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아이슬란드를 부유한 금융 강국으로 만들었던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빠지면서 천억 불의 돈이 사라졌다. 아이슬란드의 국민들은 이제 갖난아기에게까지 한 사람당 수 억 원의 빚을 진 셈이 되었다.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없는 이상 회생 불능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과도한 외국 자본의 유입을 통해 빚잔치 성과급 잔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믿을까?
그리고 다시 한 번 경제 위기가 닥치는 아이슬란드처럼 붕괴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경제가 무너지면 주위 강국들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대리전 무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작은 체스판이 되어 러중일이 신경전을 벌이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다.
친러파, 친중파, 친일파들이 뒤엉키고 끝없는 정치 사회적 혼란이 지속될 것이다.
“현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글쎄... 나는 한국이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지만... 아무래도 거기 있는 지인들을 생각하면 도와주고 싶지.”
“그럼 그렇게 해요. 당신은 능력이 있잖아요.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요.”
“아아..”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샐리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준과 시아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물으면 말할 것도 있어야 하잖아요.”
이 부분에서 강현은 딱 선을 그었다.
“아이들은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야.”
세계화 시대다. 그리고 강현은 한국인임을 포기하며 미국을 선택했다. 그러니 강현은 미국인이다. 국적이란 그런 것이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 강현의 지론이다.
= = = = =
서재로 돌아온 강현은 오랜만에 잭과 통화를 했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한국 쪽 중국 동향이 궁금해서.”
[아아, 이미 알고 있지.]
강현의 신변에 대한 건 CIA에서도 최우선으로 다루고 있는 첩보다. 강현의 고향인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강현의 의중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CIA에서 파악한 바로는 한국에서 강현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무덤과 그의 어린시절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 뿐이었다.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에 미국으로와 미국 시민으로서 교육받은 강현에게 한국이나 한민족이라는 단어는 크게 와닿지 못했다.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CIA 국장은 한국 교육부장관에게 내심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강현같이 중요한 인물이 미국 이외의 국가에 애정따위를 가지고 있는건 국가 경쟁력의 보안에 심각한 위협사항이다. 실제로 과거 한미 미사일 개발 협정의 갱신 때에도 강현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것이 단순히 은사였던 노교수의 채면을 채워주기 위해서였다는 다실이 안심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 스케일의 크기에 강현에게 인연이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긴 연구실에 처박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그에게 가치있는 인연은 무척이나 적고 그 수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에.. 보자..]
잭은 천천히 CIA의 분석 결과를 읊어주었다. 각종 공기업의 민영화는 물론이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한국의 자산이 외국 자본에 종속되는 건 피할 길이 없었다.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기에는 세계 경제가 많이 안좋다.
이미 과거 독재 시절, 엄청난 일본 자본을 끌어들였던 한국이 이제 와서 중국 자본이나 러시아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데, 이 두 국가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일본과 달리 딱히 큰 경제적 리스크를 지지 않는 카드를 꺼내기 힘들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입 다물어 준 대가로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그런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본을 투자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유인책이 있어야 했다. 결국은 대기업이 잡고 있는 산업 영역 외의 시장을 개방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여기에는 민영화도 포함된다. 지하철 사업에서 철수한 멕쿼리 역시 외국계 자본이다.
[결국은 주위 강대국들의 완충지대로 남게 될 거야.]
“한 국가만의 자본에 종속되는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일본에게 한반도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 중국에게는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 러시아에게는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였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중국인가?”
[그렇지. 일본은 미국의 우방이니까. 러시아는 당분간 자국내 경제 문제로 동남아시아 진출까지 생각하기에는 무리니까. 그래도 차후에 한 발 걸치기 위해서 명분삼아 끈은 연결해 두겠지.]
“미국의 입장은?”
[일단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자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네.]
“흐음....”
강현은 고민했다. 뭐가 가장 좋은 방법일까? 좋은 방법? 누구를 위한?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나는 그냥 거기에 있는 지인들에게 별로 피해가 안갔으면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어.”
[그럼, 거기에 맞는 몇 가지 방안이 있어.]
잭이 제시한 방법의 방향성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미국이 개입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제현 그룹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 체계를 구성하면서 러시아가 개입하기 전까지 적절한 균형추를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노골적인 중국에 대한 견제로 보일 수 있었다. 또한 우주 도시를 공유하는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제현 그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미국은 그런 부담을 줄일 수가 있었다. 제현 그룹이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싫어하는 이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문제는?”
[제현 그룹의 운영에 미국의 입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 정경 유착이라고나 할까?]
“제현 그룹에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니지?”
[글쎄.. 상황에 따라서 손해가 갈 수도 있지. 기업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잖아. 제현 그룹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손을 내밀면 잡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어. 위치가 남한이고 또한 중국에 수출도 하잖아.]
