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전 회장은 강현과 대화를 마치고 힘없는 모습으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 석간에 전 회장과 강현의 대담을 주제로 짤막하게 뉴스 기사가 났지만 잔뜩 굳어 찌뿌려진 전 회장의 얼굴이 매스컴을 타는 일은 없었다. 강현과 척을 진 모습은 절대로 보여서는 안된다. 수출 주도형 경제인 대한민국이 이미 우주 개발을 주도하고 있고 각종 핵심 기술을 쥐고 있는 유력인사와 불화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번에 수출에 타격이 올 것이다.
그럼 제현 그룹은? 제현 그룹과의 불화는 괜찮은가? 의외로 괜찮다. 한국 제현 그룹의 이미지는 괴짜 천재가 사회적 실험을 위해서 설립했다는 인식이 더 강했다. 경제 학자들이 제현 그룹과 기존 한국 재벌들과의 갈등 및 사회 구조의 변화를 논문으로 내면서 더욱 그러했다.
만일 강현이 정말로 기업에 욕심이 있었다면 더 큰 수익과 성장을 할 수 있는 경영 방침을 선택하도록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주주들에게 쫓겨난 카랄니를 경영자로 세우고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니 강현과 제현 그룹은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오히려 한국 제현 그룹은 강현의 실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미지였으니 딱히 강현의 눈치를 봐서 제현 그룹을 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전세계 바이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강현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제현 그룹 영업사원들의 태도와 제현 그룹에 선을 그은 강현의 태도가 신빙성을 더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기득권이 그런 제현 그룹을 제압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졸한 방법을 동원한다면 강현이 개입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전 회장이 돌아가고 약 20분 뒤, 최혜영이 쇼핑 준비가 완료 되었다며 강현 가족을 데리러 왔다. 샐리는 준을 품에 안고 최혜영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강현이 따라갔다.
“흐음...”
강현은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멍한 정신 상태의 강현은 준을 품안에 안고 있었고 샐리는 유아용품 점에서 최혜영의 도움을 받아 쇼핑중이었다.
“이게 어울릴까요? 아니면 이게 어울릴까요?”
“사모님, 요건 어떠세요?”
“이것도 예쁘네요. 이것도 주세요.”
점원이 옷걸이에 걸린 유아용 옷을 샐리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강현의 품에 안긴 준에게 옷걸이를 들어 대충 이미지를 체크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자, 신발, 장난감 등 임신 초기에 제대로 하지 못한 쇼핑을 원없이 했다.
그때는 강현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첫 임신이라 힘들었던 샐리가 대충 쇼핑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뱃속에 들어있던 준은 강현의 품안에 있었고 몸이 가벼워진 샐리는 부담없이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아! 이거 이쁘다.”
또다시 발걸음을 멈춘 샐리로 인해 이미 강현의 정신은 해탈했다. 장난감 코너에서 흥겨워하던 준도 이제는 지루한지 강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현, 이거 어때요?”
“예뻐.”
강현은 기계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다 사버리고 싶었다. 돈도 많으니까. 하지만 샐리가 ‘그 중에 예쁘지 않은 옷이 있으면 어떡해요?’라면서 반대를 했다. 쓸데없이 돈을 쓰는 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현은 벌써 수십벌이나 되는 준의 옷을 구매한 샐리가 이미 쓸데없이 돈을 썼다고 생각했다. 저 옷들 중 준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입을 옷이 있을까? 그때 쯤이면 훌쩍 자라서 옷을 다시 사야하니 샐리의 말은 모순된다.
‘아으..’
모순이 있으니 지적하고 싶다. 강현은 정신이 멍한 와중에서 입이 근질근질 거렸다. 그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논리는 과학적 방법론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모순된 상황을 지적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건 연구자로서의 본능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지적해봤자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동안 샐리와 쇼핑한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오늘은 힘들어도 견디자.. 라고 생각했다.
코너가 바뀌었다. 이제는 여성용품 전문 매장이었다. 샐리는 의외로 여기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았다. 강현이 예쁘다고만 한 옷을 재빨리 챙기고는 곧장 남성용품 전문 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현은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힘들어졌다.
“이, 이것도 괜찮은데?”
“괜찮기는요. 부족해요. 이번에는 이걸로,”
“그냥 다 사면 안돼?”
“다 사도 어차피 나중에는 안 입을 옷은 골라내잖아요. 지금 확실하게 입을 옷만 고르는 게 나중을 생각하면 시간 절약이 되요.”
그러니까 왜 강현이 입을 옷을 샐리가 고르는 걸까?
하지만 남편의 옷 중에 그나마 입을 만한 옷이 고급 브랜드의 양복 한 벌이라고 하면 경악하지 않을 아내가 있을까?
