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음지는 대체로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는 침울하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리는 듯했다.
대지 자체가 슬픔을 담고 있는 게 하늘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느껴진다.
그런 음지에서도 유일하게 사람들의 활기를 띠고 있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인력시장.
정말 이곳이 음지가 맞는 건가 싶었는데, 인력시장 근처로 오니 판자로 되어있던 집촌은 점차 보이지 않고 깔끔한 여관이나 커피숍, 음식점 등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여긴 또 아예 분위기가 다르네?
“노예를 사러 온 성지 시민이나 외지인들이 모이니까 자연스럽게 여기만 발전한 거겠지.”
바람직한 발전이라고는 볼 수 없었기에 눈을 돌렸다.
멋들어진 새 간판에 떡하니 적혀 있는 ‘인력시장’.
근처는 시장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는데, 제도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여성 노예를 보는 중년 귀족,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르듯 노예를 사 달라고 말하는 어린 여자아이, 힘이 좋은 노예를 얻기 위해 술통을 들어 보라고 시키는 귀부인 등.
여기저기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인력시장 입구 옆에 있는 ‘사무소’라는 팻말 앞 좌르륵 줄 서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목걸이를 걸고 있는 애꾸눈의 육포를 씹어 먹고 있는 남자.
“저기서 등급을 매기나 본데.”
-젊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고 노인부터 시작해서 어린애들도 있는 것 좀 봐!
운디네가 다시금 분을 내며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러 댔지만, 참아야 할 때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그 이상으로 날뛰진 않았다.
“…….”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따라 시선이 줄의 끝부분으로 자연히 움직였다.
아직 오전인지라 장이 이제 막 시작이 된 건지 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는데, 중요한 건 누군가 끌고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
한마디로 음지의 퍼지들은 자신의 발로 직접 노예가 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대강 큰 틀은 이해가 되었다.
음지에서의 퍼지 생활보다 성지에서의 노예 생활이 더 낫다고 그들은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환경이 나아지지만, 자유를 포기한다.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우는 참으로 잔혹한 방식으로 퍼지들의 사회는 돌아가고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못 보겠으면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아.”
어차피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상태니까 운디네에겐 나름의 배려로 말한 것이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니, 나도 확실하게 이 두 눈에 담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전부 쓸어버리고 싶지는 않거든.
하는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이 드는 운디네였으나, 정령으로써 살아온 세월 탓인지 중요한 순간에는 그녀 나름의 책임감을 보였다.
“그래, 들어가 보자.”
인력시장은 간단하게 네 가지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가장 크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성노예 구역.
두 번째는 집안일이나 각종 잡일 등을 처리할 가사 노예 구역.
세 번째는 중노동이나 위험하고 거친 일을 맡기는 노동 노예 구역.
네 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노예들을 모아놓은 잡노예 구역.
그곳에서도 노예는 A급~F급까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었으며 그 금액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아니, B급이 뭐 이렇게 비싸요? 이 정도 금액이면 싼 A급 사고 말지.”
“아이고 부인, 이놈이 손가락이 세 개가 잘려서 B급이지 외모만으로는 A급이여요. 이 금액에 이만한 얼굴 어디 가서 못 사죠.”
사람의 가치를 가지고 흥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흠, 그 정도 가격이면 이 꼬마 세 명을 전부 사들이지.”
“감사합니다, 나으리. 뭐 따로 원하시는 옵션은 있으실까요? 요즘 날랜 애새끼들이 돈 받고 튀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데려가는 분들도 계신데요.”
“필요 없다. 부수려고 데려가는 것들을 부순 채로 데려가서 무슨 재미가 있다고.”
사람답지 않은 대화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나……. 못 참겠어.
“나도.”
결국 나와 운디네는 인력시장에 들어온 지 고작 10분 만에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펼쳐질 줄은 몰랐다.
세상이 다 끝난 듯 우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격이 매겨지길 기다리거나 구입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찌르르 따가웠다.
‘내가 패배했기에.’
천마주교 파이엔이 승리하게 두면 안 됐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지금 있는 힘의 일부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런 미래가 펼쳐지지는 않았을 텐데.
자책감이 따가웠던 가슴에서부터 시작하여 먹물이 퍼지듯 온몸에 삽시간에 퍼져 왔으나,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후회를 아무리 한다고 해서 현재가 바뀌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옳은 방향으로 걸음을 걷는 것이었다.
‘멍청하게 자괴감에 빠지지 않겠다.’
죄는 짊어지되 그것에 메일 생각은 없었다.
* * *
로즈 모텔에서 내어준 객실 침대에 몸을 누인다.
가장 좋은 방으로 주었다고는 듣긴 했는데, 확실히 지금까지 사용했던 침대 중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찻잔을 욕조처럼 쓰며 목욕하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는 운디네를 뒤로한 채, 테토를 소환했다.
-음, 저건 또 왜 저러고 있지?
“오늘 좀 역한 걸 많이 봐서인지 힐링이 필요하다고 저러던데.”
-물의 정령이 목욕이라니 진기한 광경이군.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안 씻는 것처럼 들리잖아!
-안 씻지 않나.
“안 씻잖아.”
-씨, 씻을 필요가 없는 거지! 우리가 물 그 자체인데 씻어서 뭐해!
얼굴을 붉히며 삿대질하는 운디네의 반응에 웃으며 테토에게 물었다.
“네가 봤다던 마약을 재배하던 하우스는 어디 있어?”
-잠시.
