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결국 정리하자면 제도 아르니는 성지와 음지로 분리되었다.
성지에는 마교(신교)를 믿는 신민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음지에는 그렇지 않은 퍼지들이 차별받고 핍박받으며 살아간다.
노골적인 차별이지만 그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역사가 지금까지 그렇게 쓰여 왔고 그걸 당연하다 여기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일단은 이 정도면 되실까요?”
“예, 아주 충분합니다.”
세밀한 부분은 아직 부족했으나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졌다. 그리고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건 성지뿐이었나.’
이 세상에 나오고 잠깐 봤던 평화로운 세상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할 일이 정해진 듯싶었다.
‘일단 신교를 무너뜨린다.’
신교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악신과 그를 믿으며 부조리함이 당연시되게 만든 숭배자들.
천마주교 파이엔이 만들어 낸 거짓된 종교를 이 세상에서 전부 멸절시켜 버릴 것이다.
“혹시 나도 혁명군에 들어갈 수 있을까?”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온이 당황하며 되물었고, 텐 역시 낮은 신음을 흘리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정적.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게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동료로 받아 달라는 게 아니야. 그런 건 내겐 필요 없어. 나는 너희를 정보를 주는 우편부 정도로 생각할 거고, 너희는 나를 ‘무기’로 생각하면 돼.”
뜻밖의 제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자는 의미였고 무작정 믿어 달라는 말보다 오히려 믿음을 주는 한마디.
“원래 무기는 얻으면 한 번쯤 휘둘러 보고 싶어지지.”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나는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정말 이루고 싶은 소원을 하나 말해 봐.”
내가 너의 지니가 되어 주리라.
* * *
라엘이 떠난 뒤, 그와 싸웠던 동료들이 누워 있는 천막으로 향한 레온과 텐.
혹시 모르니 일단 안정을 취하라며 침대에 눕혀 놨었지만, 한곳에 모아 놓으니 자기들끼리 떠들고 싸우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야 미오! 네가 데려온 애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정신 안 차려?”
“그래도 결론적으론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해를 가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너 맨날 약하니까 처맞는 거라는 말 입에 달고 살지? 너도 약해서 처맞은 거야!”
“아…… 안 맞았거든!”
입이 꽤나 험한 남자아이, 에딘과 미오가 한참을 싸우고 있었고, 창을 다루던 여인, 루이나는 그런 두 사람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나, 애들이 싸우면 좀 말려.”
“제가 말린다고 애들이 말려지나요. 그리고 보기엔 나름 귀엽잖아요.”
레온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루이나.
지금 혁명군의 최고 전력인 루이나조차 무엇 하나 해 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까지 앞에 서 있던 남자를 향한 두려움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라엘이라는 남자는요?”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조금 껄끄러워 잠시 머뭇거린 루이나. 그녀의 물음에 에딘과 미오 역시 싸움을 멈추고 레온을 바라봤다.
“혁명군에 들어오고 싶다네.”
그 말에 에딘은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어이없다고 소리쳤다.
“들이실 거예요?”
“모르겠어.”
그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다 왔는지 그 출신을 모르면 혁명군에 받을 수는 없다.
갑자기 등에 칼을 꽂을 배신자일지, 아니면 신교 측과 내통 중인 스파이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라고 처음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레온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 치졸한 수를 쓰지 않아도 그는 이미 사자 혁명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으니까.
“기인이라고 봐야 하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만 흘러나왔다. 마지막에 그가 했던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어디로 갔어?”
“떠났어.”
벌떡 침상에서 일어난 미오가 “엥?” 하는 소리와 함께 레온을 바라봤다.
“혁명군에 들어오기 위해 내 믿음을 얻는다며 레펠리아 수용소로 갔어.”
“예? 아니 왜요?”
“잡혀 있는 혁명군 동료들을 해방시키는 걸 소원으로 말했거든.”
레온의 말에 다들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되며 적막이 텐트 안을 가득 메웠다. 떠나간 동료들, 잡혀간 동료들 이야기를 하면 늘 이랬다.
“그렇다고 혼자서 갔다고요? 거긴 지금 아르니티에서도 손꼽히게 보안도 삼엄한 데다가…….”
“맥 포르치도 있잖아.”
“…….”
