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와그작와그작
“라엘 님이 들어오시긴 하셨지만, 저희는 앞으로도 도망친 퍼지들을 모으거나 탈출하는 퍼지들을 도울 생각입니다.”
와그작와그작
“하지만 그렇게만 하기엔 라엘 님의 전력을 그냥 썩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라엘 님의 진짜 힘이 어디까지…….”
말을 멈춘 레온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비스킷을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아니 이게 오묘한 짠맛이 손이 계속 가게 만들었다.
“구래어 무가 구그하거야?”
비스킷을 오물거리며 묻는 내 모습에 레온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진짜 정체가 궁금합니다. 1급 마나량을 가지고 계시다고는 들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 정도 가지고는 맥 포르치도 상대하기 벅찹니다.”
그런데 숑과 맥 포르치 둘을 동시에 상대했다.
물론, 내가 두 사람을 쓰러뜨리는 건 주변 시야를 차단해서 보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세상의 마도는 생각보다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듯하다.’
물론, 내 자신이 동굴에 있던 5년간 비약적인 성취를 이루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약했다.
특히나 현 대마도사의 제자라는 극독의 숑은 실망을 넘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나 역시 같은 대마도사의 제자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대마도사의 제자라는 의미를 가진 마도사의 칭호를 달고 있으면서 이 정도 수준이라니.
“마나량이 1급인 건 사실이야. 그냥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고 생각해 줘.”
내가 더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내비치자 레온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알려지면 역으로 피곤하다. 나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강하게 나오지는 못하는 걸 안다. 갑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마음대로.”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점입니다만, 저희는 앞으로 아르니티에서 해방되기 위한 싸움을 이어 갈 겁니다.”
저번에도 말했듯 에레오나가 아르니티를 무너뜨리기 위함이라면 레온은 아르니티에게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라엘 님은 신교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싸우신다고 하셨죠.”
이는 엄연히 다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자유였고 내가 원하는 건 파괴니까.
“마도제국이던 아르니티는 이제는 엄연히 종교에 의해 움직이는 성국이 되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우선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괜찮을까요?”
한마디로 신교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도 도움을 바랄 수 있냐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에서 배운 여러 마법을 시험하고 싶기도 하니, 여러 상황에 노출되는 건 내 입장에선 환영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참, 나는 에레오나랑은 말을 텄어. 그러니까 너도 말 편하게 해.”
“그건…….”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리더인 네가 단순 식객인 나한테 존대하고 눈치 보는 건 썩 좋은 광경은 아닐 거야.”
“……고마워.”
머뭇거리는 레온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물론 레온의 리더로서의 입지에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건 사실 부차적인 이유였고, 그냥 내가 227살이라는 걸 잊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다.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깎인단 말이지.’
“앞으로의 계획을 잠시 모여서 얘기하기로 했어. 혹시 같이 와 줄 수 있을까?”
“그런 자리에는 보통 요깃거리가 있던데.”
“크래커 정도라면.”
“좋아.”
와그작 와그작
그렇게 30분 정도 기다리니 회의에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울려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하늘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울려서 깜짝 놀랐던 건 비밀이다.
말한 곳으로 모이니 레온과 에레오나부터 시작해서 텐과 톨레스 그리고 창을 다루던 여인 루이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래요, 말 놓으세요.”
슬슬 귀찮아서 대충 말하자 루이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 씨익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시원시원하네. 맥 포르치를 상대로 이겼다고 들었어. 나중에 대련 한 번 부탁할게.”
“그건 조금 고민해 볼 여지가 있겠어.”
맞잡은 얇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굳은살.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 무인인지 악수만으로도 느껴졌다.
슬슬 자리에 앉을까 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게로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음?”
어색하게 의자에 앉았으나 여전히 내게로 시선이 쏠려 있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레온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지도가 나타난다. 이것 역시 마나를 통해서 만들어 냈는지 미약하게 마나가 느껴졌는데, 마법사의 수준은 예전과 엇비슷하더라도 도구에 대한 진보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물건들을 보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한 번 공부를 하든지 전체 기억을 읽든지 해서 기본적인 지식을 좀 깔아 둬야 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이렇게 많이 바뀌다니.’