스르륵 흙이 되어 사라진 테토는 5분 후, 다시 그 자리에 사라질 때와 똑같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조금 멀다. 인간의 발걸음으로는 족히 두 시간은 가야 할 것 같군.
-너 기사단장도 암살해야 한다며. 마약 쪽도 건드려도 괜찮은 거야?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 다 놓친다?
-흠, 의도하지는 않았고, 개인적으로 불편하지만 운디네의 의견에 동의한다.
-저건 꼭 사족을 달아요. 너 남은 머리털도 다 뽑히고 싶냐?
“어휴, 그만 좀 싸워라, 이것들아.”
싸울 기미가 보이는 둘의 대화를 끊으며 말을 이었다.
“테토, 하우스 지키던 기사단 문양이 개가 칼을 물고 있던 문양이야?”
-맞다, 팔독 기사단이라고 하더군.
“좋아, 암살이랑 하우스 파괴는 같은 날 진행한다. 둘 중 한 곳만 건드려도 벌집 쑤셔진 벌처럼 날뛸 테고 그러면 더 힘들어져, 그냥 한 방에 끝내자.”
-나름 맞는 말이네.
-흠…….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둘 다 오래 봐 줄 수 없어서 그래.”
주인장에게 받은 기사단장 폴트텍의 자료들을 훑고 있는데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 버린다.
괜히 기사단장이 아닌지, 팔독 기사단의 기사 중 하나의 기억을 읽었을 때와 레필리아 수용소의 간수 델핀의 기억을 읽었을 때 봤던 그들의 악행은 정말 별거 아니었다.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그의 행보들이 줄줄이 적혀 있는 글귀에는 이걸 적은 주인장의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분노도 얼핏 느껴질 정도였다.
“콘서트까지 남은 기간은 4일. 그동안 나는 필요한 걸 준비할 테니, 너희는 관련된 정보들을 모아 줘, 라푼젤.”
-주인공은 원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뭐래니. 비중이 없는 거겠지. 너 있는 것도 까먹었다, 얘.
-또 시끄러워지겠군.
라푼젤이 우아한 포즈와 함께 등장하자 시작부터 바로 선빵을 박아 버리는 운디네와 테토.
또다시 세 정령이 투덕거리기 시작하는 걸 뜯어말리며 팔독 기사단과 기사단장 폴트텍 그리고 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 *
“편하게 주무셨나요?”
“예, 객실이 좋더라고요.”
“어머, 빈말이라도 감사해요.”
호호하고 입을 가리며 웃는 로즈 모텔의 여주인.
해바라기 주인의 부인이라고 들었는데, 해바라기의 주인장은 마초 느낌이 있고 이쪽의 여주인은 정반대인 단아함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둘이 같이 서 있으면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여기 괜찮은 음식점은 어디 있나요?”
“아침이라면 사거리 앞에 있는 노란 간판이 있는 집으로 가 보세요. 맛집이라고 나름 사람들이 많이 가요.”
“좋네요.”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온다.
우중충한 하늘이 햇빛을 가렸고 한창 추워지는 시즌인지라 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노란 간판의 가게로 들어가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주로 나이가 많은 어르신분들께서 식사를 하고 계신 게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집은 맞는 것 같았다.
“모닝 세트로 주세요.”
자리에 앉으며 주문을 넣자 무표정한 점원이 힘없이 주방으로 갔다.
“테토.”
-확인하지.
잠시 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테토는 금방 다시 돌아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곳 역시 그걸 조미료로 사용하고 있다.
“오케이.”
덜그럭 음식이 나온다.
따끈따끈한 찐 감자와 토마토 수프 그리고 빵 몇 조각.
맛을 내기 제한적인 메뉴들을 가지고 맛집이라고 평가받는 거 보면 확실히 주방장이 실력이 있는 듯했지만, 나는 접시를 들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점원이 다른 손님에게 서빙을 하던 중이라 손쉽게 주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푸짐한 얼굴의 주방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향해 물었고.
“음식에 약이 들어 있는데?”
“예?”
“안에, 약이, 들어 있다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음식을 처박았다.
뚝뚝 끊어서 강조하자 주방장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삐질삐질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빙을 보던 점원도 무슨 일이냐며 주방에 왔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확실히 음식 냄새는 좋아. 배고파서 금방이라도 먹고 싶은데 입에 넣으면 안 되는 조미료가 음식에 들어가 있잖아.”
“그……그게 사실은.”
“알아, 팔독 기사단에서 준 조미료라는 거. 내놓는 음식에 무조건 넣으라고 명령했겠지. 아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겠고.”
“그래, 맞아요. 그게 마약인 줄은 몰랐어요!”
“너희 덕분에 이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마약중독자가 된 거야.”
슬쩍 손님들을 향해 눈을 돌리니 멍한 눈동자로 기계처럼 음식을 집어 먹거나 아니면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대고 있었다.
“그리고 몰랐다고? 거짓말하지 마. 손님들이 너희가 쓴 마약에 중독되면 어떻게 할까? 계속 이 가게에 찾아와서 너희 음식을 먹겠지.”
마나를 움직여 주방 뒤쪽 창고에 있는 금고를 깨부수자 우수수 떨어지는 현금다발들.
테토가 미리 확인한 덕분에 어디에 뭐가 숨어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겠지. 힘들기도 했을 거야. 그런데 그냥 음식에 가루 조금만 뿌려 주니 음식점 매출이 뻥 하고 늘었겠지.”
“…….”
“너는 인간성과 민족을 팔아 배를 불린 거야, 그리고 그런 사람을 우리는 매국노라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