그동안 분노를 참고 있던 나의 정령에게 기회를 주는 것뿐.
손에 마나를 모아 그 성질을 변화시킨다.
제도에 들어온 이후에는 계속해서 극한까지 마나를 숨기고 있었던 탓에, 한 번 물꼬를 풀자 기다렸다는 듯 마나가 넘실거렸다.
오늘 밤,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를 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지금이라는 듯 후웅 하고 녹색의 작은 폭풍이 치는 곳을 향해, 나는 응축된 마나를 쏘았다.
‘천뢰.’
분명 스승님이 이 마법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던 거로 기억한다.
어둡던 밤하늘을 한 번 밝게 비춘 번개가 먼저 지나가고, 귀를 때려 오는 과격한 천둥이 뒤를 따른다.
동시에 운디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죄악의 도시여, 비와 파도의 정령, 운디네가 그대들의 추함을 씻어 내리라.
그녀의 한마디와 동시에 비구름은 제도 전체를 덮고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없을 폭우.
운디네가 자신의 힘을 개방하고 3일간 꾹꾹 눌러 담았던 힘이자 분노였다.
성지 쪽은 정말 빗소리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수준이었다면, 이곳 음지는 그 정도가 덜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떠내려간다.”
그녀의 비는 적화초가 심겨 있는 비닐하우스를 완전히 덮쳤다.
일부러 그쪽 부분엔 과한 폭우를 일으킨 것도 있어서, 하우스들도 버티지 못하고 심겨 있던 적화초와 함께 흘러갔다.
길을 따라 흘러가는 적화초를 어떻게든 잡으려 애쓰는 기사들이 보였지만, 빗물에 넘어져 바닥을 구를 뿐.
대량의 약초들이 빗물에 떠밀려 거리를 거닐며 흘러가고 있으나, 폭우 탓에 사람들이 밖에 나오지 않아 그걸 보는 사람은 없었다.
도시에 내려앉은 더러움을 씻어 내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폭우.
그렇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운디네는 비를 내렸다.
솔직히 이 정도로 힘을 쓰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라 슬슬 그만해도 될 것 같다 말해 주려던 순간.
그 속에서 운디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엔 빗물 탓에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책임을 지려는 것처럼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도 울고 있었다.
“운디네?”
-그거 알아, 라엘?
그녀는 우산을 펼쳤으나 폭우에 역으로 우산이 망가진 소년을 보며 울고 있었고.
구멍이 뚫린 지붕으로 새어들어 오는 빗물을 막는 가족들을 보며 슬퍼하고 있었으며.
무섭다며 서로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남매를 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 웃는 모습이 좋아. 우리 정령들처럼 더 이상 즐거울 일 없어 자극적인 것만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하고, 웃고, 행복해하는 그 모습이 좋아.
“…….”
-그래서 나는 내가 비의 정령인 게 싫어.
우중충한 하늘을 보게 하는 게 싫다.
어린아이들이 마음껏 밖에 나가 뛰놀고 싶어 하지만 비 때문에 참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쫄딱 젖어 기침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소풍 탓에 어젯밤 뜬눈으로 지새우던 설렘을 식히고 싶지 않았고, 우울한 기분일 때, 비를 내려 더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웃어 주면 좋겠다.
-나는 늘 그랬어,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리는 비가 멎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슬슬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고 하늘을 바라본다.
밤을 지나 새벽까지 세차게 몰아붙이던 폭우의 끝을 느낀 것이었다.
폭우 속에 잠들지 못한 아이들도 하나둘 부모를 따라 나와서는 평소에는 보지 못한 물에 잠긴 거리를 보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는 있었어.
그저 천천히, 손을 들어 비구름을 개어 주자.
해가 떠오른다.
근 사흘간 먹구름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따스한 빛이,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산맥을 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빠! 해 떴어!”
“3일 만이네. 빨래나 널까?”
“웅! 좋아!”
이른 새벽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오랜만의 일출을 구경하며 밝게 웃는다.
