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박사님의 재산이 얼마나 되더라?’
그리고 그에 걸맞는 쇼핑 장소는 어디쯤이 좋을까? 경호하기 쉬운 곳은 또 어딜까?
최혜영은 경호팀장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연락을 하려다가 정문에 있던 경호원 한 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전화 걸기를 보류했다.
“무슨 일인가요?”
“박사님을 만나 뵙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요?”
경호원의 대답을 들은 최혜영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곧바로 강현이 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강현은 누가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누가요?”
“전해진 회장입니다.”
한국 1위의 자동차 제조업을 거느린 미래 그룹의 회장이었다.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는 거죠?”
“박사님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최혜영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비로 내려왔다. 소파에 전해진 회장이 앉아 강현을 기다리고 있엇고 그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 앉거나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 강 박사로군!”
강현을 발견한 전해진 회장이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면도 없는데 뭘 그리 반가워하는지 모르겠다.
강현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전해진 회장에게 손바닥을 보여 멈추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멈추세요.”
“응? 무슨 일인가?”
“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절차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절차?”
“네. 몸에 쓸데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합니다.”
강현의 말에 전해진 회장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건 명백한 모욕이다. 감히 미래 그룹 회장인 자신을 뭘로 보고!
하지만 강현은 그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제 안전을 위해서 CIA에서 마련해준 메뉴얼입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그쪽에 얘기를 하시던가요.”
전해진 회장의 얼굴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런 메뉴얼이 있다면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실제 강현과 강현의 연구실을 방문하려는 모든 인사들에게 적용되는 메뉴얼이었다. 시행하는 사람은 물론 CIA 요원으로 한국으로 올 때에도 몇 명 붙어서 왔다. 근접 경호는 총 네 명이고 원격 경호는 알 수 없다. 알려고 하면 알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 푹 앉아서 쉬고 있던 CIA 요원은 강현이 나오고 전 회장과 만나려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탐지기를 꺼내 전해진 회장의 전신을 훑었다. 삐삐 소리가 날 때마다 확인했는데 옷에 부착된 금속제 단추라던가 벨트 버클 따위였다. 절차를 끝내고 휴대폰은 당연히 수행원에게 맡겨진 채 전해진 회장은 홀몸으로 강현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일국의 대통령과 같은 보안이구먼.”
악의나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는 건 이해했지만 그래도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한 감정이 남아있었는지 본의 아니게 다분히 비꼬는 어투가 남아있었다.
“개인적인 영향력은 대통령을 넘어섰죠.”
강현은 무감정하게 대응했다. 그 말에 전해진 회장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시, 실례했네.”
얼마만에 사과라는 것을 해보는 건지 말이 더듬거릴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강현은 좋게 좋게 넘어갔다. 쓸데없는 감정 싸움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빨리 빨리 본론을 이야기 해서 꼴보기 싫은 얼굴을 치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강현의 의도를 모른 전해진 회장은 생각보다 강현의 태도가 호의적이라고 착각했다.
“커흠! 그래, 강 박사의 성공에 축하의 말을 건내고 싶구만.”
“감사합니다만 본론부터 꺼내주시요.”
덕담으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려던 전 회장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착각이 깨어지는 건 찰라였다. 강현의 말에 본론을 바로 꺼내는 그의 어조가 딱딱해졌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미국인입니다.”
“...”
서론을 먼저 꺼내는 전 회장의 입이 대번에 다물어졌다. 핏줄에 호소하려는 방법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다.
“그럼, 제현 그룹은 미국 회사인가?”
“제현 그룹의 법인이 한국으로 되어있지 않나요?”
“하지만 여느 한국 기업처럼 기업을 운영하진 않지.”
“한국 법에 저촉되나요?”
“...”
전 회장의 입이 다시 막혔다. 전 회장이 말재주가 없는 걸까, 아니면 강현의 말발이 너무나 강한 걸까?
“그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문화가 있는 걸세. 잡음이 없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지.”
전 회장의 말에 강현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제현 그룹을 댁들처럼 운영하라는 말인가? 내가 왜?
“저는 제현 그룹의 경영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말 한 마디 해줄 수는 있지 않나?”
“어떤 말을 할까요?”
“어, 그러니까 저, 적당히 주변 눈치를 봐서 이, 임금도 좀 낮추고 야, 야근도 좀 시키고..”
강현의 질문에 말을 잇는 전 회장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자신이 말해도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만일 제현 그룹이 매 분기 적자를 봐서 강현에게 자금을 수혈 받는다면, 그럼 그렇지, 그렇게 운영하니 그리 되는 거라며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지금 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제현 그룹이 건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있는 상황이니, 전 회장의 부탁은 그 경영 방식을 방해하는 청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얼마나 상식 밖인가?
강현은 전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인가?”
