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16-추억의 정리>
“자랑만 하지 말고. 넌 여기 자랑하러 왔냐?”
김 원장의 뚱한 말에 강현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당당히 돈 좀 보태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선뜻 얼마나 필요하냐고 말하려던 강현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보육원에 돈을 얼마나 지원하면 될까? 또 지원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실 제현 그룹에서 받는 적지 않은 배당금을 보육원으로 돌리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미국으로 돈이 왔다가 다시 한국으로 보내는 수수료를 제하려면 카니에게 말만 하면 된다. 자신의 배당금을 줄이는 만큼 김 원장의 보육원에 기부금을 주라고.
방법은 그렇다쳐도 그럼 액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강현의 배당금은 분기마다 십 수억 원 단위다. 아무래도 제현 그룹의 30%에 달하는 주식을 가진 대주주니까 주식당 배당율이 은행 이자에 불과할 정도라고 해도 규모의 경제로 적지 않은 돈이 생긴다.
그 많은 돈을 보육원에 준다?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강현으로서도 예상하기 힘들다. 돈에 날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얼마 정도가 좋을까요?”
“글쎄.. 애 하나 당 한 달에 50만원 정도는 적당하겠는데.. 우리집에 있는 애들이 32명 이니까 한 달에 1600만원 정도면 될거야.”
“...”
“뭐냐?”
“의, 의외로 검소하시네요.”
하도 억 단위의 자금을 다루다보니 김 원장의 입에서 나온 숫자에 적응이 안 될 정도다.
“쯧쯧쯧. 별 배경도 없는 애들에게 물려줄 건 검소함 밖에 없어. 그러니까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지. 쓸데없이 돈 많이 받아봤자 허파에 바람만 들어갈 뿐이야. 또래보다 빠른 현실 인식이 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김 원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강현의 눈에 김 원장의 낡은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소매가 헐어 보푸라기가 일 정도였다. 자신이 온다고 그나마 멋지게 차려 입은 것이리라..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좌번호를 받았다.
“아마 제현 그룹의 이름으로 들어갈 거에요.”
“그러냐?”
김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제가 여기에 온 건 비밀로 해주세요.”
“당연하지. 네가 여기에 온 걸 알면 별의별 해괴한 종자들이 찾아올 거다. 아마 국회의원도 있겠지.”
이슈가 있는 곳에 등장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이 놓친 천재, 그리고 그와 어릴적 인연이 이어진 김 원장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강현은 해괴한 종자에 국회의원을 포함시키는 김 원장에게 경고했다.
“혹시나 국회의원이 찾아오면 말조심 하셔야 돼요. 혹시 보조금이 끊길 수도 있어요.”
“끊으라지. 네가 있는데 왜 빌빌거리며 손바닥을 비벼? 나도 인생 말년에 배경 좀 믿고 설쳐보자.”
“그래도 귀찮으실걸요.”
“끄응.. 알았다.”
국가 기관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김 원장이었다. 그가 공립 보육원을 버리고 사설 보육원을 세운 것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런 반감 때문일까?
아무튼 기부금 이야기도 끝나고 다시 과거의 추억을 곱씹으며 카레와 카레 돈까스의 상관관계에 대한 농담도 나눈 둘은 슬슬 헤어질 시간임을 알았다.
“그럼, 또 몰래 와라.”
“몰래가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럼 오지마. 돈만 보내. 애들은 잘 먹여야지.”
“예.”
강현은 피식 웃었다. 한 편으로는 씁쓸했다. 이제 떠나면 또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힘들었던 유년 시설, 조금이나마 유쾌했던 추억을 심어준 사람. 강현에게 김 원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강현은 원장실을 나왔다. 경호원들이 그와 샐리의 주변을 호위했다.
문득 강현의 시선이 복도 저 끝으로 향했다. 검은 양복의 건장하고 분위기 있는 경호원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옷이 생각보다 후줄근 하지 않았다. 멀쩡한 옷도 버리는 한국의 경제 관념에서 입을 만한 옷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현은 역시 직접 확인하지 않은 세상의 단면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경호원들 중 한 명이 강현의 시선을 향한 곳으로 얼굴을 돌리자 아이들이 와! 소리를 지으며 흩어졌다. 천진난만한 모습에 강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과거에 어떠했는지 떠올렸다. 자신에게도 저런 천진난만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분명히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또 천재소년에게 허물없이 장난을 치던 김 원장과 함께 있었을 때, 그리고 은사님들 밑에서 교육을 받을 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과거의 자신은 그리 불행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전 천마륵 교수를 비롯한 은사님들을 다시 한 번 뵙기로 했다.
“오! 왔니!”
강현이 방문하자 천 교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딱히 일정을 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불쑥 방문한다고 연락이 와서 급히 휴강을 하고 시간을 냈다.
“제가 폐를 끼치는 건 아니죠?”
“폐는 무슨.”
폐 끼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천 교수는 오래된 제자의 방문이 마냥 반가울 뿐이다. 더구나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미국 정부까지 움직여 주다니. 덕분에 천 교수에 대한 평판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냥 뛰어난 학자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맥을 가진 사람.
덕분에 명절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나 단체에게서 선물을 받아 정중하게 돌려보내느라 흐뭇한 고생을 해야했다. 그도 사람인데 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그래, 무슨 일이니?”
천 교수는 강현이 긴 서론을 싫어하는 걸 알기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글쎄요. 딱히 목적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서요.”
“으잉?”
천 교수의 멍한 표정이 강현이 기억하던 근엄한 표정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냥 한 번 옛 생각도 나고 그냥 한 번 와봤어요.”