다들 해가 뜨길 기다렸다는 듯 나와서 새벽임에도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
비가 그치니 사람들이 웃는다.
운디네의 입장에선 자신이 사라져야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것.
누구보다 사람들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한 그녀였지만, 그들에게 미소를 선물하려면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대에 정령들이 이 세상에 나돌며 자연 그 자체이던 때와는 다르다.
그녀는 내게 귀속되어 있으며 나와 함께한다.
“어때, 마음에 들어?”
비가 그치면 그 대지를 떠나야 했던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 그녀는 내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너무 아름다워.
운디네는 더없이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가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해 줘.”
손끝에 하얀 결정을 만들어 운디네에게 건넨다.
근 3일간, 나와 운디네, 라푼젤이 만들어 낸 작전의 마지막을 알리는 축포.
그녀는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는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긴 밤이었어, 진짜 끝을 내고 올게.
“그래.”
그리 말하곤 운디네는 천천히 음지쪽으로 내려갔다.
사실 비가 온다고 해서 모두가 슬퍼하고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뭄 속의 소나기는 농부에게 더없는 축복이며, 사막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비가 아니야.’
운디네는 자신을 비와 파도의 정령이라 칭했지만, 그건 그녀가 자신의 진짜 역할을 싫어하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말한 것뿐.
운디네의 진짜 이명은 ‘호우와 범람의 정령’.
한마디로 재앙의 정령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예전에는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겠지.
‘일 처리도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는 거고.’
마약을 제조하고 키우던 하우스와 그 옆의 시설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운디네가 특별히 신경을 썼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어머, 저기 봐. 잘 떠다니네.
어느새 내 옆에 나타난 라푼젤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말람의 골짜기’는 폭우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위에 인력시장의 표지판이나 팻말, 사무소 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까 개막을 알리던 천뢰가 제대로 맞아 떨어진 듯하다.
-운디네는 간 건가?
운디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를 비켜 줬던 테토도 합류했다.
-제일 맛있는 부분을 넘겨줬구나?
작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말람의 골짜기 앞에 도착한 운디네를 바라봤다.
* * *
“우와아!”
“그치? 진짜 짱이지!”
음지에 사는 7살 소녀 리카는 짧은 7년의 삶 중 가장 크게 놀라고 있었다.
여기까지 데려와 준 옆집 남자아이 체르먼이 처음으로 멋지다고 느껴질 정도로.
두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퍼지들이 성지와 음지를 가르는 ‘말람의 골짜기’ 앞에 서 있었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내린 엄청난 호우가 말람의 골짜기를 가득 메웠기 때문.
다들 신기해하면서 떠내려가는 건물을 보고 호들갑을 떨거나 웬 이상한 붉은색 약초가 대량으로 물에 잠기는 걸 보고 의아해하기를 잠시.
하늘에서 한 소녀가 내려왔다.
고운 푸른색 머리카락이 발뒤꿈치에 닿는 그녀가 마치 호수에 똑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리카는 생각했다.
“아름다워.”
누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녀는 정말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친 리카는 자신을 보고 싱긋 웃어 주는 미소에 저도 모르게 흥분하며 오두방정을 떨어 댔지만, 다들 리카에겐 관심도 주지 않았다.
왜냐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품에 소중하다는 듯 품고 있던 하얀색 결정을 조심스럽게 말람의 골짜기를 가득 메운 물 안으로 넣자.
쩌적! 쩌저저적!
그 모든 물이 단숨에 얼어 버렸으니까.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어느샌가 그 소녀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게 다들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두 아이가 통통하고 얼음 위에서 뛰기 시작했다.
리카와 체르먼.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지면서도 두 아이는 호들갑스럽게 뛰었고 결국 반대편에 도착했다.
성지에.
팔독 기사단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으며, 퍼지라면 노예가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발을 디딜 수 없는 그 땅에.
소년과 소녀는 너무도 손쉽게 도달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자 퍼지들은, 아니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얼어붙은 골짜기를 건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