극소량의 마나로 이렇게 자세한 이미지를 구현하는 건 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일단은 이곳, 펠른을 주 거점으로 삼고 활동할 예정입니다.”
제도 아르니와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었지만 그편이 오히려 더 안전했다.
“최우선 목표는 다른 혁명군과의 합류입니다.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레온의 말에 에레오나가 한숨을 내쉬며 반박했다.
“로마르코 대장이 이끌던 혁명군이 사라진 이후, 우리 혁명군이 나누어진 이유가 뭔지 정말 아직도 모르는 거야?”
자신들의 리더에게 공격적으로 말하는 에레오나를 인상을 쓰며 바라보는 루이나와 텐이었으나 말을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쪽의 거북이는 껍질 안에 숨어서 살 궁리만 하고 있어. 아르니티와 협력하며 공생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돈다고 하더라.”
철거북 혁명군에 대한 이야기.
“북쪽의 청색횃불은 아르니티를 친다며 타국의 힘을 빌리겠다고 하고 있고, 가장 큰 동쪽의 멍청이는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
말을 하면서 분통이 터지는지 에레오나는 주먹을 쥐며 목소리가 커졌다.
“남쪽의 사자라는 너희는 1년 전 상처를 입은 후, 퍼지들을 모으고만 있을 뿐 막상 정이 들어서 출혈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어.”
탕하고 책상을 내리친다.
“우리 자벨린 부대만이 싸우고 있었어. 우리만이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고! 찬탈자 로마르코를 주축으로 모였던 최초의 혁명군은 그의 희생과 함께 사라졌어. 지금은 그저 자기 잇속만 챙기고, 목숨만 구하려는 머저리들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 병력으로 아르니티와 싸울 수는 없어.”
“너는 여전히 그딴 변명만 내뱉고 있구나. 실제로 행동한 적도 없으면서.”
비릿한 적의와 함께 에레오나가 다시금 입을 뗀다.
“우리 자벨린 부대는 17명이라는 가장 적은 숫자로 구성되어 있었어. 혁명군이라는 이름을 자칭하기도 힘든 소규모였지. 비록 9명의 동포를 잃었지만, 우리는 주교의 암살은 물론이거니와 아르니티의 무기 창고를 폭파시킨 적도 있어.”
“…….”
“이래도 인원이 문제야? 이래도 전력이 부족해? 아니야! 너는 그냥 너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따위 변명만 내뱉고 있는 것뿐잖아! 정신 차려 레온 엘 라디어트! 피 흘림 없이 자유는 있을 수 없어.”
“흠.”
다들 침울한 가운데 나만이 흥미롭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르니티와 혁명군의 관계 그리고 혁명군과 또 다른 혁명군에 대한 흐름을 파악 중이었다.
“네가 아르니티에 피해를 입힌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대세에 큰 영향을 끼쳤을까?”
레온의 물음에 에레오나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무기 창고를 폭파시킨 건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그걸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한다고 해서 저 거대한 제국은 무너지지 않아. 우리에겐 확실한 힘이 필요해. 제국은 거대한 성이야.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는 게 아닌, 성문을 무너뜨릴 병기를 얻는 거야.”
게릴라전 같은 자잘한 공격으론 견고한 아르니티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레온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르니티에게, 신교의 무뢰한 놈들에게 고문당하고 피 흘려 죽어 가는 자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우린 힘이 필요하니까 아직은 기다려 달라고? 언제일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 달라고?”
“맞아! 버텨야 해! 그게 바로 내가 선택한 피 흘림이야. 누구도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어. 모두가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언젠가 이 지옥 같은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고 평등의 자유가 찾아올 거야. 다름 아닌 우리 손으로 그렇게 만들 거야!”
“두 분 모두. 너무 과열되셨습니다.”
“일단은 머리 좀 식히고 오시죠.”
나이가 가장 많은 텐과 톨레스가 각자 레온과 에레오나에게 붙어 두 사람을 진정시킨다.
에레오나가 톨레스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레온이 자리에 앉아 열을 식힌다.
“한참 있다 시작할 거지? 시작할 때 다시 불러.”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이나 역시 나와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텐이 레온을 진정시킬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루이나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현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나는 잘 몰랐는데 혁명군이 여러 개인가 봐?”