결혼 초에 샐리는 강현의 옷장을 정리하다가 기겁을 했다. 패션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편리성에만 중점을 둔 옷들의 존재에 샐리는 어이가 없었다. 그중 압권은 산타클로스가 만화 캐릭터처럼 그려진 펑퍼짐한 티셔츠였다. 이걸 20대 중반을 넘은 남자가 입는다고? 아무리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강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강현이 그녀의 생각을 들으면 억울할 만했다. 그의 평상시 복장은 연구용 가운이다. 그 안에 뭘 입든 별로 큰 문제가 안된다. 그러니 편한 옷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아무튼 샐리는 그동안 남편이 바빠 제대로 쇼핑을 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뽕을 뽑을 작정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강현을 백화점이나 옷가게로 끌고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준을 최혜영의 품에 맡긴 강현은 옷걸이가 되었고 샐리는 코디가 되어 수 십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천만 다행으로 쇼핑은 저녁 식사 전에 시작되어 식사 시간 쯤에 맞추어 마무리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현은 마네킹이 되어 더욱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강현에게는 힘들었고 샐리에게는 흡족했던 쇼핑 다음날, 강현은 가족을 데리고 어린 시절을 보낸 시설의 원장님을 만나러 갔다.
원장님은 여전히 시절의 원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아니라 사설 보육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오랜 만입니다, 원장님.”
“왔구나.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마누라랑 자식 새끼까지 데리고 왔네. 자랑질이냐?
중얼거리는 원장님의 말에 강현은 피식 웃었다. 다소 염세적인 기질은 여전했다.
“여전하시네요.”
“흰 머리 안 보이냐?”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보육원을 계속하시니까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하니?”
“원장님이 애들 돌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안 좋아하기는. 머리 큰 놈들보다 애들이 얼마나 말을 잘 듣고 착한데. 네가 유별났지.”
어떤 기업의 이사를 함정으로 기절 시켰을 때는 얼마나 웃겼는지. 김 원장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배가 아팠다. 꼬치꼬치 캐묻는 거랑 지 기분이 상하는 일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성질머리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유대 자본에 대해서나 한국에서 벌인 강현의 활약(?)을 매스컴으로 볼 때마다 그 성질 머리가 여전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잠시 과거를 떠올렸던 그는 강현의 옆에 있는 샐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쁜 마누라를 얻었구나.”
“네. 그렇죠.”
“현, 뭐라고 하시는거에요?”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샐리가 남편에게 물었고 강현은 가감없이 설명했다.
“샐리가 이쁘다고.”
“어머!”
김 원장의 칭찬에 샐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분위기가 좋아졌다.
“결혼은 하셨어요?”
“이미 애들 많아.”
김 원장의 말에 강현은 그러려니 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향했다.
“너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구나.”
“어떤 면에서요?”
“사고뭉치에서 의젓한 가장이 됐다고나 할까?’
“사고뭉치라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개구장이라고 해줄까?”
“그 나이 때 개구장이가 아닌 사람이 있나요?”
“껄껄껄! 말발이 많이 늘었구나.”
김 원장의 말에 강현은 그의 말장난에 낚였던 과거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샐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죄다 한국어라 알아듣지 못하자 슬슬 지루해졌다. 어쩔 수 없이 품에서 칭얼거리는 준에게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졸릴 것 같았다.
“그래, 성공하니 기분이 어떻니?”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요. 대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아요.”
좋은 일은 돈이 많아서 연구비에 빌빌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쁜 일은 여러 귀찮은 일이 몰려 온다는 것이다.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 유력 인사의 접견 요청 등 처음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성미에 맞지 않은 인간들을 대한다고 짜증도 많이 났었다. 차라리 학자나 연구원이었다면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사고 방식과 가치관,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니 이해하지 못할 답답함이 있었다.
“요즘 힘드신 일 없어요?”
“그러고 보니 돈이 모자라. 돈 좀 보태라.”
“돈이요?”
직설적인 김 원장의 말에 강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애들에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알아? 요즘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애기들 분유값과 간식값만 해도 등골이 빠질 지경이다.”
“그래요?”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아 적어도 먹는데 걱정이 없었던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부의 지원이 부족한가요?”
“정부의 지원이라는 건 말이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챙겨주는 거야. 나처럼 위에 샤바샤바할 성질머리가 없는 사람이 운영하는 시설은 더욱 그렇지.”
“쩝.”
돈의 집행에 비리가 얽히는 건 근절하기 힘든 문제다. 한 쪽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는 한 편, 다른 한 쪽에서는 예산 축소를 막기 위해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나쁘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예산의 낭비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거나 지탱하는 근간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국가 전체라는 관점에서는 지역 이기주의의 관료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사회적 배경이 다른 이기적인 인간의 이해관계였다. 각자의 입장 차이가 존재하는 한 그 간극을 메우는 건 결국 전체적인 사회 변화만이 높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김 원장이 말하는 문제는 공립이 아니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별다른 수익이 나지 않는 보육원으로서는 사설 시설에 정부가 지원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동안 어른이 된 아이들이 도와주는 걸로 버텨나가기는 했지만 더 잘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니냐? 그렇다고 이미 제 갈길 가고 있는 녀석들에게 손을 더 내미는 것도 할 짓은 아니고.”
“그럼 저는요?”
“넌 2조 달러나 있으면서 뭘 그리 엄살을 피니?”
“지금은 3조 달러에요.”
우주 개발을 하고는 있다만 소행성대를 개발해 자원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강현이 들이는 비용은 연구 개발비와 매스 드라이버 및 우주로 쏘아올리는 로봇 정도였다. 당연히 그 비용은 강현이 각종 라이센스로 벌어들이는 비용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