철의 수용소, 레펠리아.
그리고 레펠리아의 가장 높은 벽이라 불리는 하얀 늑대 맥 포르치.
혁명군도 몇 번이나 자신들의 동료를 탈옥시키기 위하여 레펠리아에 잠입했으나,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맥 포르치의 압도적인 무력 탓이었다.
“루이나 누나는 맥 포르치랑도 싸워 봤잖아. 어때? 그 쫌팽이가 포르치를 이길 수 있을까?”
에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루이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라엘이라는 분은 규격 외의 강함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수용소 안에선 아마 통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마법사에겐 무덤 같은 곳이니까.”
에딘이 “결국 뒤지겠네.”하고 팔짱을 끼며 혀를 찼고, 미오 역시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선, 이 거점은 버리자. 그가 마음이 변해서 이 장소를 밀고하면 끝이니까. 최근 해체된 자벨린 부대의 인원들을 흡수하면서 펠른으로 장소를 옮긴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온이 작은 희망을 담은 채 말했다.
“그가 정말 동료들을 구해 온다면 펠른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 * *
“오, 저긴가 보네.”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감시탑과 높게 치솟아 둘러싸고 있는 벽들. 딱 보기에도 삭막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수용소라고 대놓고 말해 주고 있었다.
“으음, 으으음?”
눈을 감고 들어오는 기억들을 정리한다.
제도 아르니 바깥, 성지도 음지도 아닌 곳에 지어진 이 수용소는, 퍼지들만 수감자로 있으며 상당히 가혹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간수들은 이 안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의 신처럼 수감자들에게 군림하고 있었으며, 소장인 맥 포르치라는 남자는 이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죄수들을 다루는 데 더 수월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
‘분명 선황께서 노예 제도는 폐지하셨는데.’
다시금 살아난 노예제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
천천히 눈을 뜨고 기절한 간수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네가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이런 죽음도 사치다.”
퍼억 하고 마나를 응축시켜 기절한 간수의 머리를 터트린다. 피가 여기저기 튀었으나 두르고 있는 보호 마법에 막혀 내겐 닿지 못했다.
“분명 예전에는 조금 더 살기 괜찮은 곳이었는데.”
정말 극형에 처해질 죄수가 아니라면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 주었다. 권력에 취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귀족들이 가끔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런 자들을 막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기사단이 움직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사단도 그에 동조하며 나라 전체가 음지에 살고 있는 퍼지들을 가축 이하로 보고 있다.
심지어 이 안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간수들이 심심하다며 수용된 인원들도 있었다.
“그럼, 해볼까.”
더러워진 간수복을 깨끗하게 하니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 * *
죄수번호 4124번 톨레스에게 인생이란 쇠창살 그 자체였다.
젊은 날에는 가문이라는 이름의 쇠창살 안에 갇혀서 살아갔다면, 노년이 되어 가는 지금은 레펠리아의 쇠창살에 갇혀 살아간다.
혁명군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제국군의 발목을 붙잡는 임무를 수행하던 와중,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잡혀 온 지 벌써 5년.
가축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곳에서의 삶은 그 나름 치열하다면 치열했다.
“야! 711번! 얼른 안 일어나?”
“자, 잠시만요.”
“뭐? 잠시만요? 이게 미쳐가지고!”
매일 같이 행해지는 과도한 강제 노역.
711번은 팔다리가 후들거리며 볼은 움푹 패 있었는데, 이틀 전부터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텔런, 뭐 하는 거야. 걔 건들지 마!”
“쳇.”
텔런이라 불린 간수가 다른 간수의 만류에 진압봉을 뽑으려다 침을 뱉으며 손짓으로 다시 711번을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가혹 행위를 말린 간수는 711번에게로 오더니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앞으로 딱 하루만 더 버티고 죽어, 알았지? 그래야 내가 돈을 번단 말이지.”
간수들은 이런 식으로 수감자들을 가지고 내기를 벌일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 711번에게 걸린 내기는 ‘밥을 주지 않고 며칠을 살 수 있을까.’였다.
“어제 다리 부러뜨리고 달리기시켰던 애는 어디 있지?”
“아, 1174번이었나? 근데 왜?”