전 회장은 벌떡 일어설뻔할 정도로 놀랐다. 설마 강현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예 지금 전화를 할까요?”
“뭣?!”
강현은 바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전 회장은 더욱 놀랐다. 강현이 정말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카니 씨?”
[박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스피커 폰 모드인지 카날리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전 회장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혹시 바쁘신가요? 나중에 전화할까요?”
[하하! 괜찮습니다. 박사님의 용건이 우선이죠.]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화기애애한 대화가 잠시 지나갔다. 카날리의 한국어 발음이 많이 유창해졌다. 덕담이 오간 후 강현이 말을 이었다.
“혹시 경영 방침을 바꾸실 생각은 없나요?”
[…. 무슨 말이신지..]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들어서요. 제현 그룹에 일어나는 각종 잡음을 없애려면 적당히 그 나라의 관례를 따라서 시급도 법적 시급을 주고, 야근도 시켜야 한다는군요.”
[박사님. 오늘 뭐 잘 못 드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꽤 맛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런 말을 꺼내시는 겁니까? 경영자는 저입니다. 아무리 박사님께서 대주주라고 하지만 경영에 관여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왜...]
“아아, 제현 그룹의 경영을 좋게 보지 않으시는 분이 제게 ‘충고’를 하기 위해 직접 발걸음을 하셔서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쫓겨나더라도 경영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박사님.]
전화기는 꺼졌고 전 회장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다인가?”
“네.”
“저런 건방진 작자를 가만히 놔둘 생각인가?”
“건방지다니요? 이 사람은 전문 경영인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주주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룹을 잘 경영하고 수익도 내고 있죠. 결격사유는 없습니다. 혹시 전문 경영인이 왜 있는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전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내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군.”
“무리한 요구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계시긴 했죠?”
“....”
전 회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현의 입김이라면 충분히 제현 그룹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네는 기본적으로 온건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의 온건적인 면을 기대했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건가?! 이미 이 나라는 자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네! 제현 그룹이 지금의 경영 방침을 고수하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야! 그런데도 자신을 온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 회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는 이 나라에서 부모님을 잃었죠.”
강현의 담담한 말에 전 회장의 입에 바로 다물어졌다. 강현이 한국에서 저지른 일의 전말 중 복수가 이유라는 사실은 알음알음 쉬쉬하며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졌다. 전 회장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미 복수는 끝난 것으로 아네만...”
“복수의 대상들은 댁들의 일부였죠.”
“그렇네.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복수의 대상들은 댁들과 같은 부류였죠.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힘을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휘두르죠. 그런데 왜 제가 댁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하죠?”
“....”
“그리고 잘못이 없다라.. 적어도 법적으로 투명하게 사건을 처리했다면 제가 증오에 미쳐 날뛰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정도로 일을 크게 벌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체제는 그렇지 않더군요. 돈과 인맥, 권력으로 얼마든지 사건을 무마할 수 있어요. 그런 환경을 만든 댁들의 책임이 정말로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비약이네!”
“비약이 아니죠. 사고(思考) 실험을 해보세요. 만일 그때 검찰이 조금이라도 투명하게 사건을 조사하고 범법자들을 발견해 법대로 처리했다면 과연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미 법적 처벌을 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과연 제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 그건..”
“저는 처음에 당신들 모두를 쳐내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복수가 아니라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참은 겁니다. 아시겠어요? 당신들이 지금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당신들에게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참았기 때문입니다.”
전 회장의 얼굴이 이제는 아예 새파래졌다.
“그, 그럼 왜 제현 그룹을 남겨두었나? 참았다면서!”
“제현 그룹은 저를 도와준 이들에게 준 포상일 뿐이에요. 그 증거로 저는 제현 그룹의 배당도 탐내지 않고 경영에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댁들을 일부러 도태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저지른 일의 여파가 남아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을 뿐이죠.”
“자, 자신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은 해야 하지 않는가?!”
“제가 왜요? 댁들이 뭐가 이뻐서요?”
“....”
정 회장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강현은 박수를 한 번 치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쯤 되면 제 입장은 다 밝힌 것 같은데.. 할 이야기도 없지 않아요?”
“기어코 우리를 잘라내겠다는 뜻인가?”
강현은 전 회장의 말에 혀를 찼다. 참으로 이해력 떨어지는 양반이다. 아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가? 강현은 그의 착각을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설명했다.
“첫째, 저는 제현 그룹의 경영에 상관하지 않아요. 망해도 상관없어요. 둘째, 저는 댁들이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고 댁들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불쾌한 감정이 생기니까 상관하고 싶지 않은 거죠. 마지막 셋째, 고로 제현 그룹에 불만이 있으면 그쪽에다가 얘기하세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에게 이러지 말고.”
강현은 말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지켰다.