“....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카랄니와 상의해 봐야해.”
제현 그룹을 경영하는 건 강현이 아니었다. 카랄니의 동의가 없다면 제현 그룹을 이용하는 방안은 수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카랄니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쪽이 편하겠네요.]
사실 한국의 대기업들과 부딪히면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배임혐의로 판결을 받고도 또한 보석으로 풀려나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는 행태는 어이가 없었다. 좀 한 두명씩 감옥에 갇혀주면 신경쓸 일이 적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그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카랄니였지만 오래 한국 기업의 경영자로 있다보니 일의 배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정경유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기득권을 빼앗자는 강현의 비전에 열정을 불태우며 뛰어든 카랄니에게 한국의 정치세력과 결합한 대기업들의 행보는 매우 귀찮고 까다로운 것이었다. 제현 그룹에게는 불리한 법규가 세워지거나 심지어는 고무줄 잣대가 들이대 지기도 했다.
열성적인 시민 지지층과 강현이 뒤에있다는 이미지가 없었다면 영향력의 확장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까지 등에 업는다? 중국에 큰 수출시장을 가진 제현 그룹은 물론 동반자 관계인 세컨드 밴드 연합에도 상당한 타격이 올 것이 분명했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원칙이 지켜져야 건전한 시장자유주의가 성립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카랄니도 뒷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국인인 카랄니에게는 아무래도 미국 정부가 더 편했다.
어차피 지금도 미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 우주 인부를 고용하여 우주로 보내는 것 역시 정경 유착이라면 정경 유착이었다. 사실상 정치와 경제는 분리할 수가 없었다.
이로서 제현 그룹이 미국 정부의 편의를 볼 수 있게 되면서 한반도 내에 새로운 친미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다 되었다. 이는 과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친일이 되었다가 친미가 되었다가 하는 매국 종자와는 태생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인지 더 민족주의적이며 미국이라는 세계에서 한국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우주에 가장 먼저 진출하며 세계의 패권을 쥐었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였다.
차후 한반도는 이해 관계가 첨예한 러중일 세 나라간의 알력이 부딪히고 서로 간을 보는 장이 됨과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 이 세 나라에 대한 외교 카드로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미국이 감시를 하는 상황이 된다. 나라 내부는 혼란스럽지만 외교적으로는 오히려 안정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외부의 혼란을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 국가에 내부적으로 혼란을 일으켜 외부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 없게 만드는 것 역시 정략의 한 방편이다.
세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미래란 어쩌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 = = =
“다녀오겠습니다!”
아폴로티움에 드디어 학교가 생겼다. 이름은 오리온 스쿨이었다. 우주에 있는 학교에 걸맞게 별자리를 학교 이름으로 가져왔다.
인터넷으로 기초 과정을 교육받던 준은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가득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집밖에서는 무인 전동차가 대기 중이었다.
아폴로티움의 공공 교통으로 자리잡은 무인 전동차는 아폴로티움이 제어하는 콜택시라고 할 수 있었다. 개인용 자가용은 아직 허가가 되지 않았다. 허가가 난다고 해도 대기 오염 문제 때문에 오직 전기 자동차만이 허용될 예정이었다.
“잘 다녀와라.”
강현과 샐리가 아들을 배웅했다. 준이 무인 자동차에 몸을 싣고 멀리 사라졌다. 이제는 샐리가 나갈 차례였다.
“시아 잘 보고 있어요.”
이제는 학교 이사장의 자리에 선 샐리는 학교의 운영을 위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립학교지만 아폴로티움의 첫 학교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했다.
그만큼 업무에 부담도 많았지만 아즈삭이 보조를 잘해주고 있었다. 샐리가 역시나 천재의 피조물 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으아앙!”
“자자, 엄마에게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해야지.”
샐리가 사라지는 것에 칭얼거리면서 울음기를 보이는 시아를 달래기 위해서 강현은 진땀을 흘렸다.
다행이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시아는 터트리려는 울음보는 참아냈다.
강현은 딸을 안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딸의 재롱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다가 아즈삭의 알림음에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박사님. 업무 시간입니다.]
강현의 공식적인 업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아즈삭의 칼 같은 스케쥴 관리에 강현은 딸을 안고 서재로 들어갔다. 자택 근무의 메리트다.
근래에 들어 강현은 다시 신 통일장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 얼마전 빚어졌던 중력파 검출 논란이 계기였다.
중력파의 검출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증거이고 중력파의 성질을 연구해서 우주를 전자기파가 아니라 중력파로 관측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는 빛을 내지 않는 운석군이나 블랙홀, 성운 같은 것도 관측해 좀 더 정밀하게 우주를 관측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혁명을 불러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