“적어도 한 바퀴는 돌 줄 알았는데 반 바퀴 만에 나자빠져서 돈을 잃었거든. 오늘은 팔도 부러뜨려 주려고 했지.”
“클클, 이미 돈 잃은 다른 놈들이 조져 놔서 지금 움직일 수도 없을걸?”
역겨운 대화 소리.
언제 들어도 분노로 주먹이 쥐어지지만, 톨레스는 숨을 한 번 고르며 애써 화를 억눌렀다.
60대를 바라보는 그는 바깥에서는 인자한 노년이었으나, 이곳에 있으면서 인간답지도 않은 쓰레기들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보니 차오른 화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델핀은 어디 갔어?”
“오늘 바깥 순찰 순번이었잖아.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걔가 찜해 놓은 년이 1174번이었나? 오기 전에 맛이나 한번 봐야지.”
“그 새끼 성격 더러운 거 알면서 그러냐?”
“뭔 상관이야. 애초에 누구께 어딨냐, 다 우리 거지.”
“뭐라고?”
두 간수의 뒤에 언제 다가온 건지 눈치도 채지 못하게 서 있는 델핀이라는 간수.
그의 등장에 두 간수는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옛말이 틀린 거 하나 없네. 야, 지가 찜한 거 건든다 했더니 얘 표정 봐라. 누구 하나 죽이겠다.”
“이번엔 델핀한테 양보해. 너 저번에도 델핀이 찜한 애 건드렸다가 싸움 나서 소장님한테 불려 갔잖아.”
“에이 씨, 그때만 생각하면 기분 더러워지네. 그래 알았다. 이번엔 양보할게. 대신, 다 쓰면 나도 줘.”
킬킬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다른 수용자들을 구타하러 가 버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델핀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1174번이면 에레오나 님인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톨레스는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에레오나 역시 혁명군으로, 이곳에 들어온 지 고작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레온이 이끄는 사자 혁명군과는 다른,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자벨린 부대의 리더.
‘하지만 어떻게?’
이곳에서 간수를 죽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 죽여도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델핀 하나 죽인다고 에레오나를 구할 수는 없었다.
당장에 위협은 피하겠지만 수많은 간수들이 에레오나를 탐내고 있다는 건 당연했는데, 그녀가 가진 아리따운 외모도 그렇지만 자벨린 부대의 리더라는 점도 컸다.
‘그래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건 생각보다 크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자벨린 부대의 구심점인 그녀가 무너진다면 하나의 혁명군이 사라지게 되고, 그건 혁명군 전체의 사기에 큰 타격을 준다.
결국 탈옥.
그래, 그 방법밖에 없었다.
톨레스가 각오를 다지고 주먹을 쥐는 순간.
“드디어 찾았네.”
환한 미소와 함께 델핀이 톨레스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 * *
덜컹.
취조실의 두꺼운 문이 닫히며 톨레스는 긴장으로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곳은 말이 취조실이었지 실상은 간수들이 마음에 안 드는(혹은 마음에 드는) 수감자들을 데리고 와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곳이었다.
그 탓인지 취조실 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꿉꿉한 구린내와 동시에 피비린내가 내부에 진동을 하고 있었다.
톨레스를 앉힌 델핀이 철저하게 문을 잠근 후,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도대체 뭐 때문에 나를 데려온 거지?’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았다.
종종 나이가 많고 연약한 노년의 수감자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걸 좋아하는 간수들도 있었지만, 톨레스가 알기론 델핀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수감자들을 지극히 성적으로만 바라보는 부류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탐하는 추악한 존재.
그런 그가 도대체 어째서 자신을 부른 건지에 대한 의문과 설마 하는 오싹함이 등골을 스쳤으나, 델핀은 평소와 다른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를 입 위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였다.
그러자 델핀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듬직하던 체형부터 시작해서 험상궂은 얼굴이 점점 사라지더니.
몸이 마르고 뒷머리가 조금 긴 샤프한 외모의 남자가 서 있었다.
“죄수번호 4124번 톨레스 트레이먼. 사자 혁명군의 검술 스승. 텐 씨의 절친이자 검객, 맞을까요?”
“예……. 맞습니다.”
앞의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저 그것만 머릿속에 가득 차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는 톨레스에게 남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라엘. 당신들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