내 물음에 루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전에는 찬탈자 로마르코가 이끄는 하나의 혁명군이었어. 그때는 모두가 함께였지. 레온도, 에레오나도.”
그립다는 표정으로 루이나는 차를 타기 시작했다. 쓴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지만, 흥미가 생겨 한 잔 받았다.
“하지만 로마르코가 아르니티에게 처형당한 후, 혁명군은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찢어졌고 지금은 서로 제대로 된 연락 수단도 없이 각자 생존하고 있지.”
가장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로마르코의 의지를 잇는다고 말하는 동쪽의 자유 혁명군.
강 옆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극도로 방어에 치중된 서쪽의 철거북 혁명군.
인접 국가인 합루스크의 지원을 위해 교섭 중인 북쪽의 청색횃불 혁명군.
그리고 남쪽의 이곳, 제도 아르니와 가장 가까이에서 활동 중인 사자 혁명군.
이들 말고도 에레오나처럼 소규모로 운영 중인 부대도 몇 있으나, 실질적으로 가장 큰 혁명군은 저 네 곳이었다.
물론 이건 1년 전의 이야기고, 사자 혁명군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으며 남쪽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같은 자유를 위해 싸운다면서 막상 그 길을 향한 방법은 다 다른가 봐.”
내 말에 루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혁명군이 이렇게 분열하는 걸 가장 원하는 건 다름 아닌 아르니티 제국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신념 탓에 모두들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사실 혁명에 비관적인 퍼지들도 많아. 우리 탓에 아르니티의 핍박만 더 심해진다고.”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지.”
결국,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눈치 싸움을 하는 와중에 피를 흘리는 건 다른 시민들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나름의 커피 타임을 가지고 있자니 미오가 총총 뛰어와서는 회의가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 줬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 안은 당연하게도 분위기가 무거웠다.
레온과 에레오나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침묵으로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회의를 진행할까요?”
“해 봤자 어차피 평행선이 뻔한데요 뭐. 쟤네 둘 봐요. 그냥 뻣뻣하게 지가 맞았다고 하고 있네.”
“잠깐!”
“뭐?”
텐의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레온과 에레오나가 동시에 나를 노려본다. 마침 내게로 시야가 쏠린 김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둘이 하는 얘기는 잘 알겠어. 한 사람은 당장에라도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한 사람은 힘을 비축하며 확실한 한 방을 먹여 줘야 한다는 거잖아.”
“요약이 참…….”
“에헴.”
옆에서 루이나가 중얼거리는 건 무시하고 다시 이어간다.
“그럼 둘 다 하면 되겠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건만 에레오나가 벌떡 일어나서는 말한다.
“레온과 나는 물과 기름이야. 전혀 맞지 않아. 우리 부대의 생존자들을 다시 모아 준 건 고맙지만 우린 다시 독자적으로 활동하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서야 똑같아. 레온 혼자서 다른 혁명군에 협력을 요청해 봤자 현 상황과 다를 건 없어. 너와 레온이 함께한다면, 대칭인 두 사람이 함께한다는 걸 다른 혁명군에 알린다면 조금은 그들을 움직일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어?”
지금까지 서로의 신념이 맞지 않아 단독으로 행동하던 두 사람이 협력한다.
다른 혁명군도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을까?
가령, 예전 하나의 영웅 아래에서 다 함께 자유라는 이름의 깃발을 들어 올렸던 자신들을.
“별동대를 운영하자는 이야기 아니었어?”
에레오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현재 혁명군에 영향력은 크게 없지만 겁나게 강한 사람이 별동대를 운영하면 외실과 내실 둘 다 잡을 수 있잖아.”
“그 말씀은.”
말끝을 흐리는 톨레스에게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별동대를 운영하여 타격을 줄게. 다른 곳에는 눈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정신없게 만들 자신 있어.”
농담이 아니라 놈들이 자칫 빈틈을 보였다간 아예 부숴 버릴 자신도 있었지만, 굳이 거기까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멤버는?”
“일단 첫 번째는 당연히 나.”
척하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니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딱 한 번의 전투였지만 내 강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에레오나가 대답을 재촉하자 나는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끝.”
“뭐?”
“끝이라고, 별동대는 나 혼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