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쯧.”
그러지 않으려 했으나 혀가 차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자들은 명예와 신념 그리고 그에 맞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마나 한 번 뿜었다고 이렇게 땅을 빌빌거리며 기는 꼴을 보니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이쪽에 온 지 얼마 되지가 않아서 여기선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
허나, 기사단이라는 찬란한 이름이 가벼워진 현실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들의 빛과 명예도 결국 시간 앞에선 퇴색되고 바랠 수밖에 없었다.
“끄으윽.”
“이걸 이제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 녀석들의 기억을 통해 이 세계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에 대장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예전에는 무식해서 정신계 마법을 누군가한테 써 보는 건 사실 처음이야.”
이것 역시 동굴 안에서 배운 마법.
그러니 당연하게도 실전에서 써먹는 건 처음이었다.
“속이 뒤틀리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거나, 기억을 일부 잃을 수도 있지만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숙련도가 부족한 것뿐이지.”
손끝의 마나가 기절한 대장의 귀를 타고 안으로 들어간다. 가능하면 아프지 않게 끝내 주고 싶었기에 조심스레 눈을 감았고.
약 3분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복잡한 감정이 내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진보해 있었고, 평화라는 껍데기 위에 숨은 내부는 생각 이상으로 추악했다.
“너희 생각보다 쓰레기였구나.”
최근 몇 개월 정도밖에 읽지 못했음에도 나는 확신했다.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리며 쓰러진 녀석들을 압박한다.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오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해졌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묶어 놓고 구타, 그러다가 재미없다고 결국엔 사람을 지켜야 할 그 검으로 사람을 살인, 그 남자의 딸과 어머니는 겁탈.”
콰득 콰득.
녀석들의 다리가 무거운 압력에 짓뭉개지며 순차대로 팔, 허리, 어깨의 뼈들이 부러져 나갔다.
“하나같이 역겨워.”
“사, 살려 줘!”
“지금까지 너한테 그 말을 했던 사람들한테 네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방금 말한 건 정말 극히 미미했다.
이들은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짐승일 뿐이었다.
얼마나 많은 슬픔과 비극을 만들어 냈는지, 기억을 읽은 게 후회가 될 정도로 눈살이 찌푸려졌고.
“나도 너희가 했던 것처럼 해 줄 수밖에 없어.”
잔혹한 소리와 함께 결국 기사단은 찌그러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방금까지 평범하고 평화롭던 공터가 순식간에 지옥도의 일부와 같은 광경이 되어 찝찝했기에 치우려는 순간.
“음?”
특이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앞이 아닌 뒤, 지상이 아닌 지하에서.
고개를 돌리니 하수구 뚜껑이 반쯤 열린 상태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 안녕하세요.”
탁한 녹색 머리칼의 소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건네 왔다.
“친구들이랑 숨바꼭질 중이었어요!”
딴에는 자연스러운 변명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미 뒤에 즐비한 시체들을 봤을 때, 그녀는 놀라기만 했을 뿐 겁에 질린다든가 구토를 하는 평범한 반응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런 광경에 꽤나 익숙한 아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야기였고, 방금 팔독 기사단의 기억을 읽은 나로서는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혁명군?”
“……!”
소녀의 눈이 크게 뜨였지만 차렷 부동자세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반항해 봤자 자신이 도망칠 수 없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보다는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타입.
자신과는 정반대인 소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너희 거점으로 데려가 줘.”
내 한마디에 소녀의 분위기가 180도 변한다. 방금까지는 두려움에 덜덜 떨던 쥐 같은 느낌이면, 지금은 목숨을 내놓고 결사의 항전을 각오한 전사.
“차라리 죽여요.”
동료를 팔아넘긴다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렇게 어린 소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야 할 정도라니.
이 세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나는 잘 몰랐지만, 아마 나도 너희와 마찬가지로 퍼지라는 신분이야. 단순히 공터에서 쉬고 있는데도 기사단이 떼를 지어서 몰려든 걸 보면 썩 환영받는 처지는 아니고 말이야.”
“…….”
“이런 말 알아? 적의 적은 동지다. 나는 이제 기사단과 아르니티 제국의 적이 되었고, 너희도 자유를 위해 아르니티 제국과 싸우고 있잖아. 우린 생각보다 협력할 거리가 많아.”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을 동지들에게 데려갈 수는 없어요.”
소녀는 단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러면 어떨까.”
죽어 나간 기사단의 시체에서 마나 차단 수갑을 꺼낸다.
“보다시피 나는 마법사야. 하지만 이걸 착용할게.”
“…….”
소녀의 눈이 흔들린다.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는 이미 내가 기사단을 전멸시킨 이후, 기억을 읽던 와중이다.
한마디로 내게 마나 차단 수갑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는 뜻.
“어때? 이걸 착용하면 나는 양손이 구속됨은 물론이고 마나를 사용할 수도 없어.”
호랑이는 무섭지만 이빨과 발톱이 빠지고, 손과 발을 구속당해 우리에 들어간다면 그건 이제 포식자가 아닌 단순히 관상용 애완동물일 뿐.
나는 그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그녀에게 조금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이야. 이 이후에는 나도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겠어.”
“…….”
“미안하지만 나는 그냥 네 기억을 읽고 너를 죽인 다음 혁명군에 찾아갈 수도 있어.”
“…….”