“그, 그러냐?”
하긴 목적이 있다면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않고 미리 말을 해줬을 것이다.
천 교수는 제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많이 변했구나.”
“그런가요?”
“아들을 낳았다고 들었는데.. 하긴. 남자는 아빠가 되는 순간 어른이 되지.”
“그건 좀..”
“물론 아빠가 되어도 애 같은 사람이 있기는 있어.”
천 교수의 농담에 강현이 피식웃었다.
“그나저나 네 덕에 요즘 일이 잘풀린다.”
“그래요?”
“한미 로켓 기술 협정이 완화되서 유인 로켓 기술이 한 창 개발 중이지. 앞으로 8개월 후면 유인 로켓이 나올거다.”
순간 강현의 표정이 굳었다.
“응? 왜 그러냐?”
“어.. 저기 교수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응? 뭐가?”
“사실은 유인용 매스 드라이버가 거의 완성 단계에요.”
“응? 뭐?”
천 교수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직 매스 드라이버로 사람을 쏘아 올리기 위한 추진력과 그 추진력을 감당한 거대한 시설을 지을 기술력을 확보할 동안 당분간은 로켓이 유력한 수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플라즈마 제트 엔진이 개발되어서요, 매스 드라이버의 부족한 출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어요.”
“.... 그, 그러냐?”
천 교수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로켓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 지인과 그들의 제자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어, 언제쯤 나올 것 같니?”
“최소 6개월, 최대 1년 안에는 프로토 타입이 완성될 거에요. 지금 한창 제작중이에요.”
“그, 그러냐? 그럼 로켓 관련 기술은 완전히 사장되는 거니?”
“글쎄요.. 사실 기술이라는 것이 적재적소에 사용하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장되지는 않을거에요. 특히 로켓 기술은 순간 출력과 우주 공간에서의 기동성 때문에라도 사라지지는 않을거에요.”
“결국에는 군사용 기술로 살아남는다는 거니?”
“굳이 군사용이 아니라도 쓸 수 있는 분야가 있을거에요.”
“하지만 네 관심사는 아니구나.”
“그렇긴 하죠.”
“쩝.”
천 교수는 씁쓸한 입맛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강현의 관심사에서 벗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기술은 혁신의 가능성을 외면 받는다. 실제적으로는 강현이라는 천재가 다루지 않기에 발전 가능성이 떨어진 것이지만 현상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아! 저 기술은 여기까지구나’라는 편견을 심는다.
천 교수는 미안하지만 미리 로켓 연구를 하는 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 이야기 관계자에게 말해도 되나?”
“음.. 한 달 쯤 뒤에요. 그때쯤이면 알려져도 돼요.”
“고맙다.”
“괜찮아요. 어차피 기밀로 할 기술도 아니라서요. 좀 빨리 알려져도 상관없어요.”
강현은 천 교수의 고마움에 손사래를 쳤다. 그 뒤로도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언제 다시 한국에 들어올 지 모르는 강현이었다.
그는 천 교수와 만남을 마치고 은사님들을 잠시 방문한 이후 제현 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내일이 떠나는 날이기 때문에 그 전에 김 원장이 운영하는 청록 보육원에 대한 기부에 대한 걸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 카랄니와 대화를 하던 도중에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원장님이 월급도 받지 않는다구요?”
“특이하죠. 아무리 사설 보육원이라고 해도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 월급을 받는데 말이죠.”
사설 보육원은 개인이 사제를 털어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기부금 이외에 수익을 기대할 수 없기에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는다. 그리고 정부는 공보육이라며 수입=지출, 즉 수입-지출=0이 되도록 운영하게 한다.
언듯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애들을 담보로 보조금 장사를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부 보조금이 현실과 동 떨어진 상황에서 사설 보육원의 운영은 회계 비리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아니, 비리를 저질러 감당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보육원 1500원. 지역 아동 복지 3500원. 제주 국제학교 4500원.
무슨 가격인가? 아동 소속별 한끼 급식비다. 제주 국제학교는 등록금을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혈세 지원이 없는 건 아니다. 교육부 특별교부금이라는 명목으로 1억 3천여 만원이 학생 한 명 당 지원됐다. 물론 모두 혈세다.
이런 상황에서 김 원장은 그야말로 엄청난 절약을 통해서 보육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 재산을 쏟아부은 보육원 부지에서 텃밭을 일구고 닭을 길러 반찬을 확보하고 시설의 수리도 직접 손으로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돕기는 하지만 그 조막만한 손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거기에 보육원생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교복이나 학용품도 사줘야 하는데 정부에서 그런 예산을 내줄 턱이 없다. 김 원장은 그럴 때마다 발품을 팔아가며 교복을 구해서 아이들에게 입혔다. 덕분에 치수에 맞지 않는 교복을 고친다고 팔자에 없던 재봉질도 하게 됐다.
카랄니는 청록 보육원의 실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여기가 과연 그 발달했다는 대한민국이 맞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심층 조사를 시작했고 김 원장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월급마저 모조리 보육원 운영에 쏟아붓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강현은 카랄니가 조사한 것을 하나 하나 넘겨보았다. 보고서에 첨부된 텃밭과 건물 뒤쪽의 낡은 시멘트 벽 사진을 보니 원장님이 짓던 피식 웃음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글쎄요.”
강현은 인정하고 있었다. 딱히 이런 풍경이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는 넓고 제3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미성년자들을 납치해 보육은 커녕 소년 병사로 세뇌시키거나 창녀로 만들거나, 아니면 앵벌이는 시키는 등 차마 보지 못할 일들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