단호한 말에 소녀의 표정에 두려움이 일렁였다. 너무 과격하게 몰아붙인 건가 싶어 싱긋하고 웃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너희에게 좋은 첫인상으로 남고 싶어서도 있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야.”
찰칵하고 내 스스로 손 한쪽에 수갑을 차고 반대 손과 함께 소녀에게 내민다.
그녀의 고민이 눈에 보이는 듯했지만, 결국 손을 뻗어 내 손에 수갑을 걸었다.
“수갑을 찼으니 나는 이제 평범한 민간인이야. 네가 죽이고 싶을 때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소리지.”
“알아요, 따라오세요.”
나를 견제하면서도 소녀는 내가 다치지 않고 하수구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은?”
“미오에요.”
“나는 라엘이야.”
웃으면서 이름을 말해 주었으나 미오는 역으로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무언가 여러 생각이 드는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갑자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 왔다.
“당신도 부모님이 썩 반기던 입장은 아니었군요.”
“뭐?”
“괜찮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슬쩍 옷깃을 당겨 자신의 어깨에 있는 화상 자국을 보여 주는 미오.
아무래도 이상한 부분에서 이 아이가 동질감을 느끼게 한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되묻는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고서는 부모님이 나라를 팔아먹은 학살자의 이름을 지어 줄 리가 없잖아요.”
“나라를 팔았다고?”
“정말 몰라요?”
기사단 녀석들의 기억을 읽었어도 최근 몇 달만을 읽었기에 이런 부분에 있어선 지식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런 마법은 처음이다 보니, 읽었던 기억을 되짚는 데 두통을 동반했다.
“죄인 크리스티나의 애제자로 수많은 동족을 학살한 매국노의 이름이 라엘 텔리즈먼이잖아요.”
“…….”
“진짜 모르시나요? 하긴, 저희 같은 퍼지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한테 미움받았으면 역사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죠.”
이상한 부분에서 계속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미오가 하수구를 걸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크리스티나 엘리나가 두뇌이며 대장으로 반란을 지휘했다면, 라엘 텔리즈먼은 행동대장으로 수많은 학살과 잔혹 행위를 자행한 나쁜 놈 중에 나쁜 놈이라고 보시면 돼요.”
“내가?”
“아뇨, 역사 속 라엘 텔리즈먼이요. 사실 그 탓에 크리스티나보다 라엘 텔리즈먼을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학살자였다고?
이제는 기억 마법 때문인지 아니면 이 말도 안 되는 누명 탓인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아파 왔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며 미오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엔 따로 대화는 없었다.
하수구 안이라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으론 2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미오가 멈춰 섰다.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조심스럽게 벽의 벽돌을 몇 개 빼내니 작은 구멍과 함께 안에선 통로가 나타났다.
“신기하네.”
솔직하게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서서 30분 정도를 더 걸으니 오르막길과 함께 바깥의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니 허름한 텐트만 몇 개 있을 뿐, 그리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때, 수도인 아르니의 성벽이 보이는 거로 봐서는 아마 제도 밖으로 나온 듯했다.
바로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머리에 밴드를 차고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 딱 봐도 경비병 역할이었다.
“미오! 너무 늦어서 걱정했잖아!”
“미안 렉터. 누구 좀 데려오느라 늦었어.”
“음? 포로야? 어쨌든 얼른 가 봐. 리더가 너 안 온다고 찾으러 가야 하나 하고 애들 모아 놨단 말야.”
“알았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는 미오의 뒤를 따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갑을 차고 있어서 포로로 착각된 건가.
미오가 도달한 곳은 꽤나 크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건물.
“폐공장이에요. 여기에 저희 리더가 있어요.”
“호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붉은색 반점 하나가 내 몸을 향한다.
처음엔 몰랐는데 총구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나의 기운 덕택에 알아챌 수 있었다.
‘마도 저격용 총이랬나? 기억에서 봤던 것보다는 질이 낮아 보이지만, 흥미로운 무기다.’
기사단에게 읽었던 기억들 중 봤던 무기다.
“그는 누구지?”
남자치곤 조금 높은 미성.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혁명군의 리더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름은, 라엘이셔.”
슬쩍 내 눈치를 본 미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엘? 매국노의 이름을 지칭한다고? 저거 정신 나간 놈 아냐?”
“에딘!”
소년을 다그치는 여인의 목소리.
공장이 워낙 어두워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리더라는 녀석을 제외하고 세 명 정도가 더 있는 듯했다.
“난 내 이름에 한 점 부끄럼 없어.”
“그렇겠지. 나라 팔아먹은 건 네가 아니니까.”
아니, 진짜 내가 안 했다고.
에딘이라는 소년은 여전히 깔깔거렸지만 금방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방금 주의를 준 여성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잠잠해지니 미오가 다시금 설명을 시작했다.
만난 경위부터 시작해서 팔독 기사단을 참살시킨 것, 혁명군 리더를 만나고 싶어 하고 수갑을 차게 된 경위까지.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잠시 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혁명군의 리더가 햇빛이 드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찬란한 금발이 인상적인 미남.
키에 비해 몸이 조금 얇았지만, 입고 있는 옷 사이로 보이는 잔근육들과 허리춤의 검이 그가 보통은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혁명군을 이끄는 것보다 사교 파티에서나 보던 귀부인 혹은 그 딸들의 파트너가 떠오르는 외모.
“그래서 우리를 만나고 싶었다고?”
녀석은 천천히 검 위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